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규 시론

정진규의 시론(32) - 시의 본질과 동시의 세계

시치 2008. 8. 18. 01:19
정진규의 시론(32) - 시의 본질과 동시의 세계
By
비교적 잘 엮어진 두 권의 엔솔러지를 놓고 나름대로 동시적 화법과 인식으로 되어 있다고 보이는 부분들을 임의로 추출, 그대로 옮겨보았다. 물론 이 두 권의 엔솔러지는 <동시>가 아닌 그냥 <시>들을 담고 있는 것들이다.
우선 우리 현대시의 초기부터 현재까지의 시들 가운데서 폭넓게 선별한 것으로 되어 있는 엔솔로지에서 옮긴 부분들을 보자. 이는 전혀 연대에 관계 없이 추출한 것들이다.

(1)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조롱말 발굽 밑에 붐비다> 박용래, [저녁눈]에서 (2) <사람 사이를 재는 일/너무 힘들어,//컴퍼스를 두 개씩이나 가진/일급 측량사가 쩔쩔매고 있다> 이재룡, [게]에서 (3) <흙에서 자란 내 마음/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정지용, [향수]에서 (4) <달아날려고 했다.//푸른 도마뱀 떼같이/재재발렀다.//꼬리가 이루/잡히지 않았다.> 정지용, [바다 9]에서 (5) <얼골 하나야/손바닥 둘로/폭 가리지만,//보고 싶은 마음/호수만하니/눈 감을 밖에.> 정지용, [호수1]에서 (6) <산뽕잎에 빗방울이 친다/멧비둘기가 난다/나무등걸에서 자벌기가 고개를 들었다 멧비둘기 켠을 본다> 백석, [비]에서 (7) <가혜하고 낮잠자는 시간이/제일 행복하다/정록이 목욕시키며/궁둥이 때려주는/오후가/내 마흔 살의 찬란한/아이 된다> 김은자, [토요일 오후]에서 (8) <지난 해 봄서부터 탱자 나무 한 그루/우리 집 울타릿가에 대장간을 채리고/여름내내 제 목숨에다가 가시를 만들고 있다./여름내내 제 살 속에다가 가시를 박고 있다.> 조정권, [탱자가시]에서

다음의 것들은 가장 최근의 시인들, 이른바 90년대 시인들의 시만으로 엮어진 엔솔로지의 것들이다.

(9) <처음 콜라를 마신 사람은 얼마나 무서웠을까/그 검은 물이 뱃속으로 들어갈 때/혀 끝을 지나 목구멍 너머로,/참지 못할 때까지 흘러 들어 가다가/찢어질 듯 독한 그 한 모금으로/이내 다 잦아질 동안/그는 얼마나 자지러졌을까> 배문성, [처음 콜라를 마신 사람]에서 (10) <귀신이 있다 있다 별의별 귀신이/다 있다지만 나는 이제 서울신탁은행 귀신/내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개설한/온라인 계좌 만 원도 오고 삼만 원도 오고/오만 원도 오는 원고료를 갖고 도장 갖고/찾아가는 곳 버스를 타고 가다가도 서울 신탁은행 지점을 보면 우리 은행야/나는 중얼거리네 우리/은행야 아내에게도 말한다 내가> 김영승, [서울신탁은행 귀신]에서 (11) <되는 일이 없었다 이브날 여자에게 선물 사들고 메리 메리 뛰어가다/무단횡단으로 짭새에게 걸리질 않았나.....성탄절답게 여관이/만원이질 않나 그렇다고 테레비에서 새로운 영화를 하나> 유하, [불의 폭포]에서

위의 것들이 어째서 동시적 화법을 가지고 있으며, 그런 인식을 가진 것이냐에 대해 의아해 할 사람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특히 (9)부터 (11)까지의 90년대 젊은 시인들의 것을 두고는 더욱 그럴 것이다. 물론 나는 <동시>의 개념에 대한 체계 있는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하다. 다만 <따뜻한 초월적 상상력>으로 표출된 세계를 나는 <동시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또는 <서정적>이란 말과 <동시적>이란 말을 거의 동의어로 수용하고 있다. 위의 부분들을 이러한 시각에서 하나하나 분석할 겨를은 없지만 이러한 면에서 <동시>의 세계는 시의 본질과 가장 가깝게 맞닿아 있으며 그 자체이기도 하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동시>는 그 아이가 독자들이라는 또다른 역할적 기능이 있겠으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교육의 기능이 아닌 서정적 깨우침으로서의 시적 본질로 역할되어져야 마땅하다는 생각이다. 거꾸로 시는 거기서 질 좋은 서정성을 얻어 낼 수가 있을 것이다. 다만 (9)부터 (11)까지의 부분에서 보이듯 오늘의 <동시적>인 세계, 그 서정성은 재래의 농경문화적 상상력과 감수성으로부터 크게 변전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