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규 시론

정진규의 시론(27) - 질문과 과녁

시치 2008. 8. 18. 01:09
정진규의 시론(27) - 질문과 과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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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지 않지만 물 속엔 깨끗한 물 속엔 꽃의 두근거림이 있다고 누군가가 말했다 이른 새벽에 봄날 새벽에 안개를 헤치고 가서 풀밭을 한참 걸어가서 물가에 당도하여서 젖은 발로 그걸 보고 들었다고!
그는 다시 말했다 햇살이 그의 따뜻한 혀로 이슬들 핥기 시작한 바라 그때쯤, 마침내 물 속에서 솟아오른 꽃을 두고 오, 물이 알을 낳았다고!

그러니까 꽃은 알이다 그러니까 물은 자궁이다 두근거림이란 회임한 내 아내의 배에 귀를 대고 내가 듣던 바로 그런 소리다 내게도 그런 날이 있었다

상처를 핥아 다오, 물 속 꽃의 두근거림아!
- [몸시. 36-물 속엔 꽃의 두근거림이 있다], [문예중앙], 1991. 여름.

다음은 내가 위의 시를 쓰기 전후해서 적어 놓은 내 독서 노트들이다. 이것 말고도 다른 내 삶의 정황들이 나의 밖과 안을 둘러싸고 있었겠지만 이것들이 그간 있었던 나의 가장 직접적인, 가시적인 흔적들이랄 수 있을 것이다.

<움직이는 물은 그 물 속에 꽃의 두근거림을 지니고 있다>라고 시인은 말한다. 꽃 한 송이가 더 피어나는 것만으로 냇물 전체가 술렁대는 것이다.
- 가스통 바슐라르, 이가림 역, [꿈 꿀 권리], 열화당, 1990.

사상의 구축물 속에선 내 이마를 기댈 만한 어떤 범주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카오스는 얼마나 멋진 베개인가!
- 에밀 치오랑, 이재룡 역, [절망의 아포리즘], 작가세계, 1991. 여름.

삶이 쾌락 원칙과 현실 원칙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듯이, 본능 자체에도 양면성이 함축되어 있다. 본능은 화합 본능과 파괴 본능으로 형성되어 있다.유기체의 원시 상태로 퇴행하려는 충동이 화합 본능이고, 무기체의 상태로 퇴행하려는 충동이 파괴 본능이다. 원래 화합 본능과 파괴 본능이라는 본능의 양면은 서로 도우며 작용하여 본능 자체를 강화하고 확대하는 직능을 담당한다. 사물과 타인에 대하여 존중하고 염려하고 이해하는 데에 화합 본능의 일이 있고, 그러한 존중과 염려와 이해에 거슬러 방해하는 세력을 부정하고 증오하고 깨뜨리는 일이 파괴 본능의 임무이다.
- 김인환, [놀이의 본질](마르쿠제, 김인환 역, [에로스와 문명], 부록2, 도서출판 나남, 1989)

내 책읽기는 꼼꼼히 읽기가 아닌 건성건성 읽기에 더 가깝지만, 내 의식이 가서 닿는(이미 나의 내면에 형성되어 있던 것들과의 만남이란 말이 더 정확한) 대목들은 이렇게 어김없이 적어 두는 그런 버릇의 것으로 되어 있다. 한 가지 더 밝힐 것은 그런 대목을 만나게 되면 나는 그 순간부터 읽기의 진행을 어김없이 포기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에 속하는데 까닭인즉, 그 다음에 전개될 세계에 대한 내 호기심과, 특히 좋은 글들이 지닌 무서운 예인력과 흡인력에 비해 나는 더없이 왜소한 세계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버티는 힘도, 뱉어 내는 힘도 매우 허약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게 싫은 것이다. 좋은 글들은 유형적인 혹은, 무형적인 <인용>의 형태로 나를 포장하거나 스스로 정신의 감옥을 짓게 한다. 그 한 대목만으로도 벌써 나는 억압되고 있었던 거였다.
그렇다면 왜 그 대목들을 어김없이 적어 두는가. 그것은 그것들을 확실하게 흔적도 없이 극복하기 위해서이다. 그들 앞에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내가 그래도 자유로워질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이 거기에 있었다.
가장 무서운 것이 바로 불립문자라는 것이다. 그런 형태로 그것들이 내 안에 들어와 제멋대로 방류될 때 나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게 된다. 모든 존재들이 등을 돌리고 안개 속을 한없이 걸어가고 있거나 매우 느린 걸음으로 아득한 봄날의 산모롱이를 감돌고 있을 뿐이다.

대상이 분명해야 초월이 가능하다. 과녁이 보여야 화살을 날릴 수 있는 방향을 잡을 수 잇다.
가시의 세계가 내 정신의 몸이다.

불가시의 세계로부터 시작하는 사람들의 불행을 나는 언제나 예감한다.
공중 트라피쓰! 공중제비!
그것도 지상을 차고 나간 탄력으로 몸 안에 핵화된 힘의 뛰어나감이다. 돌아옴이다. 착지가 언제나 그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기댈 곳은 몸밖에 없다.
몸은 나의 결핍이며 나의 충만이다.
나는 저질 시인인가.
나는 자유롭지 못한가.

아무튼 나는 저들을 향하여 어떤 질문의 화살들을 던졌다는 것인가. 저들이 내 시를 위한 질문의, 과연 투명한 과녁이었다고 나는 말할 수 있는가. 그 답변은 매우 불투명하다. 다만 저들을 극복하기 위한 내 정신의 한 궤적이 그간에 매우 서럽게 또 한 번 무너지고 있었음을 나는 지금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