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그늘 속, 검은 잠 (외 1편)/조유리
한 삽 푹 퍼서 언덕 아래로 뿌리면 그대로 몸이 되고 피가 돌 것 같구나
목단 아래로 검은 흙더미 한 채 배달되었다
누군가는 퍼 나르고 누군가는 삽등으로 다지고
눈발들이 언 손 부비며 사람의 걸음걸이로 몰려온다
다시 겨울이군, 살았던 날 중
아무것도 더 뜯겨나갈 것 없던 파지破紙처럼
나를 집필하던 페이지마다 새하얗게 세어
먼 타지에 땔감으로 묶여 있는 나무처럼 뱃속이 차구나
타인들 문장 속에 사는 생生의 표정을 이해하기 위해
내 뺨을 오해하고 후려쳤던 날들이
흑黑빛으로 얼어붙는구나
어디쯤인가, 여기는
사람이 살지 않는
감정으로 꽃들이 만발한데
죽어서도 곡哭이 되지 못한 눈바람이 검붉게 휘몰아치는데
—《시와 사상》2012년 겨울호
회화나무 종루에서 흰 발바닥이 흘러내릴 때
저만큼인가, 흰 나비와
나와의 거리
삼베 보자기를 풀면
저쪽 세상이 한 보따리 펼쳐진다
상여를 메고 꽃놀이 가신 큰아버지
암 병동에서 성냥불을 쬐던 외사촌
까맣게 탄 망막 저편에
태를 놓아버린 첫아이
어느 먼 생이
쇠종에 수의를 입혀 저녁의 무덤가로 끌고 가는 걸까
무수한 밤을 살아온
한 편의 이야기도 아직 시작하지 못했는데
태어나 첫 울음이 한 약속을 믿었지만
생은 결국 나에게 불효했다
눈물이 마르는 동안
얼굴은
식은 찻물로 돌아가고
누가 묽은 나날을 마흔 번 넘게 우려 건져내 버리는가
웃고 울다 쓸쓸해져 올려다보면
허공을 흘러다니는 나비의
흰 발바닥들
—《포엠 포엠》2012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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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리 / 1967년 서울 출생. 2008년 계간 《문학. 선》신인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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