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박철 시 보기(6편)

시치 2010. 6. 10. 14:38

 

맞바람 아궁이에 솔가지 넣으며外 / 박철

 

 

청솔가지 긁어 넣으며
서울은 너무 혼잡한 것 같애요라고
써내려간 편지를 읽네
눈물이 나네
맞바람 아궁이에 앉아
갑자기 누구라도 찾아올 것 같은 해거름
솔가지 밀어 넣으며
당신은 얼마나 좋겠읍니까라고
써내려간 편지를 읽네
눈물이 나네
젖은 연기 내게로 밀려오는
맞바람 아궁이에 청솔가지 넣으면
눈물이 나네.

 

 

 

 


 섬잣나무 / 박철

 

 

  28년 전, 처음 시를 쓰기 시작할 때 나는 아팠다 그리하여 나만 아프고 나만 외롭고 나만 외면당하고 나만 가슴이 텅 비어 있었고 나만 조금씩 늙어갔다
 

  30여년이 지난 지금, 벌써 시가 지겨운 지금도 나만 아프고 나만 서럽고 나만 홀로 밤길을 걷고 나만 누군가에게 이용당하고 나만 빠르게 늙어간다
 

  아,
  어느날 베란다에서 내려다 본 오엽송 늙지 않는다
 

  30년이 더 지난다 해도 나는 나다
  나는 모를 것이다
  나무도 아프고 나무도 슬프고 나무도 때로 별빛처럼 빛나고 싶고 나무도 누군가가 미치도록 그립고 나무도 누군가를 때려주고 싶고 아,
 

  오엽송
  섬잣나무도 저렇게 파도를 잊고
  육지에서 저렇게
  늙어간다는 것을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  박철

 


   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 4만 원을 들고
   영진설비 다녀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으로
   두 번이나 길을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 삼거리를 지나는데 굵은 비가 내려
   럭키슈퍼 앞에 섰다가 후두둑 비를 피하다가
   그대로 앉아 병맥주를 마셨다
   멀리 쑥국 쑥국 쑥국새처럼 비는 그치지 않고
   나는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
   다시 한번 자전거를 타고 영진설비에 가다가
   화원 앞을 지나다가 문 밖 동그마니 홀로 섰는
   자스민 한 그루를 샀다
   내 마음에 심은 향기 나는 나무 한 그루
   마침내 영진설비 아저씨가 찾아오고
   거친 몇 마디가 아내 앞에 쏟아지고
   아내는 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나는 웃었고 아내의 손을 잡고 섰는
   아이의 고운 눈썹을 보았다
   어느 한쪽,
   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이 있기에
   오늘도 숲속 깊은 곳에서 쑥국새는 울고 비는 내리고
   홀로 향기 잃은 나무 한 그루 문 밖에 섰나
   아내는 설거지를 하고 아이는 숙제를 하고
   내겐 아직 멀고 먼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산촌 / 박철

 

 

오늘도 죽음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나
새롭지 않다
이제 죽음이나 사랑이나 다 느끼하다
벗겨도 벗겨도 지워지지 않던 향기
그 속쓰린 사랑과 죽음을 생각하며
산을 넘는다
지세로 보아 까투리 한 마리 살 것 같지 않은
골짝에 연기가 오른다
산촌이다 두어 가구
도시에서 밀려와 숨어사는 사람이 있구나
부러진 가지 일으켜세우고
버섯 곰팡이에 물을 뿌리는
산촌에도 해가 지는 가을 저녁
물소리가 곱다

 


   

격정의 세월 / 박철

 

 

격정은 사라지고
나는 긴긴 잠을 자누나
격정은 사라지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른들은 아이들을 피해 하나 둘
놀이터로 나온다
장기판을 놓고 차를 먹고 포를 떼고
졸들처럼 앉아 낮술을 마신다
격정은 사라지고 사랑은 가고
아이들이 버리고 간 그네에 앉아
흔들리는 것은 이것만이 아닐지니
언젠가 다시 올까 격정의 세월
쇠줄을 잡고 생명줄을 잡고
마지막 희망의 노래를 부를 때
차마 멀리 흐려지는
빛 고운 이마
 
 

 

 / 박 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염할 때
사람을 헤치고 내 손 끌어다가
할아버지 찬 손에 어린 손 쥐어주던 고모
애 병 좀 가져가요
그 덕인지 파랑파랑하면서도
삼십 년을 더 살았다
그 고모 돌아가시기 사흘 전
다시 내 손 잡고
내가 가다 네 병 저 행주강에 띄우고 가마
 

나는 이제 삼십 년 또 벌었다

 

박 철 시인

1960년 서울출생.  단국대 국어국문과 졸업 

1987년 창작과비평에 <김포 1> 등을 발표하며 등단

시집 - 시집 <도시의 나그네> 자유문고  1980 
<김포행 막차>  창작과비평사  1990 
<밤거리의 갑과 을>

<새의 全部><너무 멀리 걸어 왔다><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시힘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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