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심수행장

[스크랩] 2007년 2월 13일 초발심자경문 제9강 發心修行章-2(自樂을 能捨하면~)

시치 2009. 4. 8. 00:44

초발심 자경문 제 9강 발심수행장 2


自樂(자락)을 能捨(능사)하면 信敬如聖(신경여성)이요

難行(난행)을 能行(능행)하면 尊重如佛(존중여불)이니라.

慳貪於物(간탐어물)은 是魔眷屬(시마권속)이요

慈悲保施(자비보시)는 是法王子(시법왕자)니라

高嶽峨岩(고악아암)은 智人所居(지인소거)요

碧松深谷(벽송심곡)은 行者所捿(행자소서)니라

飢饌木果(기찬목과)하야 慰基飢腸(위기기장)하고

渴飮流水(갈음류수)하야 息基渴精(식기갈정)이어다

喫甘愛養(끽감애양)하더라도 此身定塊(차신정괴)요

着柔守護(착유수호)라도 命必有終(명필유종)이니라.

助響岩穴(조향암혈)로 爲念佛堂(위념불당)하고

哀鳴鴨鳥(애명압조)로 爲歡心友(위환심우)니라

拜膝(배슬)이 如氷(여빙)이라도 無戀火心(무연화심)하며

餓腸(아장)이 如切(여절)이라도 無求食念(무구식념)이니라

忽至百年(홀지백년)이어늘 云何不學(운하불학)이며

一生(일생)이 幾何(기하)관대 不修放逸(불수방일)고

離心中愛(이심중애)를 是名沙門(시명사문)이요

不戀世俗(불연세속)을 是名出家(시명출가)니라

行者羅網(행자나망)은 狗被象皮(구피상피)요

道人戀懷(도인연회)는 蝟入鼠宮(위입서궁)이니라

雖有才智(수유재지)나 居邑家者(거읍가자)는

諸佛(제불)이 是人(시인)에 生悲憂心(생비우심)하시고

設無道行(설무도행)이라도 住山室者(주산실자)는

衆聖(중성)이 是人(시인)에 生歡喜心(생환희심)하나니라.


반갑습니다

어제부터 원효스님의 발심수행장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원효스님에 대해서는 어제는 간략하게 말씀 드렸습니다마는 정말 평생을 투자를 해서 원효스님의 사상과 업적과 생애에 대한것을 연구를 해도 다못할 그런 아주 활동도  많으셨고, 정말 1700년의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위대한 성자시죠.

원효스님을 연구해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도 줄잡아서 수십명에 이르고 외국에서도 원효스님 연구로 활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원효스님의 다양한 저술을 통해서 제일 관심을 많이 가졌던 것을 세가지 사상으로 이야기할 수가 있는데 一心思想(일심사상), 화쟁사상, 무애사상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일심은 어제 말씀드렸듯이

심생즉종종법생[心生則種種法生]하고 

심멸즉종종법멸[心生則種種法滅]한다.

모든 것이 우리 마음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래서 일심이 무엇보다도 근본이고 모든 것은 일심하나에 귀의해야된다. 그래서 '일심이 나와 세상의 주체다' 하는 그런 "귀일심언"이라하는 그런 표현을 쓰죠.

하나의 일심으로 돌아가는 일, 일심에 대한 원효스님의 깨달음도 깨달음이거니와 거기에 대한 설명과 원효스님의 일심에 대한 생각을 많은 저서에서 볼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일심사상은 대승사상이라고도 볼수가 있고, 일승사상이라고도 할 수가 있고, 열반사상이라고도 할 수가 있는 지극히 포괄적이고 또 이사상이 원효스님께서 좋아하셨던 화엄사상과 맞아 떨어지게 되는 거죠

그래서 원효스님을 화엄경 입장에 있어서는 '해동종'이라 정리를 하죠.

또 원효스님의 독특한 사상중의 하나는 화쟁사상이라고 해서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화엄경사상이나 반야경사상이나 열반경이나 아미타경이나 그 모든 것들을 다 총괄하고 있기 때문에 불교는 자칫 잘못공부하면 한곳으로 치우치기가 쉬워서, 치우치다 보면 자기것만 옳고 다른사람이 연구한 것은 그르다 라고 배타적인 생각을 할 수가 있죠.

통불교라는 말을 쓰는데 사실 우리나라불교는 선불교라고 하지만 사실 내용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통불교 인것입니다.

처음에 한국에 불교가 들어올때도 크게 많은 경전이 들어온것도 아니고 하나씩 하나씩 들어오면서 우리가 이제 불교를 공부하게 되었고 어느정도 자리가 잡힌뒤에는 원효스님과 의상스님께서 화엄경을 크게 전할려고 해서 사실 화엄사상으로서 자리를 잡았지마는 그후에 천태사상이라든지 밀교도 들어오고 법상종사상도 역시 들어오고  선사상도 들어오고 이렇게 해서 한국불교는 통불교적인 색채를 띄고 있습니다.

사실 정확하게 표현하는 말이죠.

선불교라고 해도 선불교만 있는것도 아니고, 대승불교라고 해도 꼭 그런것도 아니고, 소승적인 의미도 많고요, 밀교가 사실 상당히 많이 깔려 있습니다.

화엄사상이니 법화사상이니 법상종사상이니 미타사상이니 미륵사상이니 한이 없죠.

불교공부 조금만 공부한다 하더라도 불교의 다양한 색채를 느꼈을것입니다.

화쟁사상이라고 하는것을 원효스님께서 기치를 내걸고 나온 신문화쟁론을 통해서

모든 이해, 대립 또 투쟁적이다, 옳다 그르다 하는 주장이 많게 되고 이런것들을 전부 융화 시켜서 통일로 가는것, 전부 수행하면서 개체의 특색을 드러내고 개개의 특색을 충분히 인정하면서 그러면서 조화를 이루는것 이것이 불교거든요.

원효스님의 서너가지 사상중에서 크게 화쟁사상이 돋보입니다.

그래서 신문화쟁론을 근거로해서 화쟁사상이 상당이 돋보이는 사상으로 평가하고 있죠.

원효스님이 위대하게 보이는것도 화쟁사상 덕이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그다음에 무애사상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원효스님께서 해골바가지의 물을 마시고 이튿날 아침에 토하면서 깨닫게 되고, 깨닫고 나서는 유학이 필요치 않다는 것을 알고는 다시 신라로 돌아 왔죠.

돌아와서는 걸림이 없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일체무애인一切無碍人 일도출생사一道出生死 라고 하는 유명한 말을 만드시죠.

'일체 걸림없는 사람은 한길로 생사에서부터 벗어난다.'

그렇게 해서 어제도 잠깐 언급했듯이 과부가 되어 있는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게 되어서 설총이라고 하는 아주 위대한 성자를 낳게 되죠.

설총은 그야말로 문묘에 배향하는 몇안되는, 한국에 유교전통이 깊게 뿌리 내렸고 역사가 깁니다.

조선불교 500년은 거의 유교사상이라고도 할 수가 있고, 고려때 불교가 성했다 하지만 역시 유교가 명맥이 이어져 왔고 신라때는 말할것도 없습니다.

유교와 불교가 조화를 이루면서 내려 왔는데, 오랜 역사속에서 문묘에 배향한다 하는것은 유교의 조사로써 모실수 있는 인물을 사당에다가 영정이나 위패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 그런 일입니다.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자격을 가진 몇안되는 그런 분중에 스님의 아들 설총이 첫손가락에 꼽히죠.

그런 위대한 성자를 탄생 시켰습니다.

그러한 분이다 보니까 참으로 승려라고 하는 이런데 구애받고 얽혀 있다고 하면 어떻게 보면 아깝죠.

그러니까 설총같은 훌륭한 인물을 탄생시키지 않았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무애사상에 알맞죠.

승에도 걸림이 없고, 속에도 걸림이 없고, 세간 출세간 출가 재가 그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그런 불교 궁극적인 사상이 무애사상이 아닐까.

모든 것으로부터 걸림이 없는 그러면서도 남을 해치거나 조화를 깨트리는 것이 아닌, 그런 걸림없는 사상이 우리가 부럽기도 하고 우리가 지향해야 할바고 정말 언젠가 우리가 이 사상을 누려야 하는 그런 정신이고 그런 능력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러한 것을 원효스님은 몸으로 실천하셨고, 스스로  누리셨고, 걸림없는 경계를 누리셨고, 그래서 무애의 행동을 하셨고, 그래서 불교에 있는 일체생활에서 걸림이 없고

나아가서는 생사에서도 걸림이 없는 이러한 경지까지 오르는 것을 불교 궁극의 목표다. 이렇게 보시는 것이죠

원효스님께서 많은 저서를 통해서 생애를 통해서 엿볼수 있는 그런 몇가지 사상중에 이 무애사상도 빼놓을수 없는거죠.

일심사상과 화쟁사상과 무애사상 이것 세가지 사상으로써 원효스님을 이해할 수가 있지 않겠나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불교라고 하는것의 궁극의 목표에 견주어서 보면 사상이라고 하는 것이 없어요.

사상이 없는 사상이 불교 사상입니다.

그렇지마는 우리가 편의상 이해할 수가 쉽도록 정리를 하다보면 그렇게 일심사상이니 화쟁사상이니 무애사상이니, 또 법화사상이니 열반사상이니 화엄사상이니 유식사상이니 여러가지로 분리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상의 명칭에 꼭 매일바는 아닙니다. 아니면서 우리가 또 그런 단계까지 불교를 이해하는데는 필요한 표현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을 해봅니다.

어제 발심수행장 얼마안되는 글입니다마는 사실 발심수행장을 통해서 원효스님의 깊고 높은 정신과 사상을 알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건 발심한 사람에게 일러줄수 있는 교훈이 되고 경책같은 그런 가르침이죠.

원효스님을 이해하는데 조그마한 만분의 일의 인연이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공부합니다.

그런데 게시판에 올렸듯이 어제 교재중에 중간에 글이 조금 탈락이 되었어요 그래서 게시판에 수정한것을 올려놨습니다.

참고하시길 바라고요,

그러면 어제 공부한것을 다시 더듬어서 누락된 부분에서 다시 설명을 하겠습니다.

發心修行章(발심수행장)이라,

대저 모든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이 적멸궁을 장엄하는것은 많은 세월속에서 욕심을 버리고 고행한것이고, 중생중생들이 화택문에서 윤회하는 것은 한량없는 세월속에서 탐욕만 부리고 그 탐욕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니라.

막지 않는 천당에 가는 사람이 적은 것은 삼독의 번뇌로써 자기 재물을 삼은 것이고, 유혹하지도 않는 악도에 많이 들어가는것은 사사와 오욕으로써 망령되이 마음의 보배로 삼았기 때문이니라.

사람들이 뉘라서 산야에 돌아가서 도를 닦고저 하지 않으리오마는 나아가지 못하는것은 오욕에 얽힌 바 이니라.

그러나 산에 돌아가서 마음을 닦지는 못하나, 자신의 힘을 따라서 선행하는 것을 버리지 말지어다.


그렇게 하고 그다음에는 많이 빠졌어요.


自樂(자락)을 能捨(능사)하면 信敬如聖(신경여성)이요

자신의 즐거움을 능히 버리면 믿고 공경하기를 성인과 같이한다

그렇죠. 우리가 같은 도반들이 많이 모여서 산다든지, 이웃과 함께 산다든지,

한가족끼리라든지, 어떤 한 단체든지, 한 사회에서라든지 어릴때 모두가 더불어 사는데 자기에게 아주 좋은일, 자기에게는 아주 즐거운일인데도 불구하고 남을 위해서 버린다, 그걸 포기하는 거죠.

믿고 공경하기를 성인과 같이 하라.

우리가 성인을 뵙지는 못했지마는 우리 주변에 남을 위해서 자기 즐거움을 정말 진정으로 버릴줄 아는 그런 사람이라면 그사람이 바로 성인이죠.


難行能行(난행능행)하면 尊重如佛(존중여불)이라

하기 어려운 행을 능히 행할것 같으면 존중하기를 부처와 같이 하라.

부처님 존경하듯이 한다 이겁니다.

사실 그렇죠 우리 주변에 어려운 일하는 사람 많이 있지요.

어려운 일이라고 하는것은 자기 이익을 챙기는 것이 아니고, 자기이익을 챙기고 자기 가진것 챙기는것이야 그게 뭐 어려운 일입니까.

인간의 본능인데요. 자기 이익을 챙기고, 자기 가족을 위하고, 자기하고 가까운사람 이런사람을 위하는것은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에 그런일은 어려운일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것보다는 보다 더 마음을 넓게 써서 자기를 욕하는 사람을 정말 받아주고 이해하고 결코 차별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고 평등심으로써 사람을 대해 주는것,

이것이 난행이죠.

정말로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이 정말 있다면 부처님처럼 존경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리사욕 차리지 않고 공공을 위해서 그것도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돌아가도록 하는것 이것이 정말 종교인이 해야 할 일이고 좀 의미있고 보람되게 사는 사람들의 일이죠.

내가 그전에 정계 최고 지도자가 정해 졌을때, 어떤 자리를 같이 할 경우가 있어가지고 만났는데 당장에 할 야기가 뭐가 있겠습니까.

모든 공장을 올 스톱 시키더라도 위에서부터 정직하게 사는 운동을 펼쳐라.

그러면은 지금 우리가 이루어 놓은 부, 우리가 금까지 이룩해논 어떤 능력과 우리나라의 부유함만가지고도 충분히 잘살수가 있지 않겠느냐.

모두 정직하게 살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허덕이고 어려움이 많고 고난이 많다 이런 이야기를 한적이 있습니다.

참 어려운 주문이고 정말 기가막힌 소리다.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소리인데,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많이 끼칠수 있는 자리 높은 자리라고 합시다. 지도자 적인 그런 자리에 있는 사람으로써 정말 정직하고 사리사욕을 차리지 아니하고 정말 국민을 위해서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그렇게 어떤 행위를 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고, 스님처럼 존경해야하고 부처님처럼 존경해야할 그런 일이죠.


慳貪於物(간탐어물)은 是魔眷屬(시마권속)이요

물질을 아끼고 탐하는 것은 마군의 권속이라.

불자라고 할 수가 없고 또 출가 수행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다

마구니권속 뭐가 마냐, 뭐가 마구니고 뭐가 정법이냐.

어떤 세속적인 가치관에 떨어져 있는 사람, 벼슬이나 명예나 부귀나 재물이나 자기 명성이나 이런것들에 집착해가지고 그것만 그저 챙길라고 급급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마구니다.

참 원효스님다운 말씀입니다. 그게 마구니다 그런 말이죠.

무슨 삿댄 생각에, 뭐가 삿댄 생각이겠습니까?

물질현상에 치우쳐있고 물질 현상에 마음을 뺏겨 있고, 그것만이 인간의 모든 가치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들이 삿된 생각이고, 그게 마구니의 권속이다. 하는것입니다.


慈悲保施(자비보시)는 是法王子(시법왕자)이라,

자비하는 마음으로 베푸는 것은 보시하는 사람은 이것이 법왕의 아들이니라.

법왕은 부처님이죠. 부처님의 제자다. 이래요.

진정 부처님의 제자고 제자 아닌것이 무엇으로써 표현이 되느냐, 자비하는 마음으로 보시 할줄 아는것,  보시하더라도 뭐라고  부처님은 뭐 법보시, 법보시하는것이 부처님은 바라는것 바니까, 그래서 법보시를 할줄을 아는것 이것이 가장 가치있는 보시고 고급 보시고, 고급종교 명품종교가 할 그런 보시입니다.

그냥 물질보시 하는것도 좋죠. 참 어려운 일입니다. 물질보시도 쉬운게 아니예요.

근데 부처님하고 일치를 깨우쳐 주고자 하는것은, 더 필요하고 더 값진 보시입니다.

그걸 알아야 되요. 부처님이 언제 물질보시 했습니까. 부처님은 법보시 했어요.

역대 조사와 역대 보살들이 불보살과 역대 조사들이 무슨 돈 보시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기록할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예요. 사실은,

역사속에 그렇게 빛나는 불보살들과 조사스님들은 왜 그렇게 빛나는가.

진리를 깨달으셔서 진리를 가르침을 보시했기 때문에 그렇게 역사에 빛나는 것입니다.

원효스님도 물질을 보시 했습니까? 밥보시하고 떡보시하고 그런적도 없습니다. 원효스님도 결국은 법보시를 하셨죠. 그러니까 오늘날에도 원효스님 원효스님 이라고 하는것이죠.

조사스님들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걸 알아야 되요. 특히 오늘날에와 같이 물질이 풍요로와 가지고 일년에 우리나라에서 먹고 남아 버리는 음식만해도 8조원인가 9조원인가 된다하는 그런 시대에 살지 않습니까?

물질은 가치 있는지는 그렇게 몰라요. 크게 가치 있지도 않고요. 사실은

그러니까 스님들의 생각하고 우리 생각하고 차이가 거기서 나는 거죠.

우리는 그저 돈돈돈 하고 물질 물질 물질하고 물질이 가치있는 걸로 알고 있고 마음이 그쪽으로 기울고 있기는 합니다마는 그러나 성인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잖아요.

원로스님들만 하더라도 그렇지 않잖아요.

저는 누누이 강의를 하지마는 물질은 자기 먹고 살 만치 거의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더라도 이 세상과 모든 존재, 사람이 살아가는 이 이치를 잘 공부를 하고 깨우쳐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일깨워 주는일 이것이 무엇보다도 훌륭한 보시고 큰 보시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처럼 또 원효나 의상스님처럼 역대 불보살과 조사스님들처럼 조금이라도 흉내내 볼려고 하는게 해로울게 있습니까.

시 법왕자이니라

법왕의 아들이니라

법왕의 자식이니라.

법왕은 부처님이죠.

부처님의 자식으로써 보시한다면 더욱더 그렇죠.


高嶽峨岩(고악아암)은 智人所居(지인소거)요

높은 산과 높은 바위들은 지혜인의 소거요, 지혜로운 사람이 살바고,


碧松深谷(벽송심곡)은 行者所捿(행자소서)이라

푸른소나무 깊은 골짜기는 수행하는 사람이 깃들바니라.

고악아암과 벽송심곡은 하나입니다. 사실은.

골짜기가 깊으면 산이 높게 마련이고, 산이 높으면 골짜기가 깊게 마련인것이죠.

지혜로운 사람과 수행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 될것도 아니죠.

이걸 글로 표현하자니까 이렇게 했습니다.

댓구가 착착 잘들어 맞지 않습니까.

보면 자락을 능사하면 신경여성이요.

난행을 능행하면 존중여불이니라.

착 착 네단씩 네단씩

간탐어물하면 시마권속이요

자비보시는 시법왕자니라.

간탐어물 자비보시 그다음에 마구니의 권속과 법왕의 자식이라 하는것.

고악아암과 벽송심곡, 지인소거와 행자소서

글의 모양새, 글의 됨됨이 까지도 잘 음미하면서 잘읽고, 그뜻을 가슴에 새기면 훨씬 감동이 더 합니다.

그래서 고악아암과 벽송심곡이 다른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이 수행하고, 수행하는 사람이 지혜로와 지는거죠.


飢饌木果(기찬목과)하여 慰基飢腸(위기기장)하고

나무과일을 먹어서 그 주린 창자를 위로하고

솔잎도 따먹기도 하고 과일도 따먹기도 하고 많죠

산에 깃들여 살면 밭 일궈서 콩도 심고 감자도 심고 얼마든지 먹고 살수가 있습니다.

정 못 먹고 살면 다른 짐승들처럼 과일을 많이 주워 가지고 모와 놨다가 먹어도 그것도 생명을 유지하는데 크게 지장 있는게 아니거든요.


渴飮流水(갈음류수)하여 息基渴情(식기갈정)하여

목마르면 흐르는 물을 손으로 움켜 마셔 갈증을 식힐지니라.

참 아주 얼마나 이상적이고 늘 이상적이죠.

현실성이 없이 이렇게 들릴줄 모르지마는 이건 신라 원효스님 당시 얼마나 오랜 세월전입니까.

약 1300년전 일인데, 제가 있는 이 범어사가 의상스님의 창건인데, 의상스님이 계신곳은 우리 원효스님이 곁에 있기 마련이죠.

범어사에는 원효암이 있습니다. 원효암에는 의상대 원효대 의상스님이 계셨던 바위, 원효스님이 계셨던 바위 또 봉우리도 원효봉 의상봉 늘 같이 있어요. 그들이 1300년전의 산중 생활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상적인 그런 생활이 아니라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당시로써는 뭐 저 어릴때만 해도 선방에 있을때 이런 말을 듣고는 너무 이런 생활이 그리워서 나도 언젠가 산에 가서 주리면 나무 과일을 먹어서 주린 창자를 위로하고, 목마르면 흐르는 물을 손으로 움켜 마셔서 갈증을 쉬어야겠다.

이래서 나뭇잎이나 솔잎이나 주워 먹고 사는 훈련을 한다고 선방에 있으면서 솔잎을 먹었어요.

솔잎을 먹으니까 솔잎은 충분히 먹겠더라고요. 그래서 솔잎만 먹어서는 훈련의 강도가 너무 약하다 해서 그다음에는 잣잎을 먹었어요.

잣잎은 아주 드셉니다. 잣잎을 먹고 하는 어린 객기에 그런일도 했습니다마는

1300년전 의상스님이나 원효스님께서 그 깊은 산중에 사셨던 삶을 상상해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 아닐까. 결코 이상적인 꿈만은 아니지 않느냐. 이런생각이 듭니다.


喫甘愛養(끽감애양)이라도 此身定壞(차신정괴)요.

달게 먹고 사랑에 기운다 하더라도 이놈의 몸뚱이는 결정코 무너질것이요.

아무리 잘 거두고, 잘 먹어주고, 요즘사람은 건강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합니까. 그래봤자 백년 넘기는 사람이 없을것이며 150년 넘기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어요.

저는 그럽니다. 어떤 사람이 죽을때 어떻게 죽었고, 앉아서 어떻고,  서서 어떻고, 안 죽어야 이야기가 되지 죽을때 서서 죽었든, 앉아서 죽었든, 누워서 죽었든, 어떤 ....스님처럼 거꾸로 서서 죽었든 그게 무슨 큰 차이가 있으며, 무슨 의미가 있느냐, 안 죽었다면 지금까지 천년까지 살면서 안 죽었다면 그건 내가 한번 봐 줄수가 있지마는 그 외에 죽는 모습이 어떻다 저렇다 하는것은 그건 아무 이야기 꺼리가 안된다고 저는 평소에 그런 소리를 합니다.

그래요. 뭐든지 다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2~3백년 사는 사람도 없습니다.

거의 100년 미만에 거의 다죽고 100세를 넘긴 사람이 혹 있지마는 그래도 150을 살았다는 사람이 없습니다.

거꾸로 죽었다고 그렇게 하니까  ...스님 누나가 비구니였었는데 누나가 와서 이자식은 속가에서도 말썽이고, 살아서도 말썽이고, 죽어서도 말썽을 일으킨다 하면서 그 쓸데 없는 일 그만하라고.

꺼꾸로 서있으니까 스님들이 장례를 치를려고 하니 참 고약하죠.

아무리 넘어 뜨려도 넘어 가지도 않고 누나되는 비구니 스님이 와서 넵다 욕을 퍼질러 대니까 송장이 스르르 넘어가더라. 하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지않습니까.

죽는데야 누워서 죽든, 앉아서 죽든, 서서 죽든, 무슨 큰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걸 가지고 신기해 할일이 없습니다.

눈을 좀 높이고, 차원을 좀 달리 생각해야죠.

그런것들을  죽음이란 것을 초연하게 생각할줄아는 그자세, 그게 되어 있느냐, 안되어 있느냐 문제지, 어떻게 죽느냐 이걸 대단한 일인냥 이야기하고, 안죽어야 이야기할일이지 최상승 불교를 공부하는 이들이 그런 안목이 있고 그런 소견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을 깨우쳐 줄 필요가 있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누워 있은들 뭘하고 앉아 있은들 뭐합니까.

지수화풍 잠깐 인연 따라 모였다가 흩어지고 마는 그런 것인데요.

그런 차원에서 해놨잖아요.


着柔守護(착유수호)라도 命必有終(명필유종)이니라

아주 부드러운 옷, 명품옷 크게 한번에 몇백만원짜리 입음으로써 몸매을 보호한다 하더라도 목숨이 반드시 마칠때가 있을것이다.

수행하는 사람, 좀 다른 차원의 인생을 살고자 하는 사람은 최소한도 이렇게는 못살더라도 이런 내용은 알고 있어야 되고, 이정신에 준하는 그런 삶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꼭 이렇게 형용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죠. 철없을때 솔잎 먹는 훈련을 하고, 잣나무 먹는 훈련을 하고, 나무 껍질 먹는 훈련을 하고, 그게 다 철없는 객기로 하는 일이지, 꼭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고, 이러한 정신으로 매사에 임해야 그사람이 수행자고, 그사람이 인생을 공부하고, 의미있고, 가치있게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겠죠. 누가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그까짓껏 소용이 없습니다.

뭐 알아주라고 하는일이 아니니까요.

사람들이 설사 알아주지 않더라도 안 알아준다해서 원망하거나 한탄해 하거나 않는다면 그사람이 군자가 아닌가.

뜻있게 인생을 사는 사람, 그사람이 군자죠.

온갖 뜻을 가지고 인생을 사는 사람,


助響岩穴(조향암혈)로 爲念佛堂(위념불당)하고,

전부 8자씩 8자씩, 넉자 넉자 넉자 넉자 해서 여덟자로 짝을 지어 가지고 있습니다.

메아리 울리는 바위틈에서 염불당을 삼고,

번드러하게 근사하게 지은 절에서 호위호식하면서 그렇게 살라는게 아니죠.

저 깊은 바위속에 소리 지르면 메아리가 울려 퍼지죠.

메아리 울리는 바위속에서 염불하며 살고,


哀鳴鴨鳥(애명압조)로 爲歡心友(위환심우)니라

슬퍼하는 우는 기러기나 새들로써 마음을 기쁘게 해주는 벗을 삼을지니라.

뭐 없어도 좋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경을 읽거나 염불을 하거나 여기서 염불이라고 하는것은 꼭 염불을 하라는 뜻이라기 보다는 자기가 전공이로 하고 있는 공부를 여기서는 염불당이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당시 염불도 많이 했겠죠.

참선이면 참선, 염불이면 염불 간경이면 간경, 그렇죠.

그러니까 그러다가 한번쯤은 밖으로 나온다 이거죠.

그러면은 오리나 기러기나 새들이나 꿩이나 산짐승이 소리를 지르면서 저리로 날아가면 그또한 바라보는 기쁨이고 하나의 운치고 산중의 정취라고 할 수가 있겠죠.


拜膝(배슬)이 如氷(여빙)하더라도 無戀火心(무연화심)하며

절하는 무릎이 얼음처럼 차더라도 불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餓腸(아장)이 如切(여절)이라도 無求食念(무구식념)이니라

정말 못먹어서 창자가 끊어질듯이 한다 이거예요

주린창자가 끊어 질것 같더라도 밥을 구하려는 생각이 없을지니라

참 근사하죠

오늘날의 현실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고 동떨어져 있는 그런감이 들지만, 한편의 그림같고 신선같고, 신선에 대해서 바로보죠.

신선이 아니라 그당시 수행하는 스님들은 아마 이렇게 사는 이들이 적지 않았을것입니다.

그러니까 원효스님이 이런 글을 썼겠죠.

지금부터 100년전 쯤이라고 생각합시다.

100년전만 하더라도 거의 이와 유사한 삶을 살았지 않았겠는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제가 어렸을때만 하더라도 옛날생활 그대로 똑 같았죠.

근래와 와서 기름이 들어오고, 전기가 생기고, 길이 닦여지고, 온갖 무슨 자동차가 생기고 이렇게해서 생활에 여러 가지 편리한것이 도움이 되긴 했습니다마는 1300년전의 사찰의 풍경 그야말로 토굴에서 생활하는 풍경을 엿볼수가 있습니다.


忽至百年(홀지백년)이어늘 云何不學(운하불학)이며

백년이라는것은 금방돌아오는것이죠, 그런데 왜 공부 안하느냐 그런거죠


一生(일생)이 幾何(기하)관대 不修放逸(불수방일)고

일생이 도대체 얼마나 되기에 어찌하여 수행하지않고 그렇게 방일하느냐


離心中愛(이심중애)를 是名沙門(시명사문)이요

마음 가운데 애착 떠나는 것을 이름하여 사문이라하고


不戀世俗(불연세속)을 是名出家(시명출가)니라

세속적인것 그리워하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출가라 하느니라.


行者羅網(행자나망)은 拘被象皮(구피상피)요

수행하는 사람이 그물에 걸리는  것은, 개가 코끼리 가죽을 뒤집어 쓴것과 같고,


道人戀懷(도인연회)는 蝟入鼠宮(위입서궁)이니라.

도 닦는 사람이 이성을 그리워 하는것은 고슴도치가 쥐구명에 들어가는것과 같다


꼭 끼어 오도 가도 못하고 마음이, 누가 붙들고 있나요. 붙들고 있지 않지마는, 자기 마음이 탁 밧줄에 꽁꽁 묶여 버리는 그런 상황이 되어 버린거죠.

위입서궁이라 해서 처참한 모습입니다.

고슴도치가 쥐 잡으러 들어갔다가 들어가지도 못하고 나가지도 못하는 그런 꼴이다.

원효스님 문학적인 소질이 너무 뛰어납니다.


雖有才智(수유재지)나 居邑家者(거읍가자)는

비록 지혜가 있으나 읍가에 거하는 사람은


諸佛(제불)이 是人(시인)에 生悲憂心(생비우심)하시고

모든 부처님이 이사람의 슬퍼하고 근심하는 마음을 내시고


設無道行(설무도행)이라도 住山室者(주산실자)는

설사 도행이 없다 하더라도 산실에 머무는 사람은


衆聖(중성)이 是人(시인)에 生歡喜心(생환희심)하나니라

많은 성인들이 이사람에 대해서 환희심이 일어나느니라.


오늘 발심수행장 원효스님의 세가지 사상을 조금 소개만 해드렸고 그다음에 발심수행장 생환희심하느니라. 여기까지 공부했습니다.


또 저 개인 사정으로 내일 하고 모래는 휴강입니다.

그다음 금, 토, 일 휴강이고 그렇죠

휴강이 깁니다. 그렇게 아시고 착오가 없으시기 바랍니다.


[발심수행장 제2강 녹취자 ; 길상화^^]

출처 : 염화실
글쓴이 : 길상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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