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의 변명/박해람
계단 중간쯤에 죽어 있는 새,
바글거리며 육탈 중인 징그러운 문이다
구름의 하류가 키우는 모든 계단들의 변명엔 반드시 날아오르는 것들의 깃털이 있다.
모의(謨議)를 열어놓고 있는 익접(翼摺)
누군가 먼저 저 쪽에서 문을 열 때까지 계단에 앉아 기다리는데 아이가 좁은 몸으로 빠져 나오고 서둘러 닫히는 계단의 틈으로 절 한 채가 신기루처럼 서 있다
작은 새가 부리로 지워지는 종족의 몸을 맛보다 날아가고
꽃잎 끌고 가던 봄날이 흘깃, 흘기고 가고
계단의 손잡이는 오전에서 오후로 모양이 바뀌고
난감한 수단(手段)은 점점 썩어가고
깃털의 관(棺)으로 문을 잠그고 있는 계단, 비켜서 들어갈 수 있는 문은 없다
오그라든 조족(鳥足), 움켜진 문고리가 단단하다
끊어진 바람이 묻어 있는 새
담배를 물고 연기를 축내다 문득, 천적이라 여겼던 것의 뱃속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세상의 계단들은 날아오르는 짐승인 듯 비상과 착지가 한 몸에 있고 포물선 모양의 꽁지가 있다.
소리의 인주(印呪)가 붉다
—《시와 세계》 2011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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