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이재훈 시 보기 (7편)

시치 2010. 8. 3. 23:39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外/이재훈

 

그곳을 찾았을 때
모든 시간은 무너지고
가없는 기억의 언덕도 무너지고
또닥또닥,
희미한 발굽 소리만 들렸는데

2.
잠든 말, 묵상도 없는 말들이 벽에 붙어 있다 너의 소리를 들으려고 널 만진다 그제야 너는 벽화가 된다 널 만지면 황소가 되었다가 사슴이 되었다가 초원을 가로지르는 말이 되고 나는 말 위에 올라 타 노래를 부르는 추장이 된다

3.
말은 내게 뱃속을 열어 보여준다
건강한 줄기를 먹고 자란 말
빨갛게 화장(化粧)한 말의 뱃속
아름답다 아름다워서
뱃속에 질서있게 자리잡은 내장의 곡선에
손가락을 갖다 대본다
아프다, 말은 아프다고 비명을 지른다
뱃속에서 말의 새끼들이 뛰어나온다

4.
말이 쏟아져 내린다 초원에 내려 거칠게 달려나간다 내가 지겹게 머무는 도시의 거리까지 와서 내 머릿속을 후두둑후두둑 내달린다

5.
밤이 되면 나는 시를 쓴다
거리의 곤고함에 대해
꽃이 침묵하며 피는 이유에 대해
아는 척 쓰다가 말다가 결국
“말은 태양을 잉태했다”고 쓰다가

6.
믿음엔 증거가 있어야 한다
내가 검은 말을 타고 요정의 검을 차고
맥베스처럼 “눈 앞의 이것이 나인가” 되뇌이며
내 목을 자르고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 속으로 들어갔다면
누가 믿을 것인가


때 이른 유적 

 
너를 보다 보니
너는 안보이고 내 경험이 보인다
나는 너를 때 이른 경험으로 만지작거리다가
급기야 너를 훼손하고 만다

유적이란 게 있다
그것을 과대포장하거나 비약하고 싶진 않지만
내게도 비밀스런 유적 하나 있다면
그건 두려움이다
이를테면 바람소리만 남은 빈집 같은 것
그 공명 속에 사랑이란 서표가 흩날리는 것
내 가슴에 두려움이 녹슨 풍경(風磬)처럼 남아
새벽녘이거나 해가 지는 도시의 골목길에서
제 몸을 흔들어 나를 깨우는 것이다

저기 담벼락에 꽃 한 송이가 안간힘으로 피어 있다
꽃이 떨어지면 그 꽃을 지키던 잡초 하나는
평생 간직할 유적 하나를
선물로 받게 될 것이다
나는 작고 예쁜 그 꽃이 언젠가는 떨어질 것을 알고 있다
누구나 아는 이 사실을 알기까지
나는 내 젊음을 모두 소진했다

마음은 가장 무거운 유적이다


황홀한 배회


햇살에 걸려 넘어진다
어제 먹은 술 때문인지
햇살에 걸려 넘어진다
그 긴 밤을 뜬 눈으로 견디었다
붉은 눈을 하고서 무엇엔가
자꾸 걸리는 아침
햇살을 잉태한 건 밤이었다
나를 잉태한 건 밤이었다
광화문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 하늘을 보는데
누군가 내게로 왔다
밤새도록 먹은 것들을 토하는데
햇살이 가만히 와서
내 등을 두드려 준다 

 

   하얀 꿈


하얀 꿈을 꾼 적이 있다.
구름 위를 걷다가 하얀 피를 흘리는 날 만날 때.
그것은 긴 기다림 후에 나타났다.
태양계의 별들이 일렬로 설 때까지 몇 백년이 걸린다는데
나는 하루에도 수십 바퀴의 절망과 환희를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곤 한다.
긴 기다림이 우주에서는 한 끼 식사시간에 불과할지도.
내가 하루를 소진하고 다시 태어나 눈을 떴을 때,
세상이 하얀 빙하로 덮혀 있는 그런 꿈을 꾼 적이 있다.

비가 내린다. 빗소리가 머리를 후둑 내려쳐 잠이 깬다.
그동안 새벽 3시에서 5시 사이에 나는 왜 그토록 잠만 잤을까.
그 시간 동안 비가 내 방에 꽉 들어찰 지도 모를 일인데.
우기를 견디는 도마뱀의 숨소리를 어디서 배워왔던가.
저 비가 그치고 날이 밝아오면 새들은 또다른 안식처를 찾아 이동하겠지.
일제히 하늘을 날아오르는 새떼들. 서로 부딪히지도 않고
다른 세상으로 솟구치는 저 몸놀림 좀 봐.

꿈을 꾸면 때때로 하얀 세상을 보곤 한다.
늙은 어미를 짊어지고 설산을 오르며 부르는
나라야마부시(楢山節)의 애절한 가락을 듣기도 하고,
운좋으면 가슴에 아가미가 달린 소년이 바다를 자맥질하며
뿜어내는 은빛 물무늬를 구경하기도 한다.
내 영혼이 하룻동안 수십 바퀴의 절망과 환희를 돌아오면
하얀 꿈이 몇 백년을 지나 내 앞에 멈추곤 한다. 



   마루 

 
이별은 순간이다
그 순간을 이겨낸 자만이
슬픔을 바닥에 깔고 앉을 수 있다
나는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생을 버텨왔다
멀리서 새벽 종소리가 들려올 때
나는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어머니가 마루에 앉아 뜨개질을 하신다
엉덩이 밑에서 건져 올린 슬픔을
한 올 한 올 뜨고 계신다 



   거울 속의 얼굴


거울엔 과녁이 없다
내가 거울에 입을 맞추면
오히려 그는 없고 내 얼굴만
환하다
어디를 찔러도 되돌아오는 아픔
거울은 고요다
어떤 사연도 담지 않고
내가 볼 때마다 붉게 충혈된
눈만 되돌려 주며
침묵하는 사태
나는 도시의 은유에 머물렀다가
집에 돌아와 거울을 보며 와르르
내 얼굴이 무너짐을 본다
형체없는 얼굴,
소실점으로 모이지 못하는 얼굴,
폭력 앞에서의 쓴 웃음과
이별의 순간에 지었던 바보 웃음도
거울은 모른 체한다
말이 없는 두려운 침묵
내 가방엔 거울이 없다
사무실에도 햇볕이 살아 있는 시간에도
날 돌보지 않는다
어둠이 밀려와 환각이 날 감쌀 때
그는 조용히 내게로 와서
반짝반짝 날카롭게 웃는다

나는 여전히 할 말이 없다
더더군다나 그 무서운 고요에게는 



   붉은 주단의 여관


너를 사랑한다고 했을 때
이미 네 기억은 삭제되었구나
푸른 물에서
살점들이 떨어져 내리고 빛나는 은빛
강철이 널 휘감을 때
나는 붉은 주단이 깔려 있는
계단을 오르고 있었지

기억하지
거리에서 넌 바퀴에 깔려있었지
창자가 사람들의 발 밑에 널브러지고
너의 남은 뼈에서 벌레가 기어나왔지
흰 가운 입은 자들에게 둘러싸여
앰뷸런스에 넌 실려가고
조간신문에 네 얼굴은 관념적으로
인쇄되어 나왔지
수술실로 향하는 침대 바퀴소리를
들으며 넌 깊은 잠을 잤지

붉은 주단이 깔려있는 낭하를 지날 때
방문엔 은빛 케이블이 탯줄처럼
흘러나와 있었지
방 안에선 딸각 딸각
숨쉬는 소리가 들렸지

너를 사랑한다고 했을 때
이미 네 몸은 차가워졌구나
사람들은 너의 피로 물든
붉은 주단의 여관을
딸각 딸각
클릭하고 있었지

 

이재훈
1972년 강원 영월에서 태어났다. 1998년 『현대시』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현대시』 편집장, 『시와세계』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중앙대, 건양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시집으로『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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