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차창룡 시 보기(8 편)

시치 2010. 4. 29. 23:20

벼랑 위의 사랑.外/차창룡

 

 

모든 사랑은 벼랑 위에서 시작되더라, 당신을 만나고부터

벼랑은 내 마음의 거주지, 금방 날아오를 것 같은 부화 직전의 알처럼

벼랑은 위태롭고도 아름다워, 야윈 상수리 가지 붙잡고

날아올라라 나의 마음이여, 너의 부푼 가슴에 날개 있으니,

 

일촉즉발의 사랑이어라, 세상은 온통 양귀비의 향기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당신과 나는 벼랑에서 떨어졌고,

세상은 우리를 받쳐 주지 않았다. 피가 튀는 사랑이여.

계곡은 태양이 끓는 용광로, 사랑은 그래도 녹지 않았구나.

 

버릇처럼 벼랑 위로 돌아왔지만, 벼랑이란 보이지 않게 무너지는 법,

평생 벼랑에서 살 수는 없어, 당신은 내 마음을 떠나고 있었다.

떠나는 이의 힘은 붙잡을수록 세지는 법인지.

 

모든 사랑은 벼랑 위에서 끝나더라, 당신을 만나고부터

내 마음은 항상 낭떠러지였다, 어차피 죽을 용기도 없는 것들아.

벼랑은 암시랑토 않다는 표정으로 다투고 있는 우리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사랑을 노래할 수 있을 것 같다

 

 

 

갑자기 비가 와도 우산 없다 걱정하지 말자

이 세상에 완벽한 준비란 없다

몇 줌 흙으로도 시퍼런 바위틈 소나무를 보라

아파트 장만할 때까지 혼인을 미루지 말자

 

바람이 아직도 우리를 따라오고 있다

바람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간

영원히 촛불을 켤 수 없다

촛불을 켤 수 없다면 어둠 속에 몸을 섞자

 

바다에선 태풍이 무서운 속도로 올라오고 있지만

하늘에선 벼락이 무서운 속도로 내려오고 있지만

그래 봤자 인간에게 닥치는 최고 재난은 죽음

죽음 따위가 두려웠다면 애초에 태어나지도 않았으리

 

불행의 칼날이여 내 창자를 끊어 보아라

인간의 갈망을 죽이는 데 성공한 자는 없다

창자를 꽃목걸이처럼 목에다 걸고도

이제는 사랑을 노래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신의 유방

 

 

 

아 나는 우주를 가졌어라

벌거벗은 그대 가슴

입에 물면 한입에 바다여라

깊고 깊은 바닷속 그대 날 기다릴 때

 

높은 산을 뒤집어 바다를 지으니

그대 산꼭대기 입에 물고 올라오네

하늘도 그대 따라 올라와

그대는 산꼭대기 위에 우뚝 앉았어라

 

번개와 천둥은 하늘에서 살고

그대 앉은 자리 온갖 나무와 풀

물과 술과 꿀이 흐를 때

 

아 나는 우주를 가졌어라

벌거벗은 나의 마음

입에 물면 한입에 산이어라

 

                                  —시집 『벼랑 위의 사랑』

 

 

숯공장 탐방기 

 

 

  그 이상한 화장터는 강원도 횡성군 포동면 갑천리 고래골에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날마다 나무들의 장례식이 벌어지고 있지요. 다비식(茶毘式)을 위해 사제들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토막 살해된 나무의 시신을 가마 속으로 집어넣습니다. 구멍에 불을 넣으면, 커다란 바람 속에서 불벌레들이 번식하기 시작합니다. 불벌레들이 나무와 나무 사이로 건너다니며 나무껍질 속에 숨어 있는 개미와 진딧물과 거미들을 잡아먹습니다. 한 번의 장례식은 그리하여 수십만 번의 장례식입니다.
  수많은 나무와 벌레들을 잡아먹으면서 불벌레들은 하나이면서 여럿인 불호랑이가 됩니다. 커다란 불호랑이는 선풍기의 도움을 받아 숨을 들이쉬고 굴뚝을 통해 연기로 변한 날숨을 하늘로 내보냅니다. 불호랑이의 삶(죽음)이 4∼5일 동안 계속되면, 사제들은 드디어 활활 타오르는 죽음의 입구를 열고 수없는 불덩이로 몸을 나툰 불호랑이의 살아 있는 시체들을 꺼냅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한 사제가 긴 부장대로 시체들을 끌어내 입구 앞에 모으면, 역시 눈물 흘리면서 다른 두 명의 사제가 부삽으로 떠서 옆으로 옮기고는 미리 준비해둔 재로 덮습니다. 이곳의 다비식이 여느 화장법과 다른 점은 시체들이 한창 타고 있을 때 불을 끈다는 것입니다.
  잿무덤 속에는 사리가 들어 있습니다. 사제들이 사리를 조심스럽게 모아 관에 넣으면 장례식은 끝이 납니다. 그 사리가 바로 숯입니다. 숯이 됨으로써 나무의 생은 끝났지만, 숯이라는 새로운 생애가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뜨거운 가마는 나무의 무덤이자 숯의 자궁인 셈이지요. 숯은 세상의 온갖 더러운 기운을 흡착하면서 공기를 정화시키고, 음식물의 맛을 신선하게 유지해주고, 아기의 탄생을 알려주러 달려갑니다. 숯에 불을 붙이면 또 한 번의 장례식이 벌어집니다.
  숯은 불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숯 굽는 재료로는 반드시 갓 베어낸 나무를 사용하는데, 이런 나무는 물을 잔뜩 머금고 있지요. 물을 잔뜩 머금은 나무에 바람의 힘을 이용하여 불이 번지고, 흙가마가 불을 보호해줍니다. 따라서 숯은 우주의 4대 요소인 지수화풍(地水火風)이 서로 교접하여 만들어내는 것으로, 곧 우주의 다른 이름입니다.
 깜깜한 밤하늘의 잿더미에서 별들이 무수한 원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잿더미의 만다라에서 지금 우주의 장례식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지요. 장례식의 자궁 속에서 우리는 모두 숯이 되어갑니다
 

 


쟁기질1

 

 

쟁기질을 한다, 잡풀과 쓰레기와 먼지들이 서식하는
밭. 아버지는 밭주인의 묘를 벌초해주기로 하고
몇 년이나 묵혀놓은 그 밭을 갈고 있다.
잡초가 무성한 환자의 배를 수술하듯이,
신문과 텔레비전에 마취된 이 땅의 피부에 보습날을
댄다. 잡초로 뒤덮인 땅들이 뒤집어지고 부드러운 흙들이
태어난다. 지렁이가 모습을 나타내고 굼벵이가
어려운 걸음을 나선다. 빛 바랜 신문지가 아득한 사건 속으로
묻히고, 신문지 속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수천의 뼈들이
일어선다. 이러 이러 아버지는 소리를 질러대며
채찍을 휘두르고, 황소는 깜짝 놀라 펄쩍 뛰다
오줌을 싸고, 지렁이가 그것을 맞고 몸을 뒤튼다.
굼벵이도 그것을 맞고 움찔거리고, 수천의 뼈들도 그것을 맞고
희게 빛나고. 신이 난 보습날이 그들 사이를
다시 한번 지나간다. 날 끝으로 뼛조각이 묻어오고
뼛조각이 날 끝에서 땀을 흘린다. 이제는 뼛조각이
쟁기질을 하는지. 아버지와 황소는 힘든지도 모르고,
해가 넘어가도 넘어가지 않는 가난으로
쟁기질을 한다 쟁기질을 한다.


 


이무럽다’라는 말  
  ―유강희 시인에게서 배우다

 

 

‘이무럽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 줄 짐작함시롱도
나는 그것을 글로 쓸 수 없었다
 

  해너머리 개미상투 깔끄막 끝넘 응달메산이 당산뽀던 반석걸이 쇳대똠 도대문안 간지똠 청륭 초막골 염부람 노젯골 바우백이 시암보 왕쏘 등구쟁이 턱걸바우 새까지 뒤주골 대방퉁이
 

 우리 동네 지명들을 글로 적을 수 없었던 것처럼
 

 경운기를 젤 먼저 사서 경운기삼촌이라 불렸던 유제 아재에게 짐을 실어 준 것에 대한 사례로 운임 이백 원을 줄라치면 아재의 아짐씨인 큰골떡은

 
 아그미 귀산떡 허창시가 없능갑쏘 이무런 사이끼리 요거시 먼지시다요
 

 이 문장을 어떻게 적어야 할 줄 몰랐는데
 유강희 시인의 『오리막』(문학동네, 2005)이라는 시집에 실린 시 「그리운 호박벌」에서 “아무래도 이물없는 꽃이/그중 호박꽃인가보다”라는 구절을 보고 딱 나의 정처 없었던 말 ‘이무럽다’가 지자리를 찾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것이 이물(異物)이 없단 뜻 아니겄어 하이고

 
 이물없던 유제 사람 둘이 쌀개방 반대하다 이무런 군홧발에 밟혀 뒤지던 해
 이무럽던 사람들이 홍콩 감옥에 들어가 이물감을 마음껏 느끼고 돌아온 해


세계의 문학
시향 (2006년 여름호
 

 


내소사, 선운사, 동불암 똘감

 

 

내가 확인한 바로는
내소사, 선운사, 동불암 스님들은 먹고살 만하다
그 먹음직한 똘감을 하나도 먹지 않고 놔 두다니
그곳 스님들은 배가 충분히 부르거나
대단히 게으르다
 

왜 저 맛있는 똘감을 따지않죠?
저건 새들의 밥이에요
 

스님들은 둘러대기도 잘한다
 

보이는 것만 따먹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도 따먹어야죠

 
배부른 까치들도 깔깔거린다
까치들이 단단해진 배로 범종을 치니
여기는 채석강, 여기는 적벽강, 여기는 법성포
조개들이 일제히 입을 벌려 짹짹거린다
갈매기가 미사일처럼 날아들 때
 

시집 <나무 물고기> 2002년 문학과지성사


 
 
아쉬빈*의 후예들  
 
 
  세상에는 언제나 새벽이 되기 전부터 일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고
  그것은 신들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쌍둥이 신 아쉬빈은 여명이 트기 직전 일어나
  새벽의 여신 우샤스를 깨운다
  우샤스는 하나이자 여럿인 신이어서
  아쉬빈은 바쁘다


  아쉬빈의 후예들이 인간세상에 태어나니 곧
  신문배달하는 소년들이라
  소년들의 아버지는 동트기 전에 일어나는 농부 아니면 일용직 노동자
  역시 아쉬빈의 후예들이라
  우샤스와 태양신 수리야와 아쉬빈과
  농부와 일용직 노동자와 신문배달 소년이 한 집안이라


  새벽에 길을 나서면 이 과거와 현재의 집안 내력을 훑어볼 수 있어
  그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경험이지만
  벚꽃잎이 매달고 있는 영롱한 소리보다도 아름다운 호흡이 거기 있지만
  소년의 바쁜 발걸음에는 목련꽃 봉오리의 보드라운 어루만짐
  차라리 귀찮아 힘차게 신문을 내던질 뿐이다
  하루가 밝아오기 전 가장 깜깜한 시간


  한때는 가난한 사람에게도 희망이 있었다
  가난을 이기고 일어선 위인들의 이야기가 별자리였다
  가장 어두운 시간을 견뎌야 아침이 온다
  떡시루에서 김이 모락모락 난다
  빵집이 부풀어오르고 있다
  취한 연인이 사랑을 위해 러브호텔로 들어간다
  꿈이여


  소년이여
  배우가 되고 싶으냐
  국회의원이 되고 싶으냐
  가수가 되고 싶으냐
  CEO가 되고 싶으냐
  축구선수가 되고 싶으냐
  깡패가 되고 싶으냐
  신문 속에 모두 있다
  가장 암울한 시간의 신문 속에

 
  한미FTA 체결은 결국 다수를 위한 선택이었다는
  전체가 잘되기 위해 소수의 힘없는 국민은
  경쟁력 없는 산업은 죽일 수밖에 없다는
  온 국민의 눈을 제물로 삼아 더욱 성스러워진 신문을 배달하는
  아쉬빈이여
  눈 속에 사막이 들어갔나보다
 후 불어다오

 
  소년의 아버지는 한미FTA 반대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소년과 아버지가 함께 뛴다
  우샤스를 깨우기 위해 소년은 신문을 돌리고
  아버지는 소년이 돌리는 신문에 석유를 붓고 불을 지핀다
  가장 밝은 시간의 불로 지은 옷을 입는다
  그것은 아버지가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입은 값비싼 옷이었다 
    
* 인도신화의 아쉬빈(Aśvin)은 새벽을 알리는  쌍둥이 신이다. 아쉬빈은 새벽의 여
신 우샤스(Ushas)를 깨우고, 우샤스는 남편인  태양신 수리야(Sūrya)를 깨운다. 우
샤스의 언니인 밤의 여신 라트리(Rātrī)까지 포함하여 한집안이지만, 이 가족이 함
께 모이는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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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창룡 / 1966년 전남 곡성 출생. 조선대 법학과 졸업.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학위. 1989년 《문학과사회》에 시로, 1994년 《세계일보》신춘문예에 문학평론으로 등단.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미리 이별을 노래하다』『나무 물고기』『고시원은 괜찮아요』『벼랑 위의 사랑』, 기행문집 『인도 신화기행』등. ‘21세기 전망’ 동인. 제13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 

그는 지난(2010년) 3월 13일, “끊임없이 길을 갈 것이고, 길에서 꿈을 펼칠 것이며, 길 위에서 생을 마감하겠다.”라고 출가의 소회를 밝힌 후 해인사에서 행자 생활에 들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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