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규 시론

정진규의 시론(33) - 헌사

시치 2008. 8. 18. 01:21
정진규의 시론(33) - 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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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사*
- 우리는 왜 [화사집]을 다시 읽는가

화사집 50년, 미당 시력 50년, 우리는 왜 [화사집](1941)을 다시 읽는가.
50년이라는 세월의 일상적 의미 때문인가. 결코 그것만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가장 혹독한 공간에 극한적으로 위리한 이 절망의 헌사들이 당시의 자신과 밖의 모든 것을 파괴했지만 50년이 지난 지금도 파괴되지 않은 가장 뚜렷한 한 권의 시집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힘의 정체는 무엇인가.
다음과 같은 고백들을 우리는 탐미적 충동과 몰입으로만 요약할 것인가.

원색적이며 한국의 흙냄새가 물씬 풍기는, 강렬한 바이탈리티를 느끼게 해 주는 시를 당시 다른 어디에서도 대해 본 적이 없다. - 김윤성

[화사집]을 들고 맨발로 북극의 차가운 땅을 헤맨, 미치지 못했으니 미친 척이라도 해 보자고 했던 젊은 시절이 있었다. -김요섭

서정주의 공간 해석은 기가 막히다. 그의 시에는 <가락지>라는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가락지>는 언약을 의미하기도 하고, 성적인 상징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공간적으로 해석하면 그것은 끼면 가득차고 벗어 놓으면 텅 비는 공간이다. 그렇게 그는 <비어 있음>과 <가득참>에 대한 감각이 가득한 사람이다. -김화영

1937년 4월부터 7월까지 그가 가서 머물렀다는 제주 남단의 섬 <지귀도>, 그의 시의 원체험적 공간.
피 묻은 전율의 입맞춤과 수성으로 표현되는 유일한 생명력, 헐떡이는 숨결 등은 그의 시가 지니는 단골 하위 품목들이다. - 홍신선

*

우리는 [화사집]을 다시 읽으며 자신을 징계하고 오늘의 우리 시를 징계할 충분한 이유를 발견한다. 우리는 <앞으로, 앞으로>의 진행법에 시달리며 우리 시를 읽고 쓰는 매우 소박한 초월주의자였거나 진보주의자들이었음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오늘 우리들의 삶과 시는 총체적이며 생명적인 성숙보다는 직선적이며 가시적인 성취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시는 성숙인가, 성취인가.
성숙은 생명적 원형과의 만남을 위해, 성취는 현실적 소유의 욕구를 위해 닫힌 빗장을 열심히 열고 있는 손들이다.

*

시가 일상적 의미의 탈출구를 모색한다는 것은, 한 편의 작품 속에서 뻔뻔스럽게도 그것을 쉽사리 구체화할 수 있다는 것은 거짓이다. 그것은 그 자신의 자유의 자양인 파멸에 대한 배신이며, 그 파멸이 뜻하는 바의 지시적 개념에만 갇혀 있는 무능과 무지의 노출이다. 이런 왜소주의자들이 이 땅엔 창궐하고 있다.

*

익명의 비명들이 가득 찬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그래서 우리의 상처는 더욱 깊어가기만 하는데도 시간이 그 상처를 치유해 줄 것이라는 착각과 포장된 동의 속에서 우리의 삶은 몽매하게 지속되고 있다.
오만해진 시편들, 호민관처럼 뻐기는 시들이 시대의 상처를 말하면서도 오히려 우리를 가두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들은 다른 목적을 위해 비켜가고 있기 때문이다.
시는 암살자가 아니라 적극적인 피살자이다. 새로운 선택이 거기에 있다. 시는 황홀한 절망이다.

* 이 글의 표제인 [헌사]는 서정주의 [화사집]에 대한 헌사이기도 하지만, [화사집]을 간행한 <남만서고>의 주인 오장환 시인의 제 2 시집 이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