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규 시론

정진규의 시론(37) - 송찬호 시의 부정정신(3)

시치 2008. 8. 18. 01:27
정진규의 시론(37) - 송찬호 시의 부정정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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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앞에서 그의 <부정정신>은 단순히 원시주의, 또는 상징체계 속에 묶여지는 것만이 아니라고 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그의 시에서 이러함의 한 확산 형태를 또는 한 전형을 발견한다.

희망은 도처에 우글거린다 사제가 뚱뚱한 식당주인으로 보이고
그 식당의 밥찌끼를 핥으며
희망이 어떻게 사육되는가를 보았다

개새끼, 하고 대들어도 판사는 절망에게 희망을 선고하고
의사는 절망에게 희망의 진단서를 송부하고
긴 복도를 걸어오는 희망의 발자국 소리
문을 노크하는 희망의 인기척 소리
그 고문 기술자의 가방 속에는 얼마나 많은 희망이 들어 있던가

(중략)

이제 전쟁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군대를 경험한 사람들은 누구나 예비군복을 갖고 있다)
그 많은 산업예비군 중에서 내게 통지서가 날아왔다

나는 오늘 전선으로 떠난다 아직 오지 않는 열차를 기다리며
역 한구석에서 나는 오래 못 볼, 영원히 못 볼지도 모를 사람들에게 편지를 쓴다
...지금 한때 직업과 계급을 혼동해도 좋을 행복한 순간입니다.
- [희망]부분

앞의 시는 이번에 발표하는 아홉 편의 시들 가운데서 가장 강도가 큰 것에 속한다. 그리고 개인적인 차원을 크게 뛰어넘은 집단적 인식에 그 물줄기를 대고 있다. 앞 시의 대상이 되고 있는 <희망>은 그가 판단하고 있는 바대로 <사육되고 있는 희망>이다. 이러한 <희망 구역>으로 그는 현실을 인식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 안에 치열한 부정정신이 도사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사제와 판사, 의사, 그리고 고문기술자들, 그 절대적 권위주의자들이 조작해 내는 희망들이 이 현실 속에 들끓고 있음을 그는 준열하게 고발하고 있다. 그것은 구호화된 언어로서가 아니지만 그래서 더욱 깊게 우리 가슴에 와서 박힌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예의 그 궁극적인 세계인 <구부리다>와 <둥글다>의 생명적인 세계를 그는 포기하지 않고 있다. 그는 <아직 오지 않는 열차>를 기다리고 있으며 <영원히 못 볼지도 모를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그것은 <구부리다>의 영원한 시적 행위이며 <둥글다>의 생명적 원형이다.
이렇게 어느 한 곳, 개인적인 세계에만 머물지 않고 집단적인 세계에도 가서 깊게 닿고 있는 그의 총체적인 시각은 매우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까뮈가 그의 [여름]에서 고백한 바대로 <무엇인가를 제외시키기를 강요하는 것은 어느 것도 참되지 못한 것이다. 따로 분리된 아름다움이란 결국 찡그린 모습을 보이게 마련이며, 고독한 정의는 결국 억압에 이르고 만다. 다른 것은 제외시키고, 봉사하고자 하는 자는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자신에게도 봉사하지 못하고 결국은 이중으로 불의에 봉사하게 된다. 마침내 너무나도 뻣뻣해진 나머지 그 어느 것에도 경이로움을 느끼지 못하고 모두가 다 아는 것이어서 시들하게만 여겨지며 그저 같은 것을 반복하여 다시 시작하느라고 인생을 다 보내게 되는 날이 온다.>는 사실은 시인으로서, 부정정신의 소유자로서, 늘 초월을 꿈꾸는 자로 계속 지녀가야 할 시각임을 나는 희망한다.
다만 이러한 그의 총체적인 시각이 그의 시에서 개인적인 시점과 집단적인 시점으로 지나치게 분리된 형국을 노출하고 있는 것을 우려하면서 나는 송찬호의 시 읽기, 그 <시달림>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한다. 그는 지금도 <한 자궁 속에서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고/파괴와 건설을 반복하는>([인공정원]) 달빛을 밟으며 <말의 감옥>을 짓고 있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