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심수행장

[스크랩] 2007년 2월 21일 초발심자경문 제11강 발심수행장 4 (望龍象德하야~)

시치 2009. 4. 8. 00:46

望龍象德하야 能忍長苦하고 期獅子座하야 永背欲樂이어다 行者-心淨하면 諸天이 共讚하고 道人이 戀色하면 善神이 捨離하나니라 四大-忽散이라. 不保久住니 今日夕矣라 頗行朝哉저 世樂은 後苦어늘 何貪着哉며 一忍은 長樂이어늘 何不修哉리오 道人貪은 是行者의 羞耻요 出家富는 是君子의 所笑니라


遮言이 不盡이어늘 貪着不已하고 第二無盡이어늘 不斷愛着하며 此事無限이어늘 世事不捨하고 彼謀無際어늘 絶心不起로다 今日不盡이어늘 造惡日多하고 明日無盡이어늘 作善日少하며 今年不盡이어늘 無限煩惱하고 來年無盡이어늘 不進菩提로다 時時移移하야 速經日夜하고 日日移移하야 速經月晦하며 月月移移하야 忽來年至하고 年年移移하야 暫到死門하나니 破車不行이요 老人不修라 臥生懈怠하고 坐起亂識이니라 幾生不修코 虛過日夜하며 幾活空身이관대 一生不修오 身必有終하리니 後身을 何乎아 莫速急乎며 莫速急乎아

發心修行章 終


반갑습니다. 2월 21일 염화실 인터넷 방송법문 시작하겠습니다.

원효스님의 발심수행장 공부 오늘은

望龍象德(망용상덕)하야 能忍長苦(능인장고)하고 期獅子座(기사자좌)하야 永背欲樂(영배욕락)이어다고 하는 구절입니다,


제가 발심수행장 글 중에서 특히 좋아하는 구절이 바로 이 구절입니다. 

수행자의 꿈이고 어릴 때 출가해서 끝없이 높은 성불의 경지를 그 나름대로 그 당시 지식과 상식으로 상상을 하고 그 상상에 이르러 가기 위해 부단히 정진할 때 어떤 마음에 다짐하던 그런 구절들이 바로 이것입니다.


望龍象德(망용상덕)하야 能忍長苦(능인장고)하고

용상의 덕을 바라보아서 희망하여, 능히 장고를 참는다, 오랜 고통을 길고 긴 고통을 참는다.

수행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 즐거워서하고 재미가 있어서 하고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것이긴 하지만 한편으로 보면 고행의 연속이거든요.

그래서 장고 하루 이틀에 끝날 일도 아니고 한두 달에 끝날 일도 아니고 또한 한 해 두 해에 끝날 일도 아니고 한 생 두 생에 끝날 일도 아니고, 이 길은 한 번 들어섰다 하면 영원히 세세생생 이 길만이 가리하고 하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하는 것이 바로 이 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보통일이 아니에요.

좀 하다가 뭐 끝내고 그때부터 다리 뻗고 늘어지게 잠도 자고 쉬려니 이런 생각을 하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을 보십시오. 부처님은 성도하고 나서 뭐 고행까지는 좋다고 합시다.

고행을 통해 성도를 이룬 뒤에 얼마나 더 정진을 하셨고 얼마나 더 많은 중생을 위한 노력하셨습니까?

그야말로 길에서 태어나서 길에서 사시다가 결국 길에서 열반에 드신 그런 분의 일생이 바로 부처님이시고, 부처님의 제자는 바로 부처님의 그런 삶을 본받고 그런 삶이 좋고 그런 삶이 꿈이고 그런 삶이 인생의 가장 보람되고 의미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만이 이 집안에 모여 사는 것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세세생생 할 일이고 영원히 할 일입니다.

한 번 시작하면 영원히 하는 일입니다.


望龍象德(망용상덕)하야 能忍長苦(능인장고)하고 期獅子座(기사자좌)하야 永背欲樂(영배욕락)이어다 그랬습니다.

용상의 덕이라

용과 코끼리는 동물 중에서 가장 왕이라고 하죠.

그래서 스님들이 결제할 때 소임을 이렇게 짜는데 이름을 용상방(龍象榜) 을 짠다고 그래요

방문이 길게 한지로 온 벽에 가득 차게 조실은 누구고, 주지는 누구고, 총무는 누구고, 선직은 누구고, 강주는 누구고, 교수는 누구고, 공양주는 누구고, 채옹은 누구고, 욕두는 누구고, 정통은 누구고 대중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소임이 20~30 가지가 되죠. 그 20~30가지되는 소임이 쭉 써지고 무슨 소임은 누가 이번 철에 맡게 되고 무슨 소임은 누가 이번 청에 맡게 되는가를 정하게 됩니다.

소임 밑에 이름을 하나하나 갖다 붙이는 시간을 가져요.

결제전날에 합니다. 15일 날이 결제를 하면은 14일날 저녁에 저녁 예불을 마치고 바로 큰 방에 모임니다. 내일부터 결제 들어갈 텐데 결재동안 각자 맡아서 해야 할 소임을 짜는 일을 용상방(龍象榜)을 짠다. 그럽니다.


용상대덕을 희망하기 때문에 그래요.

비록 지금은 올챙이 같고 하잖은 소인배라고 치더라도 그러나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서 용맹정진을 통해서 우리가 희망하는 그런 인격은 동물 중에 제일 왕인용과 같고 코끼리와 같은 큰 덕을 바라보고 그러한 덕을 지닌 인격자 최고 인격자 부처님 같이 되도록 하기 위한 그런 마음으로 결제에 임하기 때문에 그래서 이제 용상방을 짠다. 이렇게 이제 표현을 합니다.

참 아주 상징적이긴 하비만 근사하죠.

그래서 용과 같고 코끼리와 같은 동물 중에는 그런 동물이 가장 어른이듯이 사람들 가운데서 최고의 인격자 법력과 학덕과 모든 수행이 최고로 갖추어진 그런 인격자가 되기 위해서 능히 길고 긴 고통을 참고

사좌자를 기약해서, 사좌자는 부처님 자리를 기약해서, 깨달은 사람이 앉는 자리를 사좌자 라고 그럽니다.


期獅子座(기사자좌)하야 

사좌자를 기약해서, 부처님자리를 기약해서


永背欲樂(영배용락)이어다 

영원히 욕락을 등질지어다


뭐 세속적인 즐거움, 세속적인 욕망, 인간적인 욕망, 인간적인 즐거움 이것은 졸업이죠. 끝나는 거죠. 다 포기입니다.

그래서 사실 출가수행한 사람들이 마음에 깊이 다지게 되는 것은 나는 인간으로서 포기다. 더 이상 사람 대접받지 않겠다. 인간생활은 졸업이다.

영원히 이제는 수행자로 살고 부처로서의 삶을 살 뿐이지 더 이상 인간으로 살지 않는다하는 그런 각오를 되새기고 되새기고 또 되새기죠. 풀어지면 또 다짐하고 풀어지면 또 다짐하고 이것을 수백, 수천 수만 번을 다짐하면서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고 마음을 조아 가는 것이 바로 수행하는 길이죠.


제가 좋아하는 구절 중에 신라 말에 고운 최고운선생이 당나라에 가서 장원 급제하고 당나라에서 벼슬을 살다가 우리나라에 다시 이제 건너오죠.

열여섯 살에 당나라에 유학을 가는데 아버지가 그랬습니다.

10년 안에 급제를 하지 못하면 그때는 내 아들이 아니라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열여섯 살 먹은 아들을 당나라에 보내게 됩니다. 열여섯 살 먹은 최고운은 그런 아버지의 말씀을 들고 건너가서 6년 만에 급제를 하게 되요. 10년까지 걸리지도 않고 6년 만에 급제를 합니다.


그래서 당나라에서도 아주 높은 벼슬을 하다가 신라에서 한림학사의 벼슬을 하게 되죠.

그래서 한림학사벼슬을 하다가 뜻한 바 있어 벼슬을 다 내놓고 가야산에 들어가서 영원히 수도나 하고 세상에 나오지 않겠다. 하면서 가야산을 들어가는데 그런 각오로 들어갑니다.

들어가는데 마침 해제 철이었는가? 스님들은 걸망을 지고 가야산에서 내려오고 최고운선생은 걸망을 지고 가야산에 들어가고 그 만난 곳이 홍류동이라고 하는 해인사에서 10리정도 못 미쳐서 있는 계곡인데 아주 아름다운 계곡이죠. 홍류동계곡이라고 아주 유명합니다. 거기서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래서 참 세상을 다 등지고 산에 들어가서 수행하겠다고 하는 참 그런 서릿발 같은 다짐을 하고 들어가는 최고운선생의 입장에서 걸망지고 내려오는 스님들을 보니까 너무 실망이 크고 한심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스님들도 뭐 자기하고 똑같은 심정으로 입산을 해죠.

산이 좋아서 산에 가서 수행하겠다는 그런 마음으로 산에 들어가서는 해제가 무슨 상관입니까

이제 한 번 들어갔으면 다시 나오지 말아야죠. 이러한 마음을 갖고 들어가는 최고운선생이 그런 것을 보고 시를 하나 짓습니다.


僧乎莫道靑山好 山好如何復出山  試看他日吾踵迹 一入靑山更不還

승호막도청산호 산호여하부출산  시간타일오종적 일입청산갱불환

그런 말이 있죠.



僧乎莫道靑山好(승호막도청산호) 山好如何復出山(산호여하부출산)

스님들이여 청산이 좋다고 말하지 말라 청산이 좋다면 왜 다시 산에서 나오는가?


試看他日吾踵迹(시간타일오종적) 

시험삼아 다른 날 나의 자취를 한번 그대들이 시험삼아 잘 지켜보아라.


一入靑山更不還(일입청산갱불환) 하리라

나는 지금 이렇게 한번 청산에 들어가서는 더 이상 다시는 산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 멋진 시를 짓죠.

참 그 시가 어릴 때 걸망지고 다닐 때 워낙 좋아서 반야심경보다 더 많이 외운 시가 그 시다

평소에 그런 소리를 많이 하는데 그중에서도 

 一入靑山更不還(일입청산갱불환)이라고 하는 마지막구절은 정말 반야심경숫자 못지않게 외우기도 했습니다.


정말 마음이 흩틀어질때면 항상 一入靑山更不還(일입청산갱불환)

한 번 청산에 들어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한 번 청산에 들어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말을 끊임없이 되뇌면서 다짐하고 또 다짐하고 그렇죠.


청산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적인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삶을 다 포기하고 산에 들어가는 거죠.

그러니까 사람노릇 안하겠다는 것이고 사람취급도 받지 않겠다. 나도 사람노릇하지 않겠다하는 그런 각오가 그 속에 이제 담겨져 있습니다.


여기에 원효스님께서 말씀하신

용상의 덕을 희망하여 길이 오랜 고통을 참고 사자의 자리를 기약해서 영원히 세속적인 욕망과 즐거움을 다 등질 것이다 하는 이런 말과 일입청산갱불환 이라고 하는 것과 똑 같은 거죠.

청산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 설명된 이 내용이 그 뜻입니다.


산에 들어간다는 뜻은 아니죠. 산에야 나무하러 들어갈 수도 있고 약초 캐려 들어 갈수도 잇고 산삼 캐려 들어 갈수가 있습니다. 만은 꼭 산에 사는 것이 중요한 뜻이 아니죠.

산에 들어간다는 진정한 뜻은 원효스님의 말씀하신 이러한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런 말입니다.


行者-心淨(행자-심정)하면 諸天(제천)이 共讚(공찬)하고

수행하는 사람이 마음이 깨끗하여 텅 빈다

淨(정)이라고 하는 것은 깨끗할 정자 무슨 더러운 생각이 없다 이런 말 보다는 텅 비었다 말입니다.


諸天(제천)이 共讚(공찬)하고

모든 천신들이 다 같이 찬탄하고


道人(도인)이 戀色(연색)하면 善神(선신)이 捨離(사리)하나니라

도 닦는 사람이 이성을 그리워할 것 같으면 좋은 신들이 모두 버리고 떠난다.

그렇지 안이할 때는 다 지켜주고 보호해주고 돌봐주고 그러죠.

그런데 도 닦으러 들어가서 인간적인 마음이 움직일 때는 또 이성을 그리워할 수도 있고 마음이 흐려질 수도 있고 그럴 때는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四大-忽散(사대-홀산)이라 不保久住(불보구주)니 

지수화풍 4대로된 이 몸뚱이는 홀연히 문득 흩어지고 말아

뭐 아침나절에 건강하고 씩씩하게 출근하던 사람이 송장이 되어서 돌아오기도 하고 어제까지 괜쟎았는데 오늘 병들었다는 소식이 들리고 얼마 전에 헤어질 때 건강했었는데 그새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고 참 기약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생명입니다.


四大-忽散이라

지수화풍 사대로 된 우리인간의 생명이라는 것은 문득 흩어지고 만다.


不保久住니 

오랫동안 머무는 것을 보장할 수가 없어 

이건 누가 보장합니까? 부처님이고 누구고 뭐 무슨 돈이 보장합니까, 명예가 보장합니까, 부모가 보장합니까, 형제자매가 보장합니까, 자식이 보장합니까, 그 누구도 이 일을 보장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아무리 돈이 많고 명예가 있다한들 일 분 일 초도 더 늘리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수명이다 하는 것입니다


今日夕矣(금일석의)라 頗行朝哉(파행조제)

오늘도 이미 사실 따지고 보면 벌써 저물었다 이거야 그러니까 조금 일찍이 행할 것을 그런 뜻입니다.

아침조 朝 저녁석 夕

오늘도 지금 생각하면 이미 늦었다 말이야 벌써 저녁이 되었지 않느냐 이런 말이죠.

저녁이 되었지 않느냐 아침부터 일찍이 할 것이지 이제 그런 이야기인데

오늘도 늦었다 조금 일찍이 서두를 것을 이런 말입니다


사람들끼리 모여 일을 하는데 대게 누가 서두르는 사람이 있으면 우스갯소리로 우리는 그런 말을 하죠.

그렇게 바쁘면 어제부터 오지 왜 지금 와서 그러느냐고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죠.

정말 빨리 좀 이 좋은 길이라고 생각이 들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을 들면 하루 빨리 서둘러서 해야 할 일입니다. 아니면 은 시간이란 기약할 수 없는 거잖아요 


世樂(세락)은 後苦(후고)어늘 何貪着哉(하탐착재)며

세상의 낙이라고 하는 것은 뒤에는 반드시 고통이라, 어찌 탐착할 것인가

그러니까 일인이 장락이라 여기나옵니다 만은 그렇습니다.

세상의 즐거움이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설탕물과 같아서 설탕 맛이 끝나면 뒤에는 쓴 맛이 돌아오죠.

그러나 담담한 냉수는 처음부터 냉수이므로 뒷맛도 맑습니다.

그와 같이 세상 낙을 설탕물에다 비유할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크게 탐착할 일이 못 된다.


 一忍(일인)은 長樂(장락)이어늘

한 번 참는 것은 길이 즐거운 것이다


何不修哉(하불수재)리오

어찌 수행하지 안이하겠는가.


편안하고 싶은 유혹, 놀고 싶은 유혹, 즐겁고 싶은 유혹, 욕심 부리고 싶은 유혹 많죠.

내 몸이 하자고 하는 대로 하게 되면 끝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 유혹에 우리가 많이 휘말립니다. 그런데 한 번 참으면 견디어 내게 되고 견디는 것도 늘게 되죠. 그래서 그것이 이제 힘이 붙어 가지고 득력을 하게 됩니다

힘이 붙었다 하는 것을 우리가 得力(득력)이라고 그래요 얻을 득자 힘력자 得力(득력)이 되면 쉽습니다.

고통을 참는 것도 또 재미있어요. 그 나름대로 맛이 있거든요.


何不修哉리오

한번 참는 것이 길이 즐겁거니 어찌 수행하지 않으리오.


道人貪(도인탐)은 是行者(시행자)의 羞耻(수치)요 出家富(출가부)는 是君子(시군자)의 所笑(소소)니라 

전부 댓구로 척척 해 놓았는데 아 이것 전부 다 외워야 되어요.

이거 참 전부 외워 받쳐라고 꼭 하고 싶습니다. 만은 인터넷으로 이렇게 강의하는 것이 참 편리한점이 있기는 있는데 또 이걸 숙제를 검증하지 못하니까


우리 어릴 때는 그날그날 배운 것을 전부 외워 받친다.

딱 덮고 외워 받쳐가지고 그 외우는 것이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이 짝 ~이렇게 외우면 은 그때야 공부시작 해요. 10명을 가르치면 그중에 한 사람이라도 못 외우면 전체가 다 함께 합동으로 공부를 못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못 외우는 사람에게 부담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벌을 주는 거죠.

그러니 안 외울 수 없습니다 기를 쓰고 외우는 거죠.

이거 외워도 결코 시간손해 볼일이 아닙니다.

이건 뭐 백번을 쓰고 사경을 백번을 하고 천 번을 외워도 결코 인생 손해 볼 일은 결코 아닙니다.

참 대단한 멋진 글로는 천하의 명문이고 물론 뜻도 좋고 말씀드렸듯이 불교의 최고 명심보감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道人貪(도인탐)은 是行者(시행자)의 羞耻(수치)요

도 닦는 사람이 탐욕을 부리는 것은 수행하는 사람으로서 보통수치가 아니고 


出家富(출가부)는 是君子(시군자)의 所笑(소소)니라 

출가자한 사람이 돈이 많이 가졌다 부자다 그 사람 절이 몇 개란다. 뭐 좋은 절 주지를 해가지고 뭐 돈이 엄청나단다. 이런 소리 듣는 것은 군자들에게 비웃음을 살 뿐이다 이것 입니다.  비웃음을 살뿐이다.

뭐 길게 설명할 필요가 뭐 있습니까? 참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죠

이게 뭐 수행하는 사람 도 닦는 사람의 원리원칙에서 보면 시대를 이야기할 일이 못 됩니다

신라시대소리지 옛날소리지 이렇게 할 거리가 못 됩니다 그런 것은 다 핑계를 될 때 하는 소리지

시대가 어디 있습니까?

사실은 또 누구도 이 원칙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遮言(차언)이 不盡(불진)이어늘 貪着不已(탐착불이)하고 

차언이라고 하는 것은 막는다. 막을 차로 보는 거죠. 막는다.

막는다는 말이 다함이 없거늘 이건 이제 말하자면은 그만하겠다. 그만하겠다. 라고 하는 말을 하죠.

아~ 이 오늘만 낮잠 한숨 자고 내일부터는 안 자지 이런 씩으로 이제 자기가 다짐하는 그런 말이 끝이 없죠. 내일내일 내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영원히 내일이죠.

그런데 貪着不已(탐착불이)라

탐착하는 것을 말지를 않는다.


不已(불이) 己(기)기가 아니고 말이자 已입니다. 그만둘 이자 이미 이 라고 하죠.

탐착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이 하고


第二無盡(제이무진)이어늘 不斷愛着(부단애착)하며

다음다음 뭐 한 번만 더 하고 한 번만 더하고 그러면은 두 번째가 되는 거죠.

제이, 제이라고 하는 것이 계속 이렇게 다음으로 다음으로 연장시키는 것입니다.

차언 하고 이제 비슷한 뜻이죠.

그런 핑계도 결국은 다함이 없다 이거요. 근데 不斷愛着(부단애착)을 애착을 끊지 안이하며


此事無限(차사무한)이어늘 世事不捨(세사불사)하고 

세상살이 여러 가지가 있죠. 요것만 하고는 이일만 하고 딴 일은 안 한다 이렇게 합니다. 

주지도 이번 한번만 하고는 다음에 안하다 한다든지, 그다음에 세상사  좋은 일이 많은데 이것만 하고

딴 건 안 한다든지 그런 거예요.

이것만 이것만 하는 것도 이일만 이일만 하는 것도

뭐 집짓는 사람들도 그래요 보면 이번에 한 채만 짓고 더 이상 안 짓는 다고 안 짓는다고 재미 붙이고 욕심 부리면은 이제 그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此事(차사)

이 일만 하고 그만 두겠다 라고 하는 것도 한이 없거늘


世事不捨(세사불사)

세상사를 버리지 아니하고


출가하려고 마음먹은 사람들

근래에 보면 은 나이 들어서  출가한사람들이 있는데 벼르는 사람이 있어요. 보면 좋다고 생각이 들고 언젠가 출가를 해야 되겠다

그런데 이제 이런 인연이 있고 이런 하던 일이 있고 요것만 내가 해놓고 요것만 해놓고 그런 게 있어요.

그래서 미루는 사람이 실제로 있습니다. 꼭 그렇게 될 줄을 알아요. 그 일만 끝나면 은 출가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이 갖추어질 줄을 정말로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있어요.

핑계가 아니라 그런데 그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도 일찍이 출가하려고 했었는데 부왕이 아들 하나 낳아서 대라도 잇도록 해 달라 라고 해가지고 그 간청을 들어주느라고 사실 출가가 늦어죠.

그런데 이제 아들 하나 낳고는 장애라고 이름을 그렇게 라훌라라고 하는 우리말로 하면 장애라고 하는 말인데 출가를 장애했다, 방해했다 이런 뜻으로 이름도 뭐 같이 지어놓고는 밤에 아무도 몰래 자기 임무 다했다 이거죠.


그리고는 성을 벗어나서 출가합니다. 출가하는 사람은 대게 도망가요

도망 안가고 뭐 이렇게 제대로 출가하는 경우가 드문니다.

우리 선배인 석가모니 부처님부터 그렇게 도망을 갔어요.

대다수사람들이 도망을 갑니다.


근래 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그래요

태국에서는 마을에서 풍악을 울리고 코끼리를 태워가지고 출가하는데 마을사람들이 농악을 울리면서 많이 무리를 지어서 따라가고 하는 그런 풍습이 있다고 하는데 글쎄요 북방불교에서는 그런 예가 없습니다. 뭐 중국이나 한국이나 일본이나 거의 다 도망가는 형식으로 그렇게 하죠.


彼謀無際(피모무제)어늘 

도모하는 것이 즈음이 없다, 끝이 없다 이런 말입니다.

도모하는 일이 아까 내가 말한 요걸 해놓고 그 다음에 이것하고 이렇게 이렇게 해서 그때는 이제 내가 여러 가지로 여유가 생기니까 궁리를 하는 거죠.

저 궁리하는 것이 끝이 없거늘


絶心不起(절심불기)로다

끊을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끝이 없습니다. 

저기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그냥 문득 그렇게 자기 임무 완수했다 싶으면 문득 떠나버리는 거지 뭐

나라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든지, 무슨 라훌라가 잘 커든지 말든지 그건 뭐

부인이 애석해하든지 말든지 그런 것 따질 일이 아니죠.

 그런 것 저런 것 다 정리하고 아이고

부인도 뭐 이렇게 진정시켜 놓고 이해를 충분히 시키고 아이도 좀 크거든 나라정치도 어느 정도 안정이 되거든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피모입니다

그가 도모하는 일이 끝이 없거늘, 끊는 마음을 일으키지 안이 한다.

 

今日不盡(금일부지)이어늘 造惡日多(조악일다)하고 

오늘만 하고 나쁜 일도 그래요 아이고 오늘만하고 오늘만 하고 

담배 끊는 사람들이 대게 그렇잖아요. 오늘만 피우고 내일부터 안 피운다. 

그게 어디 됩니까? 오늘만 오늘만 하는 것이 다함이 없죠.

今日不盡이라 造惡日多하고 

악을 짓는 일이 날로 많아가, 더 피운다 이거죠. 한 예로써 말이죠.

 

明日無盡(명일무진)이어늘 

내일만 내일만 하는 것도 내일도 끝이 없어


作善日少(작선일소)하며

선을 짓는 일이 날로 적어진다.


今年不盡(금년불진)이어늘

금년만 금년만 하는 것도 또 끝이 없다 이거야, 금년 지나고 나면 또 금년이 돌아오는 거죠.

금년만 금년만 하는 것이 다함이 없거늘


無限煩惱(무한번뇌)하고 

한없이 번뇌하는 거야 이 생각 저 생각하고


來年無盡(내년무진)이어늘

내년만 내년만 하는 내년에는 꼭 이렇게 할 것다. 내년에는 이렇게 할 것 하지만은 그게 어디 됩니까?

하는 것도 끝이 없건만 보리에 나아가지 못한다.


不進菩提(불진보리)로다

깨달음의 길에 나아가지 않는 도다


時時移移(시시이이)하야 速經日夜(속경일야)하고

시간 시간이 옮기고 옮겨서 어떻게? 날과 밤이 금방 지금 오늘 저녁이지 않습니까?

하루 낮과 하루 밤이 얼른 지나가 버리고


日日移移하야 速經月晦하며 

하루, 하루 그래서 하루가 지나죠.

하루라는 것은 한 시간 한 시간이 하루가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한달은 어떻게 하루가 하루가  옮겨가면 그만 한달이 되는 거죠.

日日移移하야 速經月晦하며 

하루하루가 옮기고 옮겨서 빨리 한달이 월해라고 하는 것이 그믐해자인데 그 달이 끝난다. 이말이야  그달의 그믐이 빨리 지나가버린다. 한달이 퍼뜩 지나가 버린다 이거죠.

뭐 경험하셔서 다 잘 아는 일이죠


어릴 때는 세월이 천천히 가는 것 같았는데 그야말로 40대가 되면 40Km로 달리는 자동차 같고 50대가 되면 50Km로 달리는 자동차 같고 60대가 되면 60Km로 달리는 자동차 같고 시간이 지나가는 것이 눈에 훤히 보여요. 그 참 신기한 일이지...

어릴 때 안 보이던 시간 흘러가는 것이 나이 드니까 다보이고 세상에 빠른 것은 세월 뿐이다 는 생각이 들고 ....

그러면서도 좋은 일은 더 많이 하지 못하고 정말 지혜를 갈고 닦아서 현명하게 살려고 하는 그런 노력을 크게 기울이지 않는 것 그게 또 병이죠.


速經月晦(속경월회)하며 月月移移(월월이이)하야 忽來年至(홀래년지)하고

한 달 한 달이 옮기고 옮겨서 어떻게 홀연히 한해라고 하는 것이 그만 이르러 온다.

한해가 되는 거죠. 한달한달 해가지고 그만 퍼뜩 일년이 지나지 않습니까?

음력 7, 8월 9월 그 무렵에는 신년이라고 하는 것이 까마득하게 남은 것 같죠.

설이 라고 하는 것이 한참 남은 것 같은데 벌써 설도 후딱 지나가 버리고 양력으로는 벌써 2월이 지나가고 참 세월 참 빠르고 무상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年年移移(년년이이)하야 暫到死門(잠도사문)하나니 

한 해 한 해 옮기고 옮겨서 결국은 뭐야?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게 되다 이거야

잠깐 사이에 그것도 잠깐사이에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게 되나니


破車不行(파거불행)이요 老人不修(노인불수)라 

깨어진 수레는 고장 난 자동차는 가지 못하고 늙은 사람은 수행하지 못 한다

나이 늙으면 뭐 몸 건수하는데 다할 수가 없죠.   

몸 관리도 제대로 못하는데 수행이 어디 있습니까? 

책을 볼러니 눈이 침침하지 신경질 나지 잘 머리에 들어오지 않지 뭐 온갖 망상은 머리에 꽉차있지 힘은 들지 그야말로 파거불행이요 노인불수라 고장 난 수레는 갈수가 없고 나이든 사람은 수행하지 못 한다


나이 들면 어떻게 臥生懈怠(와생해태)하고 坐起亂識(좌기란식)이니라

늙어서는 게으름만 자꾸 부리고, 자꾸 눕고 싶은 거죠. 허리 아프고 다리 아프고 뭐 앉자 서 경한구절 볼 라고 하고 참선 한번 하려고 염불 한번 하려고 해도 그만 눕고 싶죠.  


臥生懈怠(와생해태)

누워서 게으름을 부리고


坐起亂識(좌기란식)

앉아가지고는 어지럽게 이 생각 저 생각 쓸데없는 공상이나 자꾸 하게 되고, 되도 않는 공상이나 하게 된다

염불하든지, 화두를 들던지, 경을 읽든지 뭐 한 가지 아주 뭐 간단한 것 나이 들수록 단순한 것이 쉽습니다. 쉽고 좋거든요.

반야심경을 외우든지 할 것이 많지 않습니까?


불교에는 수행 방편이 아주 여러 가지가 많아서 입맛대로 골라잡아서 있습니다.

뭐든지 하려고만 하면은 어느 것이 좋다 나쁘다 그런 것도 없어요. 그저 자기 성격과 체질에 맞으면 그게 좋은 거니까 그렇게 이제 할 일이다 거죠


그래서 참 인생난득(人生難得)이요, 불법난봉(佛法難逢)이라.

사람 몸 만나기 어렵고 불법만나기 어려운데 우리가 이렇게 불법을 만나서니까

이 보물창고를 발견했으니까 이 보물창고에 들어와 가지고 한껏 주머니에 얼른 자꾸 주워 담아야죠.

자꾸 주워 담아 가지고 그것으로써 내 생으로 이제 걸어가야 합니다. 다른 것 아무리 쌓아봐야 다음 생까지 가져가지는 것은 아니에요.


다음 생까지 가져가지는 것은 유유업수진이어라

오직 업만 따라가거든요 업만 따라가니까 좋은 업을 지어야죠.

공부하는 업, 마음 닦는 업, 복 짓는 업, 현명하고 아주 지혜롭게 사는 업 이런 것을 자꾸 지음으로 해서 다음 생에 태어나도 그 아뢰야식에 저기 아뢰야식에 잠재되어 있다가 그것이 결국은 내생을 다음 생을 좌지우지하는 거죠.


욕지전생사(欲知前生事) 금생수자시(今生受者是)

전생의 일을 알고자 할진데 금생에 지금 내가 받고 있는 것이 바로 전생에 내가 한 일이다

금생에 머리 둔하면 전생에 공부 안했다는 뜻이죠.


욕지래생사(欲知來生事) 금생작자시(今生作者是)

내생의 일을 알고자 하는가. 금생에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바로 그것 이니라 그런 말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불자들이 부처님 법을 만나 좋은 점이 우리가 열심히 죽는 순간까지 정진하고 정진하고 또 염불하고 마음을 집중하는 일이라든지, 경전을 읽는 일이라든지 이런 걸 함으로 해서 정신이 맑아지고 머리가 총명해지고 총명한 머리로써 열반에 들면 그것이 지속이 되거든요.


다음 생에 총명한 머리 아주 지혜롭고 뚝 터지고 그런 영혼을 가지고 태어나니까 뭐 태어나자마자 그야말로 일문천화하는 거죠. 한 가지를 들으면 천 가지를 깨닫는 그런 혜택이 있게 됩니다.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러한 가르침을 우리가 이제 만나 거죠.

그러니 불법이라고 하는 것이 보물창고가 아니고 뭡니까

불법 안 만나면 이런걸 압니까.

쓸데없이 노인정에 가서 100짜리 화투나 치면서 세월을 보내고 그긴 늙어가지고서 세월 안 가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져요.


불교를 알면은 시간이 없는 것이 참 안타까운데...

할 일은 많고 그렇게 마음가짐이 되어서 부단히 정진하면서 살다 가는 것 이게 가장 현명하고 바람직한 삶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어차피 인생은 원효스님 말씀하셨듯이 이렇게 무상합니다.

시간 시간이 옮겨서 하루가 지나가고 하루하루가 옮겨서 한달이 지나가고 한달 한달이 옮겨서 한해가 지나가고 한해 한해가 옮겨서 곧 바로 그냥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죠.

그러다보면 결국은 고장 난 차는 갈 수가 없고 늙은 사람은 수행 하지 못 한다.

나이 들어 해태만 부리고 누워서는 게으름만 피우고 앉아서는 어지러운 알음알이만 일으키나니


幾生不修(기생불수)코 虛過日夜(허과일야)하며

몇 생을 수행하지 안이하고 헛되이 하루를 보내어서면


幾活空身(기활공신)이관대 一生不修(일생불수)오 

얼마나 많은 생을 헛된 몸으로 살았는가? 그런데 이 한 생도 닦지 않는다. 이말이야

그동안 수행을 하지 않고 살아온 수많은 생들이 있지 않느냐

이렇게 불법 만났을 때 그때는 불법을 못 만나서니까 또 그렇다손 치고

지금 우리가 다행히 불법을 만나서니까 열심히 정진해서 수행하자


身必有終(신필유종)하리니 後身(후신)을 何乎(하오)아

우리 육신이라고 하는 것 우리 몸뚱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마칠 때가 있어

어느 장사 어느 누구치고 안 죽는 사람이 없잖아요.

석가 달마 다 그렇게 갔고 공자, 맹자도 다 그렇게 갔고 황제 임재도 다 그렇게 갔는데

안 죽는 사람이 누가 있나요


身必有終하리니 後身을 何乎아

다음 몸을 어떻게 기약하겠느냐 이거야 

다음 몸을 우리가 무슨 동물로 태어날지 사람으로 태어날지 나쁜 사람으로 악한사람으로

사람으로 태어나도 아주 천박하고 무식하고 머리 돌대가리고 이런 식으로 태어날지 알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걸 우리가 지금 이생에 불법 만났을 때 그래도 열심히 정진하고 노력하므로 해서 다음 생이 보장이 된다는 거죠.


莫速急乎(막속급호)며 莫速急乎(막속급호)아 

급하지 아니한가.

너무나도 급하고 급한 일이 안이면 너무나도 급하고 급한 일이 아닌가.

생각해보면 급한 일이죠. 언제 뭐 낮잠 잘 시간이 없습니다. 밤잠 잘 시간이 없죠. 생각해보면

아주 시급한 그런 일입니다

이러한 것을 發心(발심)이라고 하는 거죠. 發心

말하자면은 정말 인생의 소중함을 알고 또 따라서 불법의 소중함을 알고 그 소중한 인생과 그런 불법을 만났으니까 참으로 의미 있고 보람되고 큰 가치를 누리면서 살 수 있기를 그런 바라는 마음을 내는 것 이게 發心(발심)입니다.


도가 되었든 성불이 되었든 뭐 여러 가지 난해한 말로 표현은 할 수가 있습니다.

그까짓 도가 되었든 성불이 되었든 그 뭐 상관없어요.


정말 사람 몸 만나기 어렵고 불법만나기 어려운데 그것을 우리가 만나서니까

정말 의미 있고 보람되게 그래서 다음생도 떳떳하고 당당하게 맞이할 수 있는 그런 길을 모색하는 것

이게 發心修行(발심수행)이죠. 마음을 내어서 수행하는 일이다


원효스님은 이런 글을 통해서 발심하기를 바라고 발심해서 수행하기를 바라는 글에서

천하의 명문 참 아름다운 글을 우리에게 남겨서 우리는 큰 혜택을 보고 있습니다.


이걸 좀 열심히 읽어가지고 외우려고 하시지 말고 그저 열심히 읽는 거죠.

입에 아주 익숙하게 집안 식구들 이름 부르듯이 그렇게 익숙하게 읽어서 마음에 이렇게 간직하면 바로 원효가 내가 되고 내가 원효가 되고 원효스님과 내가 둘이 아닌 그런 경지가 곧 삶이 되지 않을까

이런 희망해 봅니다.

발심수행장 공부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내일은 이제 이어서 자경문을 공부하겠는데 자경문 강의 교재는 자료실에 벌써 올려놓았습니다.

자료실에 있는 것을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공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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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정리 : 자혜성】


출처 : 염화실
글쓴이 : 자혜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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