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시작할까? / 이승훈
1. 시는 어디서 오는가?
시는 역사가 쓰여지기 이전부터 존재했다. 인류의 역사가 문자로 기록되기 이전에도 인류에게는 역사가 있었고, 이 때의 역사는 대체로 종족이 살아온 내력, 혹은 종족이 이동해 온 흔적에 대한 이야기이고, 이런 이야기는 훌륭한 이야기꾼에 의해 전승된다. 그런 점에서 문자로 기록된 역사 이전에 이야기가 있었고, 이 이야기는 이야기꾼에 의해 전승되었다. 그러나 후대로 올수록 이야기꾼들은 그들의 종족에 대한 이야기를 후대에 전하기 위해 단순히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이야기를 기억할 수 있는 기술을 필요로 했고, 이런 필요 때문에 이야기꿈들은 이야기에 리듬을 부여하고 같은 낱말이나 문장을 반복하게 된다. 시는 이렇게 이야기를 기억하기 위한 기술의 개발과 함께 발전한다. 우리가 말하는 정형시의 기법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각운과 어구 반복은 이런 사정을 배경으로 나타난다.
그런 점에서 시가 최초로 태어난 곳, 말하자면 시가 온 곳은 이야기이고, 각운과 반복은 이야기를 기억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차츰 이런 수단과 함께 긴 이야기는 짧게 축소되거나 압축되기 시작한다.
결국 시는 간단히 정리하면 응축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 고대 시가인 <공후인>
혹은 <공무도하가(空無渡河歌)>로 불리는 다음과 같은 노래를 생각해도 알 수 있다.
님이여 그 물을 건너지 마오
님은 마침내 물 속으로 들어가셨네
물 속에 빠져 죽은 님
아아 저님을 어찌 다시 만날까
公無渡河
公竟渡河
墮河而死
當奈公何
'공후인'은 공후라는 악기를 뜯으며 노래한다는 의미이다. 어느 날 뱃사공 곽리자고는 한 사건을 목격하고 그 이야기를 그의 아내 여옥에게 들려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여옥은 너무 슬퍼서 악기를 뜯으며 위와 같은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노래에서 중요한 것은 곽리자고의 이야기이고, 그 이야기는 백수광부(白首狂夫), 곧 머리가 허옇게 센 미친 노인이 허리에 술병을 차고 강물로 걸어 들어가고 이때 그의 처가 노인을 향해 강물로 들어가지 말라고 호소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런 점에서 이 노래, 혹은 고대 시가는 백수광부 이야기를 압축한 것에 지나지 않고, 이런 압축은 각운과 낱말 반복으로 가능하고, 이런 압축 때문에 백수광부 이야기는 후대까지 전승된다. 대체로 모든 고대 시가가 배경 설화를 지닌다는 것은 시와 이야기의 관계에 대해 암시하는 바가 크다.
위의 노래는 슬픈 이야기를 미적으로 승화시키고, 따라서 이 시가를 읽을 때 우리가 체험하는 것은 비록 슬픈 이야기를 동기로 하지만 정형률과 낱말의 반복이 주는 즐거움, 각운이 주는 즐거움이고 따라서 시읽기 나아가 시쓰기는 우리에게 즐거움을 안겨준다. 그런 점에서 시는 감동이고 기쁨이고 가난한 영혼을 채워 주는 정신의 양식이다. 많은 이론가나 시인들이 시를 "여과된 삶" 혹은 "순수한 삶"이라고 부르는 것은 시가 거대한 삶의 이야기들을 걸러 그 핵심을 보여 주고, 이때 여과된 것, 곧 시는 최초의 이야기보다 강력한 호소력을 띠기 때문이다.
시는 고대부터 존재했다. 따라서 시를 쓴다는 것은, 혹은 시인이 된다는 것은 고대부터 현재까지의 문화나 역사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역사적으로 각 시대는 각 시대에 맞는 시의 유형을 소유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비록 각 시대가 그 시대에 고유한 시를 생산하지만 모든 시가 크게 보면 동일한 세계를 지향한다는 점이다. 요컨데 모든 시인이 말하는 것은 '내가 혹은 우리가 경험한 것은 이렇다'로 요약된다, 시를 쓰거나 읽을 때 우리는 새로운 방식으로 세계를 배우고 체험하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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