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규 시론

정진규의 시론(31) - 우리 현대시의 희망구조는 수정되어야 하는가

시치 2008. 8. 18. 01:16
정진규의 시론(31) - 우리 현대시의 희망구조는 수정되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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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자꾸 지워졌다. 시가 피를 흘리고 있는 꿈을 날마다 꾸었다. 전쟁 속에서 책을 만들었다. 걸프전쟁-.
지하드(성전)를 내세우건, 평화를 내세우건 절대적 오염과 소멸의 의지(?)로만 가득 차 있다고 할 수밖에 없는 전쟁 속에서 시가 할 일이 무엇인가가 찾아지지 않았다. 후세인 헤게모니와 아메리카의 헤게모니, EC 헤게모니 사이에서 속수무책으로 진땀만 흘리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 것인가. 뜨겁던 우리의 통일 논리도, 우루과이라운드 논의도 온데간데가 없었다.
저들은 뭐라고 열심히 말을 하고 있었지만 그건 정말 우리의 한 뛰어난 에세이스트가 이 시대의 말들은 주어와 술어 사이의 거리가 너무나도 아득해져서 건너갈 수가 없다고 술회한 것처럼 애매모호함 그 자체였다. 저들의 융단폭격과 저들이 쏘아대는 미사일이 파 놓은 웅덩이처럼 그저 음험할 뿐이었다. 끝간 데 모를 허무의 공동이었다. 돌을 던져도 가서 닿질 않았다. 저들의 목소리엔 음절마다 숭숭 털이 계속 돋아나고 있었다. 전쟁은 전쟁일 뿐이었다. 절대적 생명오염이었다.
어디 전쟁뿐인가.
우리의 한 뛰어난 경제 지도자조차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오염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오염은 오염을 야기시킨 자본의 논리에 의하여 또다시 제거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가능성은 무한합니다. 여기서 주저앉으면 당신이나 나나 똑같이 망합니다. 여기 우리 기업인들의 고민이 있습니다. 문명은 뭐니뭐니해도 돈입니다. 돈이 없으면.....>

이번 전쟁을 두고 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자본주의시대엔 가장 비자본주의적이 되어야 하는 것이 시의 영원성이라고 믿어 왔던 우리 앞에 이 자본의 논리가 갖고 있는 힘은 너무나 컸다. 우리 시의 독자들은 지금 저 경제 지도자의 편이다. 돈의 편이다. 그런 생각이 연일 꿈까지 압도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 시인들이 지니고 있는 희망의 구조는 바뀔 수밖에 없는가. 그것은 낡을 대로 낡은 것인가. 우리 시는 지금 어둠, 그 절망의 터널 속에서 그래도 아직은 훼손되지 않고 있을 원형의 보존이나 원형의 세계로 돌아가는, 어머니의 자궁으로 돌아가는 극복과 초월의 양식을 채택하고 있다. 그것이 오늘의 우리 시가 지니고 있는 보편적인 등식이다. 올해 신춘문예로 등단한 가장 어린 시인들조차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먼지 가득 뒤집어쓴 다리 부러진 가구가/고물이 된 금성라디오를 잘못 틀었다가/우연히 맑은 소리를 만났을 때만큼이나/상심한 가슴을 덥힐 때가 있는 법이다/가구란 추억의 힘이기 때문이다
- 박형준, [가구의 힘]부분

꿈 속처럼 깊은 바다,/활엽수림이여/먼 순례의 길에 오르는가/퇴색한 나의 멜라닌 색소에 푸른 물을 들이고 싶다
- 함명춘, [활엽수림]부분

우리 시의 희망구조는 이러하다. 결핍의 상황 속에서 원형의 세계에 온몸으로 기대고 있다. 그러나 시의 외연적 상황은 어떤가. 극복과 초월보다는 절망을 선택하고 있다. 원형을 파괴한 다음에 돈의 힘으로 그 오염을 제거하겠다는 것이 자본주의의 논리이며 전쟁의 논리이다. 엄청난 거리를 지니고 있다. 우리 시의 희망구조가, 이러한 시대의 균형을 유지시켜 주는 보이지 않는 힘이란 논리가 과연 언제까지 가능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 시의 희망구조는 수정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이란 아무래도 전쟁 그 자체와 절대적 오염 그 자체에 동의할 수 없는 존재란 사실로부터 떠날 수가 없다. 페트리어트 미사일이 되었건, 스커드 미사일이 되었건 그들 전쟁무기의 성능에 대해서 우리는 알 바 아니다. 거기 핵탄두나 화학탄두를 장착할 것이 아니라 시를 장착해서 쏘았을 때 어떻게 될까를, 그 아름다운 탄도를 꿈꾸는 우리의 의식은 정말 황당무게한 것일까. 시는 전쟁을 싫어한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바둑도 마찬가지다. 투쟁하지 않으면 지고 만다. 안온하게 편한 마음은 독약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