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글귀를 읽을 때마다
반드시 도달해야 할 그 어떤 곳이 있을 것 같다
그 비로소는 어떤 곳이며 어느 정도의 거리인가
비로소까지 도달하려면
어떤 일과 현상, 말미암을 지나고
또 오랜 기다림 끝에 도착할 것인가
팽팽하게 당겨졌던 고무줄이
저의 한계를 놓아버린 그곳
싱거운 개울이 기어이 만나고야 마는
짠물의 그 어리둥절한 곳일까
비로소는 지도도 없고
물어물어 갈 수도 없는 그런 방향 같은 곳일까
우리는 흘러가는 중이어서
알고 보면 모두 비로소,
그곳 비로소에 이미 와 있거나
무심히 지나쳤던 봄꽃,
그 봄꽃이 자라 한 알의 사과 속 벌레가 되고
풀숲에 버린 한 알의 사과는 아니었을까
비로소 사람을 거치거나
사람을 잃거나 했던
그 비로소를 만날 때마다 들었던
아득함의 위안을
또 떠올리는 것이다
벌레가 살아서 내게 기어 온다
***
경계를 넘으면 낙원이다. 경계의 이쪽과 저쪽. 우리가 참된 이치를 몰라 無明인 것이다. 그런데 시인의 시를 빌면 無明이 따로 있지 않다 한다.
어린 아이 흙장난 같은 우리네 중생들의 고단한 세상살이를 시인은 한 편의 詩로 걸음걸음 三界를 건너는 일이라 본다. 참고 견디는 娑婆라는, 세상이라는 苦, 세상이라는 아뿔싸 옆에 있는 비로사로 독자들에게 화엄의 여행을 시켜주는 것이다.
오 놀라운 세상,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할쎄 이런 전차로 어린 백셩이 니르고져 홀베이셔도 어여삐여겨 글속에 깨달음이 있고. 오랜 수행 속에 팽팽한 고무줄처럼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구부러진 개울물이 바다되고 웅숭거리는 꽃이 피고 천겁 만겁 인연을 만나 사과가 열리고 비로소 참새떼가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쓸지 않은 마당을 떼로 찾아오면 벌레가 나오고 비로서 아이고 놀래라, 반가운 벌레(실존, 내가)가 내게(존재의 집) 기어 오는 것이다.
시인의 묘사描寫와 敍事에 고개를 끄덕인다. 나의 비로소는 어느날일까. 시인이 불특정 다수인 내게 말하기를 비로소는 세월의 아픈 채찍을 지나면 낙원의 계곡에서 흘러 내려오던 물이 낙차로 인해서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며 패어 고이게 되는 물웅덩이 같다. 그렇기도 하지만 다시 들여다보면 낙원에 있는 지금은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비로사라는 절의 주지가 비로소 라는 것 같기도 하고 비로소는 화엄의 바닷가에 있는 사과나무가 있는 시인의 생사해탈, 열반적정을 가꾸는 전원농장 같기도 하다.
산문과 운문의 차이가 확연하다. 행갈이 한다고 다 행이 갈라지는 건 아니다. 시가 주는 함축맛이랄까? 내가 시인이었다면 아마, 이런 글은 함부로 쓰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시인이 아니기에 시를 읽기 좋아하는 한 독자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 해도 출세간의 法을 구한다 해도 조심스럽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중의성, 다의성, 상징적의미, 기표, 알레고리가 무엇인가를 극명히 보여주는 시다. 시를 그렇게 비틀지 않아 난해하고 난잡하지 않아 자세히 오래 들여다 보지 않아도 그 속내를 쉽게 눈치 챌 수 있다.
낙원으로 가는 길, 비로소를 향해 <우리는 흘러 흘러가는 중>이라는 <니르바나, 죽음으로 가는 길>을 시인이 그림으로 그려주는 한 편의 시로 우리들의 삶과 문학에 대한 점수와 돈오의 開眼, 마침내 다다르는 점안의 법문 같기도 하고 아득함의 위안을 주는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좋은 시는 우리로 하여금 깊게 사유하게 하는 시인 것이다. 시인은 비로소에 다다를 때까지 너도 해 봐, 살아 봐, 너도 해낼 수 있어, 하고 속삭이며 귀뜸해 주는 것이다.
도시몽중 홀연 생각하니 나는 언제 마음깨쳐 비로소에 다다를 것인가. 으으으. 갑자기 벌레가 내 몸 마음에 달라붙어 꼬물거리는 看話의 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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