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규 시론

정진규의 시론(35) - 송찬호 시의 부정정신(1)

시치 2008. 8. 18. 01:24
정진규의 시론(35) - 송찬호 시의 부정정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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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 한 달 동안을 내내 송찬호의 시들에 시달려 왔다. 내가 그의 시를 처음 대하기는 평론가 이남호의 귀띔에 의해서였는데 [달빛은 무엇이든 구부려 만든다] 외 2편의 시들을 대하는 순간부터 그 <시달림>에 대한 예감이 나를 깊게 흔들었고 그것은 과연 적중했다. 많은 시간이 그에게 바쳐졌고, 마침내 충청도 보은 땅에 하나의 <말의 감옥>을 짓고 들앉아 있는 그를 찾아내기에 이르렀으며, 그를 10여 편의 작품과 함께 서울로 불러올리기까지 했다.
나는 한 잡지 편집자의 사무적인 태도 이상을 그에게 보이지 않았으나, 아마도 그 냉엄함이 조작된 것이라는 걸 그는 눈치챘을 것이다. 이미 그에 대한 <시달림>이 꽤 깊게 진전된 상태에서 내가 그를 만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사실 나는 그 때 그에 대한 그런 <시달림>을 떨쳐 버리려는 또 하나의 <시달림>에까지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내 사적인 자유를 위해서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런 사적인 자유에 머물 수 없게 하는 것이 송찬호의 시였다. 궁극적으로 그의 시는 그런 만남의 예인력을 지니고 있었다. 송찬호의 시가 내게 던진 이 <시달림>의 정체는 무엇이며, 왜 나는 그렇게 시달려야 했던 것일까. 이를 밝히는 것이 곧 송찬호의 시에 접근하는 가장 빠른 길이 될 것이다.

1.
내가 거듭 쓰고 있는 이 <시달림>이란 말은 그 본래의 뜻과 뉘앙스대로 부정적인 상태의 것이지만, 송찬호의 시에 대한 나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음을 우선 밝힐 필요가 있겠다. 그것은 한 고통의 양식으로 온 것이 틀림없으나 내면적인 하나의 섬광으로 나를 어지럽게 한 상태의 것이기 때문이다.
내면적인 하나의 섬광, 그러나 그 빛의 정체가 좀체 쉽게 잡혀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읽어 보면 아시겠지만 그의 표현들은 강도가 큰 것, 폭발적인 것, 유연성의 것, 조용한 움직임의 것, 잠재성의 것, 곡선적인 것, 나선의 것 등으로 어떻게 보면 매우 무질서하게 뒤엉켜 있었으며, 어느 한쪽을 명료하게 선택하고 있는 것으로는 보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시적 질서가 그의 시 전체를 통어하고 있었다. 그것의 발견과 확인이 나의 과제였다.
나는 그의 시를 거듭 읽는 동안에 그의 모든 조사적 기능이 어느 한 공간에 바쳐지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 곳을 그는 <말의 감옥>이라 부르고 있었으며, 그 곳을 <숨쉬기 부드런운 곳>, <둥근 곳>, <중심에 이르는 모든 길이 지워진 곳> 이라고 정의하고 있었다.

나무를 포로로 잡고서
나무가 구조적인 척추동물임을 알았다
나무의 중심을 지워 없앤다
오, 놀라워라 나무가 둥글어진다

말 속에 이런 둥글고 넓은 감옥이 숨겨 있었다니
말의 감옥은 얼마나 숨쉬기 부드러운가

말을 감옥 밖에 놓아 두고
안으로 들어오면
외부의 말은 세계를 둥글게 감싸 감춰 버린다
중심에 이르는 모든 길을 지워 없애고
감옥은 더 큰 감옥에 폭넓게 갇혀 버린다

말에 포착된 것은 무엇이든 말은 감옥을 만든다
말은 상호간 대화를 한다
말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지만
말을 할 때 만큼은 자유로울 수 있다
말을 하여
우선 감옥을 만들라
말로부터의 자유는
중심을 무너뜨리고
그 중심으로부터 해체되어 나오는 길 뿐이다
-[공중적원 3] 전문

어떻게 <감옥>이 <자유>의 공간이 되는가. 그 <감옥>은 일상적인 의미의 감옥이 아님은 물론이다. 오히려 그것은 송찬호의 시에 잇어 초월적인 한 공간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는 <나무>라는 말에 이르는 모든 길- 일상적인 모든 것, 지시적인 모든 것, 가시적인 모든 것의 세계를 오히려 1차적인 의미의 감옥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러한 것들을 모두 지워 없애고 그가 당도한 그의 <감옥>이 1차적인 의미의 감옥을 가두는 더 큰 힘의 감옥이 되고 있는 셈이다. (<감옥은 더 큰 감옥에 폭넓게 갇혀 버린다>) 그것을 그는 자유라 이름한다. 이러한 그의 인식은 물론 기호화된 <말> 자체가 이미 오염된 것이며, 그 이전의 상태가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는 일종의 원시주의, 또는 상징주의적 체계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원초적인 정기가 조금도 부패되거나 손상되지 않은 최초의 장소, 또는 그런 시간에 그는 크게 기대고 있으니까 말이다.
일상의 세계에 대한 이러한 그의 인식이 절대적인 가치의 것이냐 아니야의 문제는 또다른 시각에 의해 논의될 수 있겠으나, 대상을 고정불변의 것으로 보지 않고 이와 같이 가변적인 것, 또는 개혁적인 것으로 투시하는 부정정신이 상징주의적 범주로만 묶여질 성질의 것은 아니라고 본다. 실제 이러한 부분은 앞으로 살펴보게 될 송찬호의 또다른 시에 또다른 각도로 구체화되고 있다. 이는 시의 본질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