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곧바로 알아들었다. 여기서 <알아들었다>는 말은, 그 이상의 말은 사족이 되리만치 이른바 요해了解, 또는 요득了得, 요오了悟 Verstehen가 가능했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과장된 드러냄일 터이고 좀더 직접적으로 말한다면 발화자와 청자로서의 나 사이에 일종의 동병상린으로서의 비애가 있고 아픔이 있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런만큼 밀착된 <몸이 있는> 이해가 있었다 할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최근 나는 두 권의 산문시집, 정확하게는 김춘수의 [서서 잠자는 숲](민음사, 1993. 4. 20.)과 최승호의 [달맞이꽃에 대한 명상](세계사, 1993. 3. 15)(최승호는 이 책에 <명상집>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고 어느 지면을 보니 장르의 울타리를 넘어선 <공터에서의 글쓰기>라고 밝히고 있었지만 나는 뛰어난 산문시집으로 읽었다.)을 읽었고 아직도 그 감응의 <물살>들을 가방 속에 넣어 들고 다니고 있음이 그것이다.
동병상린으로서의 비애와 아픔. 그것은 이제 또 환희와 절망이라는 이율배반적인 상태로 적잖이 진행되고 있다. 고백하자면 환희란 동류항을 만났을 때의 기쁜이고, 절망이란 그러나 훨씬 앞서 간 세계에 대한 자신의 열패감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아무튼 <산문시>라는 이름의 형식과 <몸시>라는 이름의 인식 속에 내 삶과 시대, <안>과 <밖>을 엮어 내고자 깐에는 땀흘려 맴돌아 왔던 그간의 내 시간들이 거기 고스란히 집약되어 있었고, 나는 다시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산문시라는 형식을 낳게 한 인식의 세계를 간접적으로 집약하고 있다고 보이는 이들 시집의 한 대목들을 아래에 옮기고 그 끝 자리에 적잖이 질퍽댄 내 고백의 한 대목을 첨가한다.
<서서 잠자는>은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의 아이러니가 된다. 그러나 나무와 같은 자연의 입장에서는 그 상태는 아주 정상적일 수밖에는 없다. 자연이니 생명이니 하지만 인간의 입장에서는 그것들은 로맨틱한 환상일 따름이다. 인간은 <서서 잠자는> 상태를 가눌 수가 없듯이, 인간에게는 그 자신의 차원이 따로 있다. 인간은 일면 자연이기도 하고 생명이기도 하면서 다른 일면 문화와 역사를 만든다. 즉 대자적 존재다. 인간된 비애다. -김춘수, [서서 잠자는 숲] 후기 부분
나는 간빙기의 인간이라고 한다. 거대한 얼음의 시간과 얼음의 시간 사이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 나는 오래 살아도 빙하기처럼 장수하지는 않을 것이다. 설령 물의 것이었던 내 피가 그 때까지 남아 있다 해도, 얼음산맥의 깊은 계곡에 투명한 얼음알로 박혀 있거나, 눈 쌓인 산봉우리의 몇 점 눈송이로 바람에 흔들리고 있으리라. -최승호, [수박] 부분
아, 그러나 언제나 나는 질퍽거리는 <유루정有漏定>(禪定에 이르지 못하는 세계)에 또다시 되돌아가고 있었다. 습기는 <몸>의 한 운명이었다. 내 몸은 질퍽거리는 데서 빚어지고 태어났기에 질퍽거림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젖은 몸을 말리는 육탈의 길과 마른 몸을 적시는 육화의 길>이 서로 엇갈리고 잇었다. 뼈로 돌아가면 살이 그리고 살로 돌아가면 뼈가 그리운 그 반복의 거리에 나는 시라는 슬픈 융단을 깔고 있었다. 그게 나의 경전이었다. -정진규, [몸 시론 I - 경전 만들기와 불태우기] 부분, [현대시학], 1992. 10.
<간빙기의 인간>. <서서 잠자는>. <질퍽거리는 유루정> 이 아득한 <유한>에 대하여 짐작이 갈 것이다. 산문시는 비애의 장르인가. <아득하면 될 것인가>.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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