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규 시론

정진규의 시론(17) - 낱말로 쓰기와 어절로 쓰기

시치 2007. 10. 28. 01:02
정진규의 시론(17) - 낱말로 쓰기와 어절로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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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달빛/자하문//달안개/물소리//대웅전/큰 보살//바람소리/솔소리//범영루/뜬 그림자//흐는히/젖는데//흰 달빛/자하문//바람소리/물소리

목월의 잘 알려진 [불국사]다. <흐는히/젖는데>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행과 연이 명사, 체언으로 끝나고 있다. 서술어미를 완전히 생략한 극단적인 절제의 시적 운용이 놀랍다. 낱말로만 쓰고 있으면서도 사물의 풍경을 아득하게 열어 주는 부드러운 장력의 그 번짐이 거기에 있다. 이 시는 서로의 경계를 열고 하나가 되어 다시 또 새로운 경계를 열어 나가는 고요한 역동성을 체감케 한다. 그야말로 <흐는히 젖는> 사물들의 <안으로의 모임>이 있다. 빈틈이 없이 빽빽하지만 갑갑하지 않은 사물들의 부피와 그 살결이 만져진다. 물리적 실체들 사이에 관계를 세우고 다시 추상적인 내면의 흐름과도 관계를 세우는, 안과 밖을 이어 주는 아름다운 <운>이 꼬리가 하나의 <통주저음>으로 이어지고 있다.
통주저음-.
바로크 음악에서 오르간, 탬버린 등으로 연주되기 시작한 저음성부의 부피 있는 그것, 그런 아득한 내면의 이미지를 지닌 소리. 들리지는 않으나 들리고 있는, 좀 과장해서 말하면 발견되는 소리, <관음>의 찰나적 꼬리들이 거기 흐르고 있다.
결국 이 시는 연결어미나 종결어미, 혹은 조사 따위의 다리놓기, 보이는 <이음새>와 같은 도구들을 적극적으로 버림으로써 오히려 그것들이 희구하는 세계를 적극적으로 획득해 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 시들은 이런 <낱말로 쓰기>로부터 엄청나게 떨어진 곳에 팽개쳐져 있다. 질퍽거리고 있다. 연결어미나 종결어미, 조사의 생략은 고사하고 그것들을 무슨 강력한 쇠붙이의 자물통 같은 것으로 주먹 쥐어 보이지 않을 수 없는 위악적인 포즈에 시달리고 있다. 그런만큼 오늘의 우리 삶이 외압으로 시달리고 있기 때문일 터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무서운 속도로 저들이 우리들이 비워 둔 자리를 강타하거나 강점해 버린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최소 단위로 줄인다 해도 <어절로 쓰기>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 오늘의 우리 시는 놓여져 왔다. 나는 체언 아래 입을 앙다물고 붙어 있는 어미와 조사의 시들-주인은 없고 객들만이 법석대는 집, 빈사의 시, 그것이 오늘의 우리 시가 지닌 비극이며 드라마라는 생각을 해 왔다. 글쎄, 요즘 우리 시에 선풍이 끼어들고 있는 것도 그런 갑갑함에 대한 성급한 초월의 양식이 아닐지.
아무튼 또 한 번 비애에 갇힐 수밖에 없는 것은 저토록 오늘의 우리 시가 노출된 연결어미를 고집하고 접속어를 고집하면 할수록 스스로가 스스로로부터 단절되고, 밖으로부터도 쇠외되는 모순을 겪게 된다는 사실이다. 보라, 한 정직한 시인의 저 상처를 우리는 함께 쓰다듬을 필요가 있다.

바깥은 거닌다, 바깥;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 버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가 없다
글쎄, 슬픔처럼 쌍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황지우,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부분

잔뜩 겁먹은 나도 아직 저 질퍽거리는 몸을 마음 속에 되돌려주지 못하고 있다. <뚱뚱한 가죽부대>에 머물고 있다. 사과를 손은 따지 못하고 그것을 매달고 있는 <꼭지>만을 잔뜩 움켜쥐고 있다. 마을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마을 찰 시냇가 징검다리만을 숨어서 밟고 있다. 새 옷 한 벌도 없이.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