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저흔(躊躇痕) / 김경주
몇 세기 전 지층이 발견되었다
그는 지층에 묻혀 있던 짐승의 울음소리를 조심히 벗겨 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발굴한 화석의 연대기를 물었고 다투어서 생몰연대를 찾았다
그는 다시 몇 세기 전 돌 속으로 스민 빗방울을 조금씩 긁어내면서
자꾸만 캄캄한 동굴 속에서 자신이 흐느끼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동굴 밖에선 횃불이 마구 날아들었고 눈과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시간을 오래 가진 돌들은 역한 냄새를 풍기는 법인데 그것은 돌 속으로
들어간 몇 세기 전 바람과 빛덩이들이 곤죽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썩지 못하고 땅을 뒤집어서야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동일 시간에 귀속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전이를 일으키기도 한다
화석의 내부에서 빗방울과 햇빛과 바람을 다 빼내면 이 화석은 죽을 것이다
그는 새로운 연구결과를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바람은 죽으려 한 적이 있다'
어머니와 나는 같은 피를 나누어 가졌다기 보단 어쩐지 똑같은 울음소리를
가진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주저흔/박제영
죽음 앞에서 제 죽임을 망설인 흔적,
망자의 사인(sign)
그것은 스키드 마크다
고속도로에 무수히 찍인 스키드 마크
제 삶에 급브레크를 걸어야 했던 절박의 흔적들
주저흔이란 방어흔이다
자살은 없다
모든 자살은 타살이다
주저흔/홍은택
사막에도 갈림길이 있다
모래 둔덕 사이
갈라진 길을 두고
머뭇거린 발자국들이 있다
곧 닥쳐올
모래폭풍에 휩쓸려
흔적조차 사라질
낯선 길과 길 앞에서
오래 주저주저한
낙타 발자국들이 어지럽다
한 생을 건너기가
그리 쉬웠을까
낙타의 갈라진 발바닥과
혹 위에 올라앉은 어둔 얼굴
검은 눈동자에 파란의
순간들이 이글거리고
저 세상으로 넘어가자
넘어가자 바람은 떨고
가늘게 흔들리는
면도날 푸른빛 속
살별의 무리
단칼에 끊지 못할 녹슨
욕망이 있었던 게다 필시
살별들이 베고 간
흰 손목 위 핏빛 빗금들
이미 내 몸이 사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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