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심수행장

[스크랩] 2007년2월20일 초발심자경문 제 10강 발심수행장3

시치 2009. 4. 8. 00:45
 

                      

              초발심 자경문 제 9강 발심수행장 3


雖有才學이나 無戒行者는 如寶所導而不起行

수유재학      무계행자    여보소도이불기행


이요  雖有勤行이나 無智慧者는 欲往東方而向

       수유근행       무지혜자    욕왕동방이향


西行이니라 有智人의 所行은 蒸米作飯이요 無

서행         유지인    소행    증미작반      무


智人의 所行은 蒸沙作飯이니라  共知喫食而慰

지인   소행    증사작반            공지끽식이위


飢腸호대 不知學法而改癡心이로다  行智具備

기장      불지학법이개치심           행지구비


는 如車二輪이요 自利利他는 如鳥兩翼이니라

    여거이륜      자리이타    여조양익


得粥祝願호대 不解其意하면 亦不檀越에 應羞

득죽축원      불해기의       역불단월   응수


耻乎며 得食唱唄호대 不達其趣하면

취호   득식창패     불달기취


亦不賢聖에 應慚愧乎아 人惡尾蟲이

역불현성   응참괴호     인악미충


不辨淨穢하고 聖憎沙門이 不辨淨穢니라

불변정예      성증사문    불변정예



棄世間喧하고 乘空天上은 戒爲善梯니

기세간훤      승공천상    계위선제



是故로 破戒하고  爲他福田은 如折翼鳥-負龜  시고    파계         위타복전     여절익조-부구



翔空이라 自罪를 未脫이면 他罪를 不贖이니라

상공       자죄    미탈      타죄   불속


然이나 豈無戒行코 受他供給이리오

연       기무계행   수타공급



無行空身은 養無利益이요

무행공신    양무이익


無常浮命은 愛惜不保니라

무상부명    애석불보



반갑습니다. 오늘이 양력으로 2월 20일입니다. 어제 그저께가 음력 설날이었죠. 우리 도반님들, 법우님들 모두 설 잘 보내셨을 줄  믿습니다. 부디 새해에도 소중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났으니까 이 가르침을 열심히 공부하시고 정진하셔서 부디 지혜롭고 행복하게 사시기를 두 손 모아 기도드립니다.


아마도 우리 염화실 법우님들은 열심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계시니까. 비록 우리들의 타고난 지혜는 보잘 것 없다손 치더라도 그래도 성인의 가르침을 자꾸 접하고, 또 성인의 지혜를 빌어서 내 지혜로 삼으려고 하는 부단한 노력에 의해서 참으로 존재의 실상을 바로 꿰뚫어보시고 거기서 생기는 지혜로 참으로 현명하게 사시리라는 믿음을 가져봅니다. 부디 더욱 정진하셔서 그렇게 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발심수행장>


雖有才學이나 無戒行者는 如寶所導而不起行

수유재학      무계행자   여보소도이불기행


이요


여기서부터 할 차례입니다. 비록 재주 있는 배움이 있으나, 그러니까 재주와 공부하는 노력이 설사 있다손 치더라도 계행이 없는 사람은, 계행은 우리가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윤리, 도덕 그리고 질서입니다. 물론 출가한 사람들은 단체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에 단체에 필요한 규칙이 있습니다. 또 성인의 안목으로 볼 때 우리가 해서는 안 될 규제사항들이 또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출가인이나 전문 불자들에게는 계행이라고 하는 제재을 하고 있죠. 그런 것까지 다 포함해서 이 사회가 요구하는 윤리, 도덕, 질서다. 이렇게 이해하면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길이 되죠.

 

계행이 없는 사람은 보배가 있는 곳에 인도하더라도 일어나서 행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랬습니다. 멀지 않는 곳에 보배가 상당히 많이 쌓여 있다 해도 그렇게 가르쳐준 데도 불구하고 일어나서 그 보배가 있는 곳으로 가서 그 보배를 가지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재주도 있고, 학문도 있다손 치더라도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윤리와 도덕과 질서와 성인이 규제하신 규칙, 계행들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면 실질적으로 소득이 없다는 거죠.



雖有勤行이나 無智慧者는 欲往東方而向西行이

수유근행     무지혜자   욕왕동방이향서행


니라 

이렇게 對句로서 계행 없는 사람과 지혜 없는 사람. 이 두 가지를 이야기해 놓았습니다. 비록 근행은 있다손 치더라도, 부지런히 실천하는 것은 있다하더라도, 지혜 없는 사람은 곤란하다는 거죠. 불교는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는 말을 잘 하는데 특히 지혜를 제일 강조합니다. 자비도 지혜가 있는 사람은 자비를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비를 행하지 않는 사람은 지혜가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비록 부지런히 노력은 해요. 사회나 수행 단체나 똑같습니다. 장사도 열심히 하고, 농사도 열심히 짓고 해요. 그런데 자기 머리가 거기까지 뿐이고, 생각이 너무 좁고, 그릇이 한계가 있으면 아무리 노력을 해도 별 소득이 없어요. 요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것. 제대로 볼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됩니다. 이게 지혜죠. 노력만 가지고 꼭 되는 일이 아닙니다. 물론 노력이 없으면 더욱 안   되니까 그래서  여기서 더욱 지혜를 강조합니다.

부지런히 행하는 실천은 있으나 지혜가 없는 사람은 동방으로 가고자하나 서쪽으로 향하는 것과 같다. 동쪽으로 가야할 사람은 동쪽으로 향해야지 동쪽으로 서서는 서쪽으로 가는 거죠. 반대로 가는 거지. 지혜 없이 노력만 하는 사람은 그런 수가 생겨요. 그건 노력 안하는 것만 못하죠. 그런 경우는. 안하면 차라리 제자리걸음이나 하죠. 반대로 나아가니까 더욱 목표하고 거리가 벌어지죠. 실천을 하지 않으면 목표하고 오히려 벌어지지는 않지만 잘못 실천을 하면 우리가 목표한 바와 거리가 멀어진다는 겁니다. 동방으로 가고자 하면서 서쪽으로 가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 다음 말씀이



 有智人의 所行은 蒸米作飯이요 無智人의 所

 유지인   소행   증미작반     무지인   소


 行은 蒸沙作飯이니라

 행   증사작반


지혜의 말씀이 나오니까 여기서 더 곁들여서 지혜 있는 사람의 행하는 바는 쌀을 쪄서 밥을 만드는 것과 같고, 지혜 없는 사람의 소행은 모래를 쪄서 밥을 만드는 것과 같나니라. 모래를 백년 쪄봐야 밥이 될 까닭이 없죠. 노력만 드는 것이고, 나무만 다 때고 마는 것이죠. 그러니까 얻으려는 성과와는 오히려 거리가 멀어지는 거죠. 지혜를 이렇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참 명심보감이죠. 유교에서 가르치는 초기의 <명심보감>이 얼마나 좋은 책입니까? 온갖 성인의 말씀이 다 있죠. 공부하는 일, 자기의 분을 지키는 일, 존경하면서 살아야 하는 일 등 온갖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善을 권장하는 일 등. 이 <發心章>을 읽어보면 이보다 더 좋은 명심보감이 또 있겠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지혜 있는 사람이 행하는 것은 쌀을 쪄서 밥을 짓는 것과 같고, 지혜 없는 사람의 행하는 것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것과 같느니라. 아예 밥이 될 까닭이 없죠. 아무리 쪄봐야 모래는 밥이 되지 않습니다. 쌀을 가지고 밥을 지어야 밥이 되는 거죠.


共知喫食而慰飢腸호대 不知學法而改癡心이로

공지끽식이위기장     불지학법이개치심



이것 역시 지혜를 강조하는 이야기입니다. 앞에서 계행을 강조했습니다만 계행은 한 구절로서 이야기를 했다면 지혜의 문제는 이렇게 길게 설명을 하고 계십니다. 그만치 경전에서도 그랬듯이 원효 스님도 역시 깨달으신 분이니까 무엇이 더 우선하고 무엇이 더 중요한가? 이런 것을 여기서 볼 수 있어요. 지혜가 있는 사람은 계행을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지혜 없는 사람들이 질서를 안지키고, 윤리를 안지킵니다. 안지켜봐야 결국 자기만 손해니까 어리석은 사람이고, 지혜가 없는 사람이라 볼 수가 있죠. 

共知喫食而慰飢腸(공지기식이위기장)호대 

모든 사람들이 다 안다. 무엇을? 밥을 먹어서 주린 창자를 위로할 줄은 알아. 배고프면 밥 먹을 줄은 다 안다. 어떤 바보도 배고픈데 밥 먹을 줄 모르는 사람은 없죠. 그런데


不知學法而改癡心(부지학법이개치심)이로다. 

법을 배워서, 이치를 배워서, 존재의 실상을 배워서, 성인의 가르침을 배워서  어리석은 마음 고칠 줄은 알지 모르는구나. 기가 막히죠. 정말 명심보감 그대로입니다. 정말 불법의 명심보감, 원효스님 같은 대성인의 명심보감이니까.

우리가 밥을 먹어서 배고픈 것을 위로할 줄은 알면서 그보다도 더 우선하는 일이 사실은 이치를 배워서, 뭐든지 그렇습니다. 농사도 마찬가지요, 장사도 마찬가지요, 사업도 마찬가지요,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요, 모든 것은 이치가 있게 마련입니다.   법이란 게 뭡니까? 자연스런 이치죠. 물 水에다 갈 去  죠. 물이 흘러가듯이 자연스러운 것.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치. 이게 법이고 이치라고 그래요. 그래서 순리대로 살아야 된다. 순리대로 살려고 해도 이치를 알아야 순리대로 살죠. 우리의 욕심과 어리석음과 좁은 소견 때문에 이치를 모르기가 태반이죠. 대개 모릅니다. 그럼 어떡해서 아느냐? 자꾸 교육을 받고 특히 성인의 교육, 이치를 꿰뚫어보신 성인의 가르침을 우리가 배워야 됩니다. 법을 배우는 겁니다. 법을 배운다는 게 꼭 불법을  배운다는 의미보다는, 佛法이 왜 소중한가? 하면 그야말로 존재의 실상을 깨달으신 분이니까, 이치를 바로 깨달으신 분이니까 성인의 법, 불법이 소중하다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의 법을 배워서 어리석음을 고칠 줄 알지 못한다. 이걸 먼저 해야 해요. 우리가 법을 배워서, 이치를 배워서 어리석은 마음을 고쳐야지요. 眞理라고 하지 않습니까? 참 이치. 참다운 이치. 참다운 이치는 물이 흘러가듯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어색한 게 아니예요. 벌써 모양이 안나오고 부자연스러우면 벌써 이치가 아닌 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뭣이든지 그렇죠.


 行智具備는 如車二輪이요

 행지구비   여거이륜


그래서 우리가 실천하는 수행과 이치를 제대로 아는 지혜가 구비한 것은 如車二輪(여거이륜)이요, 마치 수레의 두 바퀴와 같고. 수레는 대개 바퀴가 두 개죠. 좌우로 있어야 제대로 굴러가죠.


自利利他는 如鳥兩翼이니라

자리이타   여조양익


그렇게 모든 것을 갖춰서 무얼 하자고 하는 것이냐? 내 자신에게도 이롭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롭게 해주는 그런 노력, 그런 마음. 그것은 如鳥兩翼(여조양익)이니라. 새의 두 날개와 같다. 새가 한 쪽 날개만 있어서는 날 수가 없습니다. 자기만 이익하게 하겠다는 것은 또 세상에 보탬이 안되는 거죠. 그리고 자기에게 이롭지도 않으면서 남만 이롭게 하겠다는 사람도 있어요. 참 무지막지하고 어리석죠. 그것도 제대로 남을 이롭게 할 수 있는 게 못되죠. 그러니까 남을 이롭게 하면 저절로 자기에게도 이로운 일이어야 되고, 나에게 제대로 이로운 것은  역시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에게도 이로운 일이 되어야 됩니다. 이게 조화를 이루게 되어 있어요. 정상적인 自利, 정상적인 利他는 다 自利利他를 갖추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쳤다 하면 이미 그것은 제대로 된 自利가 아니고, 제대로 된 利他가 안된다는 거죠.  제대로 된 自利, 제대로 된 利他는, 제대로 된 自利는 利他를 겸하게 되어있고, 제대로 된 利他는 自利를 겸하게 되어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죠. 그래서  새의 두 날개와 같다. 날개가 양쪽으로 뻗어있어야 잘 날 수가 있죠. 한 쪽 날개가 부러져 봐요. 어디 가서 처박히고 더 이상 날지를 못합니다. 참 세속에 있는 유교의 <명심보감>도 이렇게 빛나는 말씀을 만나기가 어렵죠. 물론 거기도 좋은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만. 저는 <발심장>을 읽으면서 “참, 성인이 남기신 명심보감이구나! 깨달으신 분이 가르치신 명심보감이구나!” 라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유교에 있는 명심보감도 좋은 말씀이긴 합니다만 대개 도덕적인 말씀이 많이 있죠. 그 다음에


得粥祝願호대 不解其意하면 亦不檀越에 應羞

득죽축원     불해기의     역불단월   응수


耻乎며

취호



이런 데는 출가 사문을 위한 내용들이 다분하죠. 죽을 얻어서 축원하대, 아침에는 본래 사찰에서는 죽을 먹도록 되어 있습니다.  옛날에는 가난한 시절이니까 의례히 죽을 먹었어요. 우리 어릴 때도 죽 먹었습니다. 범어사에서도 그 어릴 때 죽 먹고, 해인사에서도 죽 먹고. 해인사에서 한창 20대 초반에 차돌도 삭히는 그런 시절인데 멀건 죽 한 그릇 먹으니 견딜 수 있습니까? 먹으면서부터 벌써 허기지기 시작하는 게 죽이더라구요. 우리 젊을 때는 그래서 죽 먹지 말자고 데모를 하고. 寺中에서야 쌀이 많으면 죽을 쑬 까닭이 없습니다. 그런데 가난하다보니까 죽을 먹는데 철없는 학인들은 죽 먹지 말자고 데모를 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아침 공양을 안들어 가기도 하고. 안들어 가봐야 지만 손해인데 어리석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나간 옛날이야기이고 추억이기도 하고 재미있는 과거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죽을 먹었다 하는 것. 여기 옛날 신라 시대야 더 말할 나위가 없죠. 식사할 때 축원하지 않습니까? 죽을 얻어서 축원하되 여법하게 공양하면, 그걸 제식이라고 하죠. 不解其義(불해기의)하면, 그 뜻을 알지 못하면 亦不檀越(역불단월)에, 단월들에게도 응당히 수취하지 아니한가?, 부끄럽지 않은가? 이 말이죠. 수행자가 어떤 생업도 없이 밥이나 죽을 먹는 것은 순전히 신도님들, 단월들의 시주에 의한 것이지. 자신이 농사지어서 한 것도 아니고, 단월들이 시주한 그 의미를 알아야 한다는 거죠. 그 의미도 모르고 먹기만 한다면 준 사람에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냐? 시주들이 수행 잘 해서 빨리 도통해서 가르쳐달라고, 단월들에게 좋은 법문해서 마음을 열어달라고 하는 뜻에서 스님들에게, 또는 수행자들에게 시주하는 것이지 뭐 좋아서 시주하겠습니까?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시주를 해서 수행하는 사람은 그것을 얻어먹고 열심히 정진해서 마음이 밝아져서 그것을 단월들에게 되돌려주는 거죠. 이러한 관계를 잘 알고 得粥祝願(득죽축원), 죽을 얻어서 축원을 해야지 그런 의미도 모르고 축원을 한다면 부끄러운 일이다.


得食唱唄호대 不達其趣하면

득식창패     불달기취


이것 역시 對句를 맞추느라고 이렇게 했습니다. 밥을 얻어서 唱唄(창패)호대, 낮에는 밥을 해먹지 않습니까? 낮에는 죽을 안먹죠. 아침에는 죽 먹고, 낮에는 밥 먹고, 저녁은 午後不食(오후불식)하고.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밥을 얻어서, 唱唄(창패)라는 것은 범패를 읊조리는 건데 역시 <불생가비라 성도마갈다 설법바라나 입멸구시라 佛生迦毘羅 成道摩竭多 說法波羅奈 入滅俱屎羅 >. 부처님의 일대기를 죽 게송으로 해서 외우죠. 그래서 부처님이 살아오신 삶을 되새기고 그것을 내 삶의 교훈으로 다시 이해하는 그런 것들이 거기에 식념, 공양할 때 우리가 외우는 한 내용이죠. 요즘은 번역해서 “이 밥이 어디서 왔는가? 내가 이 밥을 받기에 부끄럽지 않는가?” 이런 내용으로 번역이 되어 있는 것도 일반화되어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亦不賢聖에 應慚愧乎아 人惡尾蟲이

 역불현성   응참괴호     인악미충


不辨淨穢하고 聖憎沙門이 不辨淨穢니라

불변정예     성증사문   불변정예


밥을 얻어서 唱唄(창패)호대, 염불을 하되 그 其趣(기취)를, 그 뜻을 통달하지 못할 것 같으면 또한 賢聖, 어진 이와 성인들에게 응당히 羞耻(참괴)한 것이 아닌가? 부끄럽지 않은가? 앞에는 신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여기는 성인들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尾蟲(미충), 구더기입니다. 구더기는 변소에 많이 끓죠. 그런데 변소에 끓는 구더기가 변소에만 있는 게 아니라 기어 나옵니다. 기어 나와서 마루에도 올라오고 어디든지 마구 올라옵니다. 사람 방에도 들어오고, 음식 차리는 부엌에도 들어가고 그래요. 그럼 사람들이 그걸 얼마나 싫어합니까? 미워합니까? 그런데 그 구더기는 깨끗하다, 더럽다, 내가 더러운 몸이니까 깨끗한 데는 가지 말아야지. 이런 것 분별하지 않습니다. 구더기가 그런 걸 분별하지 못한다고 사람들은 싫어하죠. 아주 얼굴을 찡그리고 구더기가 지나간 그 자리도 깎아 내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싫어합니다. 그렇게 하는데


聖憎沙門(성증사문)이 不辨淨穢(불변정예)니라. 성인들은 출가 사문이  되어가지고 깨끗하고 더러운 것을 가리지 못하는 것을 싫어한다, 미워한다, 경계한다. 그런 뜻입니다. 한 마디로 뼈아픈 교훈이고, 깊이 마음에 새길 일이죠. 보통 사람들은 구더기가 깨끗하고 더러운 곳을 가리지 못하고 아무데나 기어 다니는 것을 싫어하듯이, 성인들은 출가 사문, 수행 사문이라고 간판을 달고 다니면서 무엇이 청정한 행이고, 무엇이 더러운 행인지 가리지 못하고 함부로 행동하는 것을 싫어한다. 기가 찬 일이죠.


棄世間喧하고 乘空天上은 戒爲善梯니

기세간훤     승공천상   계위선제


세간의 시끄러운 것을 버리고. 출가라는 것은 그렇죠. 세상에는 가족을 형성하고, 집안을 형성해서 서로서로 각축하는 앞서겠다는, 명예로나 재산으로나 어떤 면에서든지 장사가 되었든지 사업이든지 서로 다투고 각축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시끄럽습니까? 선거철이 돌아오면 서로 흠집 내어 끌어내리려 하고, 자기는 한 발 앞서려하고,  일체가 시끄러운 것뿐입니다. 온갖 시시비비들이, 좋고 나쁜 것, 옳고 그른 것 그런 것들 때문에 시끄럽습니다.  출가라는 것은 바로 세상의 그런 시끄러운 것을 버리고 정말 孤高(고고)하게, 脫俗(탈속)하게,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소박하고 간결하게 살자는 것이죠.  그렇게 사는 삶이 여기서 乘空天上(승공천상)이라고 했습니다. 空天上(공천상)에 오른다, 저 하늘에 오른다, 그랬어요. 하늘에 오르면 말쑥한 가을 하늘, 얼마나 청정합니까? 청정한 삶을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주 탈속하고, 자연스럽고, 고고하고, 깊이 있고 탈속한 그런 삶을 살려는 데는 


戒爲善梯(계위선제)니 戒行(계행)이 좋은 사다리가 된다. 하늘에 올라가는 방법이 필요한데 사다리로서 그 방법을 삼는다고 할 때 말하자면 초탈한 삶, 아주 세속과 다른 청정한 삶을 살려고 한다면 바로 계행이라고 하는 것, 사찰에서 또는 수행단체가 지켜야할 모든 계율, 윤리, 규칙 이런 것들을 지키고 간직함으로 해서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 다 무너트리고 제 맘대로 살면서 그런 청정한 삶, 고고한 삶이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죠.


是故로 破戒하고  爲他福田은 如折翼鳥-負龜  시고   파계      위타복전    여절익조-부구


翔空이라

상공


是故(시고)로 破戒(파계)하고, 그렇기 때문에 계를 깨트리고

爲他福田(위타복전)은 다른 사람의 복전이 되려고 하는 것은

如折翼鳥-負龜翔空(여절익조-부구상공)이라, 마치 뭐와 같은고 하니 마치 절익조가, 날개 부러진 새가 거북을 등에 업고 하늘을 나는 것과 같다. 그렇습니다. 날개가 부러진 새는 자신도 날지 못합니다. 파계한 수행자를 이렇게 비유했어요. 날개 부러진 새라고 비유했어요. 그러면서 무슨 다른 사람의 복전이 되고, 신도들의 복이 되고,  세속인들을 선도한다든지 가르친다고 한다든지 하는 선도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당치 않은 이야기다. 그런 내용을 여기서 담고 있습니다.


福田(복전)이라고 하는 것, 우리 수행자가 가사를 福田衣(복전의)라고 해요. 복 밭이 되는 옷이다. 이런 말이죠. 어려서 수행한지 얼마 안되는 사람은 밭 한 뙈기의 마니 가사를 입고, 수행이 조금 몇 년 되면  5조 가사, 밭이 다섯 뙈기가 되는 5조 가사를 입고, 그 다음에 칠7조 가사, 9조 가사, 11조 가사, 13조 가사 해서 25조 가사까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행이 깊어지고 연륜이 쌓이면 가사의 조 수가 그만치 늘어나죠. 복을 지을 수 있는 밭의 평수가 많이 늘어나서 그만치 많은 사람들이 복을 지을 수 있다 하는 뜻에서 가사를 복전이라 하고 논이나 밭을 형상화해서 가사를 짓지 않습니까? 그런 뜻에서 수행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복의 밭이 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파계를 하고 수행을 한다면 복의 밭이 될 수가 없다. 그건 마치 날개 부러진 새가 거북을 등에 업고 하늘을 날려고 하는 것과 같다. 자기도 못날면서 그 무거운 거북을 등에 업고 어떻게 날겠습니까?


自罪를 未脫이면 他罪를 不贖이니라

자죄   미탈     타죄   불속


자기의 죄를 벗지 못할 것 같으면 다른 사람의 죄를 참회해주지 못한다. 속 받치지 못한다. 딴사람이 “스님, 참회합니다.” 그러면 내가 계행을 잘 지키고 내가 청정해야 내 앞에 와서 속죄를 하는 사람의 죄가 어느 정도 참회가 되지 내 자신이 그렇지 못한데 딴사람이 와서 아무리 참회한들 제대로 되겠습니까? 응타 지옥이죠. 같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죠. 그러니까 수행한다고 출가해서 사문이 된 사람으로서 반드시 계행을 철저히 지키고 수행자의 정신을 굳게 다지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죄가 없어야 다른 사람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然 이니


然이나 豈無戒行코 受他供給이리오

연     기무계행   수타공급


豈無戒行(기무계행)하고, 어찌 계행이 없고서

受他供給(수타공급)이리오, 어찌 다른 사람의 공급을 받으리오. 딴사람이 돈 갖다 주고, 공양 올리고, 옷 갖다 주고, 약 갖다주고, 四事供養(사사공양)이라고 그러죠. 즉 옷, 의복, 약, 탕약. 이 네 가지를 신도들이 하게 되어있는데 사사공양이라고 해요. 네 가지로서 받드는 행위. 그러니 받을 수가 없다는 거죠. 자기 계행이 시원치 않으면 다른 사람의 공급을 받아봐야 서로가 도움이 안되는 거죠. 받는 사람은 오히려 빚만 늘어나고, 주는 사람도 크게 복이 될 까닭이 없는 거죠.  이걸 잘 알고 보시를 해야 되는데 이걸 또 제대로 알 수는 없죠. 그러나 주는 사람은 깨끗하게 줌으로 해서 주는 사람의 의무는 다한 거예요. 사실은. 가능하면 그게 잘 쓰이면 더욱 좋지만 그렇지 아니하고 자기 소신껏 ‘이것은 잘 쓰여질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주면 그걸로 보시하는 사람의 의무는 끝나는 것이 아닌가. 그게 어떻게 쓰이는가? 그것까지 어떻게 파헤칠 수도 없는 거고, 알려고 하는 것도 옳지 않은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거기에 문제가 많은 거죠.


無行空身은 養無利益이요

무행공신   양무이익


실천이 없는 헛된 몸은 키우고 키워 봐야 이익이 없고


無常浮命은 愛惜不保니라

무상부명   애석불보


無常한 뜬 목숨은 愛惜不保(애석불보)니라. 사랑해서 아껴봤자 영원히 보존치 못하느니라. 이것도 對句로서 참 잘 맞추었습니다.

無行空身은 養無利益이요 無常浮命은 愛惜不保니라. 

행동이 없는 헛된 몸, 수행한다고 하면서 수행에 걸맞는 행위가 없을 때 헛된 몸이라고 했습니다. 空身. 자기 수행이 없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몸뚱이라는 겁니다. 그건 이익도 없다는 거야. 養無利益. 키워봐야, 먹여봐야, 목숨을 살려봤자  서로에게 본인에게도 이익이 안되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익이 안된다는 거야. 세상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되요. 보탬이 되는 사람이 돼야 됩니다. 돈을 많이 벌면 그 돈을 많은 사람에게 베푸는 그런 일을 해야 되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공부를 많이 해서 자기 소신을 확신할 때 그 소신대로 공부한 것을, 모든 것을 희생해가면서 그것을 펴서 그로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이 돼야 돼요. 그래야 본인에게도 유익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유익해. 절을 잘 짓는 사람은 절을 잘 지어서 많은 사람들이 와서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참선도 하고, 거기서 온갖 수행도 쌓으면 그것은 그것대로 한 몫을 한 거예요. 그런 장을 만들어 놓으면 많은 사람들이 와서 참배하고, 배울 것 배우고, 기도도 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것도 베푸는 일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귀한 몸을 받아서, 人生難得(인생난득)이라고 사람 몸 받기가 어렵다 했는데, 받기 어려운 몸을 다행히 받아서 佛法까지 만났으니 더 이상 다행은 없습니다. 佛法을 만났으면 인생의 진정한 의미와 모든 있는 것의 실다운 이치, 존재의 실상을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깨달은 분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가 습득을 하고, 스스로 깨우쳐서 정말 거기에 맞는 삶을 영위할 줄 알아야 하는 거죠. 그게 佛法을 만난 보람입니다. 불법을 만나서 그게 없으면 큰 이익이 있다고 할 수가 없는 거죠. 여기서 그런 뜻입니다.

無行空身은 養無利益이요 無常浮命은 愛惜不保니라.

우리의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한이 있습니다. 좋은 약 쓰고, 건강관리 잘 하고, 그래 봤자 얼마 못가요. 요즘 건강진단 받아서 사전에 대비를 하고 그런 일들이 너무 성하죠. 알아봤자 그 뭐 몇 년 더 살겠어요? 사실. 또 정말 의미 있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 삶이라면 한 달을 더 살아도 세상에 큰 이익이 되고 보탬이 되겠지만 그렇지도 못하다면 꼭 그렇게 의미 있는 일일까?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그러니까 세상에 살 때 의미 있게 사는 것. 이게 참 중요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고, 죽음이라고 하는 게 어차피 오는 건데 어떻게 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지, 그게 그렇게 연연해 할 문제가 아니지 않는가? 아무리 잘 연장해봐야 1~2년 더 사는 것이고, 한두 달 더 사는 것이고, 잘해봐야 1~2년 더 사는 것인데, 그걸 아등바등 할 필요가 있겠는가? 無常不命(무상부명)은 愛惜不保(애석불보)니라. 무상한 생명은 아무리 아끼고 아껴봤자 오래 보전하지 못한다. 길어봤자 1~2년이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가 환히 꿰뚫어 알아 정말 가치 있게 살고, 의미 있고 보람되게 살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발심수행장> 강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오늘 설을 지내시고 그래도 많은 분들이 동참하셨네요. 쉰일곱분이 창에 동참하셨습니다.

 

 

 

 

 


출처 : 염화실
글쓴이 : 불퇴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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