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규 시론

정진규의 시론(28) - 기호로부터의 해방을 위하여

시치 2008. 8. 18. 01:11
정진규의 시론(28) - 기호로부터의 해방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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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 1

한 사나흘
서쪽 바다에 갔었다
혼자서 물고기를 잡았다
첫 날은
내가 바다에 와 있다는
사실!
물고기라는
말!
그런 것들에 하루 종일 시달렸을 뿐이고
겉돌았을 뿐이고
둘째 날은
한낮의 바다에 떨어지는 햇살,
소름 돋는 절대 정적,
가만가만 핥고 있는 물결 소리에
하루 종일 갇혀 있었다
셋째 날!
비로소 자유가 왔다
그렇다, 모든 것은 이러하다
한 사나흘은 걸린다
물고기 한 마릴 잡았다
등이 푸르렀다 푸들거렸다
나는 소리를 질렀다
바다가 클클클 웃었다
몰래 도망가 있던 작은 물결 하나도
무슨 큰일이나 난 줄 알고
잰 걸음으로 달려왔다
재재발렀다*
무우밭에서
무우 하나 뽑아 먹고 있던 너,
너도 그걸 냅다 팽개치고
달려오는 게 보였다
- [현대시사상] 창간호, 1989. 겨울.

* 재재발렀다 : 정지용.

상징은 의도적인 구조물이 아니라 새로운 하나의 실체이다. 그것은 살아 있는 존재이다. 일상의 사물, 체험의 세계 속에 그것들은 자리하고 있다. 서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이다. 다만 우리가 그것들을 보편적이며 지시적인 기호로 가두고 있었을 따름이다. 나무는 나무일 수만은 없다는 초월적인 논리는 언제나 합당하다. 시가 이러한 기호들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는 자율성의 것이라는 근거는 여기에 있다.
이번의 [물고기]도 이런 의식의 한 소산이다. 실제로 지난 여름 나는 물고기를 잡으러 서쪽 바다에 가 있었다. 물고기가 잡히지 않았다. 까닭인즉 <물고기>라는 실체보다도 그 바깥의 현상들에 내가 매달려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겉돌 수밖에 없었다. 갇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물고기를 잡는다는 내 직접적인 행위는 그것의 극복을 위한 하나의 정신적인 싸움으로 이행되어 갈 수밖에 없었고, 그 싸움은 치열했다.
그렇게 해서 한 사흘 만에 잡은 한 마리의 물고기! 그것은 지시적인 기호로서의 한 사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유 그 자체이자 생명 그 자체로 내게 다가왔다. 발견이었다. 창조가 아니라 발견이었다. <시는 나 같은 바보가 쓰지만 나무는 하느님만이 만드시지요>라고 이야기한 어느 외국 시인의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시의 초월성이란, 또는 자율성이란 그러한 면에서 한계 안의 것이란 비극을 가지고 있다. 비록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내 싸움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내 과정일 따름, <물고기>는 가장 일상적인 존재이면서도 또 하나의 초월공간을 거기에 이미 마련해 놓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한낱 지시적인 기호로 내가 물고기를 가두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지시적인 기호에 내가 갇혀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물고기의 그 <자유>의 힘은 컸다. <나>가 아닌 <너>, <바다>가 아닌 <땅>이라는 이항대립 마저도, 그 양성 마저도 하나이게 하는 힘을 발휘했다. <무우밭에서/무우 하나 뽑아 먹고 있던 너,> 너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는 내 의식의 표출이 그것이다. 그러나 여기까지의 내 말은 이 시가 지니고 있는 정신적인 골격에 대한 진술에 지나지 않는다. 이 시가 시이게 하기 위한 또다른 내 지적 활동이 있었음이 발견되기를 나는 희망한다.
그것은 이를테면 <푸르렀다>, <푸들거렸다>, <클클클 웃었다>, <재재발렀다>, <냅다 팽개치고> 등의 감각적인, 그리고 운동적인 시어들이 이 시의 정신적인 골격과 어떻게 교감되고 있으며, <비로소 자유가 왔다/그렇다, 모든 것은 이러하다/한 사나흘은 걸린다>와 같은 부분에서 보이는 잠언적 각성이 이 시에 어떤 윤리성을 부여하고 있느냐를 발견하는 일 같은 것이 그에 해당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