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규 시론

정진규의 시론(15) - 말씹터진 암말들

시치 2007. 10. 22. 23:33
정진규의 시론(15) - 말씹터진 암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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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활과 활통을 메고 나가/무르팍이 시리도록 달려보기/아주 좋은 날이구나./암소 울음소리 내는 냇물가 숲 속으로/햇빛을 쏘아 꽃봉오리를 터뜨리기/아주 좋은 하루구나./태양의 화살촉 저토록 무궁무진하고/눈부심 온천지 가득하니/저 들판 잠자는 짐승 모두 뛰게 하리라/모든 샘이 흙 위로 흘러 넘치게 하리라. 봄바람에 근질근질한 것들/말씹 터진 암말들 뒤엉킨 들판 높이/오, 태양이여. 네 남성의 날개짓이여./산봉우리에서 큰 대자로 누워 코 고는 이성을 깨워/저 아래 들판으로 합류시키는 네 기쁨 얼마나 큰가./발뒤꿈치에 맥박이 돌아 창공으로 솟구치는/잡히지 않는 숭고한 새가/네 품 안에서 한없이 날아다니는 기쁨 얼마나 큰가.
-조정권, [신성한 숲 4] 부분

위의 시에는 춤의 보법步法이 있다. 한낱 소리로서만의 흐름이 아닌 <몸>이 보이고 그 <결>이 만져진다. 그 <결>들은 흐름을 평면 위에 두지 않고 하나의 입체로 가시화한다. 위의 시에는 그런 힘의 흐름이 있다. 남성적인 생명의 보법으로 세상이라는 무대를 가득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어둠과 좌절과 비리와 천박함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할 수밖에 없는, 사랑과 평화라는 이름의 것들이 모두 깊게 암장된 거대한 무덤이랄 수밖에 없는 오늘의 도시를 거두절미 직절의 기법으로 압도하는 광합성의 씩씩한 동화작용이 거기에 있다. 일순에 부신 빛으로 열어제치는 강력한 행위의 이미지가 거기에 있다.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을 무슨 기승전결의 보수적인 도식으로 지루하게 끌고 갈 필요는 없다. 거기에서 시작해서 끝내버리는 집중적인 묘사가 오히려 탄력과 긴장을 줄 수도 있고, 설득력있게 우리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을 수도 있다.
또 이 시의 진행에는 드라마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생명이 솟구치는 봄날의 들판과 산봉우리와 하늘이라는 무대가 있고, 태양이라는 이름의 빛의 화살떼를 잠든 것들에 쏘아 날리는 서사적 주인공이 있다. 그 화자의 충일하는 에너지가 있다. 그 에너지의 절정에서 태어나는 관능적 생명이 있다. <말씹 터진 암말>이라는 표현은 상스럽다기보다는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언어(말)와 마(말)가 어우러진 음성상징의 역동적 성감대마저 절묘하게 빚어 내고 있다.
답답한 날들이 몇날 며칠씩 이어질 때가 있다. 저 페루의 시인 세사르 바예호가,

뭐가 내 속에 들어왔길래, 나는 시구로 스스로를 매질하고 시대에 총총히 쫓기고 있다고 생각하는가?//뭐가 내 속에 ㄷㄹ어왔길래, 나는 어깨에 망토 대신 계란을 올려놓고 있는가?


라고 현상의 근원에 대한 반복적인 질문을 계속해 갔던 것처럼 아슬아슬한 의식의 벼랑을 오르내려야만 하는 날들이 있다. 모든 시인들은 그렇다. 그럴 때는 차라리 황폐가 아름다워 보일 때가 있다. 그러한 날, 위의 시를 한 번 소리 높여 읽어 보는 것도 썩 괜찮은 일이 되리라. 한결 개운해지리라.
너무 건강하고 희망적인 빛의 이미지만으로는 내면의 세계를 표출해 내기 어렵고, 또한 입체감을 살려 내기가 어렵다고 할지 모르나 이 대목의 집중된 표현은 이미 내면의 세계를 함께 담아 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안이 꽉 차 있다.
지금 우리는 너무 어둠의 타성에 젖어 있지 않는가.
진실의 표리 가운데 그 어느 한 쪽에만 머물러 과장된 포즈를 잡고 있지 않는가.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