必死 筆寫

1959 / 이성복

시치 2019. 5. 21. 02:21


 1959 / 이성복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봄은 오지 않았다 복숭아 나무는 

채 꽃이 피기 전에 아주 작은 열매를 맺고 

불임의 살구나무는 시들어 갔다 

소년들의 성기에는 까닭없이 고름이 흐르고 

의사들은 아프리카까지 이민을 떠났다 우리는 

유학가는 친구들에게 술 한 잔 얻어먹거나 

이차대전 때 남양으로 징용간 삼촌에게서 

뜻밖의 편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놀라움도 우리를 무기력과 불감증으로부터 

불러내지 못했고 다만, 그 전해에 비해

약간 더 화려하게 절망적인 우리의 습관을 

수식했을 뿐 아무것도 추억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살아 있고 여동생은 발랄하지만 

그들의 기쁨은 소리 없이 내 구둣발에 짓이겨 

지거나 이미 파리채 밑에 으깨어져 있었고 

춘화를 볼 때마다 부패한 채 떠올라왔다 

그해 겨울이 지니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우리는 봄이 아닌 윤리와 사이비 학설과 

싸우고 있었다 오지 않는 봄이어야 했기에 

우리는 보이지 않는 감옥으로 자진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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