정진규 시론

정진규의 시론(29) - 싸우는 힘

시치 2008. 8. 18. 01:12
정진규의 시론(29) - 싸우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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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진이정의 죽음.

또 한 젊은 시인이 세상을 버렸다.(여기서 세상을 버렸다 함은 그가 마지막으로 발표하고 있는 그의 최근 시편들에 근거를 둔 표현이며-덧없음의 지우개 앞에, 난 흑판처럼 선뜻 맨살만을 내밀 뿐이다-이 말은 그의 죽음이 스스로 선택한 의지의 행위임을 뜻한다. 또라는 부사를 쓰고 있음은 지난 해 이즈음, 역시 한 젊은 시인이 그대로 드러낸 자살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절대적인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연주라는 이름의 시인을 기억한다.)
우리는 왜 이렇게 해마다 젊은 시인의 죽음으로 한 해를 마감해야 하는가. 심상치 않다. 그 개인의 정황에 의한 것일 뿐이며, 흔히 있는 일상적인 죽음 그 자체만으로는 말하기가 어려운 어떤 짙은 기류가 오늘의 우리 시 속에 흐르고 있음을 체감한다.
무엇이 오늘의 젊은 시인들을 이 같은 기류 속에 가두고 있는가. 진이정의 최근 시편들을 다시 읽어 본다.

죽으면, 그렇다......
그냥 없어지는 것이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거의 삼십 갑자가 흘렀다
그리고 나는 중년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이제 난 구체성의 신, 일상성의 보살만을 믿기로 한 것이다
덧없음의 지우개 앞에, 난 흑판처럼 선뜻 맨 살만을 내밀 뿐이다
아트만이 무너진 마당에
인생이 꿈이란 건, 그 얼마나 뻔한 비유인가
- [아트만의 나날들]부분, [현대시학], 1993. 11.

나는 꿈을 밀수하러 부둣가를 서성거린다
낡은 비유만이 내게 허용되어 있어라 ; 바람없는 바다의 돛배처럼
바다도 없이, 바다도 없이, 나는 항해한다
아버지, 알고 보니 제가 주였나이다, 나의 십자가는 정전되었다
심심산골의 푸른 구름을 부러워하지 않으리
망망한 저 바다의 물, 나는 그 맛을 아네
그 맛의 이름은 적멸이다 ; 나는 적멸로 궁궐을 짓고 아예 들어 앉는다
나는 지옥을 믿어 ; 쾌락과 나라는 존재를 믿듯이
저 저 미륵전이 내 의식의 그림자라니
그럼 나는 의식을 버리리라 ; 미륵전이 갈 곳, 알지 못해도
아버지, 저는 당신의 가스와 기름과 향로로 만들어졌나이다
-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1]부분, [작가세계], 1993, 겨울.

목단향으로 나를 태워 다오
몽정의 나날이여, ㄲ무의 정액이여 : 어디 마땅한 길을 찾아가거라
비단 같은, 비로도 같은, 총구멍 같은, 융단 같은, 너의 질
둔중한 성기로 매를 맞고 싶다
-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2] 부분, [작가세계], 1993. 겨울.

위의 시들에는 이 같은 절망들이 현실적 외압에서 온 것이건, 삶에 대한 근원적 질문에서 온 것이건 두렵지도 않는 <마음>으로부터의 일탈이란 건강한 현실적 회귀가 아니다. 뒤집어 놓고 보면 저러한 그의 꿈을, <마음>을 온전히 담을 수 없는 <몸>에 대한 적극적인 절망에 다름 아니다. 그는 목단향으로 자신을 태워 달라고 말하고 있다.
왜 좀더 <몸>을 허락할 수 없었던 것일까. 오늘의 많은 젊은 시인들은 <마음>이 들어가 앉을 자리가, 아니 틈조차 없는 것이 오늘의 <몸>이라고 믿고 있는 것일까. 진이정을 문상하고 돌아온 날 새벽, 내 노트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천사가 떠난 자리보다도 악마가 떠난 자리가 더 위험하다. 싸워야 할 대상이 없어졌을 때 시인은 무중력 상태가 되어 버린다. 싸우는 힘이 시인을 견디게 한다. <원초적인 정기가 조금도 부패되거나 손상되지 않은 최초의 장소와 그 순간>을 시인은 꿈꾸지만, 아니 살아 있을 동안 그것을 위한 상처투성이의 <싸움꾼>으로 바람 잘 날이 없지만, 그러한 장소와 순간이란 사실 이 지상에 없다. 뒤집어 말한다면 그 <싸우는 힘>을 시인에게 주기 위해서, 시인을 견디게 하기 위해서 그것 또한 있다고 해야 더 옳을지 모른다. 악마가 싸움의, 극복의 대상이듯 그것은 시인이 악마로부터 탈환해야 할 <여기>가 아닌 <저기>일 뿐이다. <싸우는 힘>일 뿐이다. 그 까닭일 뿐이다. [......]악마는 시인을 최면에 거는 무기를 지니고 있다. 시인에게 평화가 왔을 때는 일단 위험한 징후임에 틀림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시인이 <싸우는 힘>을 잃는다는 것은 상처가 상처 그 자체가 되어 버리는 순간이다. 상처의 힘! 그 팽만한 가죽부대에 악마가 구멍을 내어 버린 것이다. 전략에 걸려 버린 것이다. 문학은, 시는 끝까지 겹핍에 기댈 수밖에 없음을 믿는 것이 옳다. 결핍이, 그 상처가 자양이다.

아, 그러나 한 죽음 앞에 이 같은 내용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시인 진이정이 악마의 전략에 걸렸다는 말인가. 남은 것은 역시 이 시대의 한 젊은 시인이 보인 <몸>에 대한 적극적인 절망이다. <마음>을 <몸>에 돌려 주고 <몸>을 <마음>에 돌려 줄 수 없음이다. 심상치 않다. 다른 어느 시대의 시에서도 볼 수 없었던 기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