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모음

흰 그늘 속, 검은 잠 (외 1편)/조유리

시치 2013. 2. 8. 23:37

흰 그늘 속, 검은 잠 (외 1편)/조유리

 

 

 

한 삽 푹 퍼서 언덕 아래로 뿌리면 그대로 몸이 되고 피가 돌 것 같구나

 

목단 아래로 검은 흙더미 한 채 배달되었다

누군가는 퍼 나르고 누군가는 삽등으로 다지고

 

눈발들이 언 손 부비며 사람의 걸음걸이로 몰려온다

다시 겨울이군, 살았던 날 중

아무것도 더 뜯겨나갈 것 없던 파지破紙처럼

나를 집필하던 페이지마다 새하얗게 세어

 

먼 타지에 땔감으로 묶여 있는 나무처럼 뱃속이 차구나

타인들 문장 속에 사는 생의 표정을 이해하기 위해

내 뺨을 오해하고 후려쳤던 날들이

 

빛으로 얼어붙는구나

어디쯤인가, 여기는

 

사람이 살지 않는

감정으로 꽃들이 만발한데

 

죽어서도 곡이 되지 못한 눈바람이 검붉게 휘몰아치는데

 

 

                        —《시와 사상》2012년 겨울호

 

 

회화나무 종루에서 흰 발바닥이 흘러내릴 때

 

  

 

저만큼인가, 흰 나비와

나와의 거리

 

삼베 보자기를 풀면

저쪽 세상이 한 보따리 펼쳐진다

 

상여를 메고 꽃놀이 가신 큰아버지

암 병동에서 성냥불을 쬐던 외사촌

까맣게 탄 망막 저편에

태를 놓아버린 첫아이

 

어느 먼 생이

 

쇠종에 수의를 입혀 저녁의 무덤가로 끌고 가는 걸까

무수한 밤을 살아온

한 편의 이야기도 아직 시작하지 못했는데

 

태어나 첫 울음이 한 약속을 믿었지만

생은 결국 나에게 불효했다

눈물이 마르는 동안

얼굴은

 

식은 찻물로 돌아가고

누가 묽은 나날을 마흔 번 넘게 우려 건져내 버리는가

 

웃고 울다 쓸쓸해져 올려다보면

허공을 흘러다니는 나비의

흰 발바닥들

 

  

                       —《포엠 포엠》2012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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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리 / 1967년 서울 출생. 2008년 계간 《문학. 선》신인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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