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모음

비유법/이규리

시치 2013. 2. 8. 23:17

 

비유법/이규리

 

 

 

방과 후 날마다 비유법을 가르쳐주시던 선생님이 계셨다*

비유법을 밥처럼 먹던 시절 있었다

비유는 하나로 여럿을 이해하는 일이야

 

노을이 철철 흘러 뜨거워서 닫아거는 저녁에

우리는 서쪽 창가에 앉아 흰 단어들을 널었다

나뭇가지에 서늘한 시간이 척척 걸리곤 했다

 

그 놀이에 탐닉하는 동안

놀이 끝에 서서히 슬픔이 배어나고 있었다 아파서

좋았다

그 찬란에 눈이 베이며 울며 또 견디며

 

아직 비유법을 가르쳐주시는 선생님이 계실까

선생님들은 다 어디 갔을까

비유법을 모르는 추운 꽃밭, 죽어가는 나무, 무서운 옥상들

 

뭐 이런 시절이 다 있어,

이건 비유가 아냐 방과 후가 아냐

 

제 생이 통째 비유인 줄 모르고,

 

저기 혼자 지는 붉은 해

눈 먼 상처들이야 자해한 손목들이야

 

 

————

* 이하석시인의 초등학교시절 회고담 중에서 취함

 

 

 

                       —《문학과 의식》2012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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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리 / 1955년 경북 문경 출생. 1994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앤디 워홀의 생각』『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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