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시刪詩>라는 말이 있다. 좋은 시를 골라 제자리에 앉혀 한 권의 책으로 엮는 일을 뜻하는 말이리라. 아마도 이 말은 그러한 일을 최초로 해 냈던 것으로 보이는 저 공부자孔夫子의 『시경』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공부자께서 당시 전래되던 시 3,000여 편 가운데서 시 삼백을 간추려 이룩한 것이 바로 『시경』이었으니까 말이다. 『시경』. <경經>으로 불리게 된 것은 전국시대 말엽부터라고 하지만, 이 만세불역萬世不易의 상도常道를 뜻하는 경전을 두고도 오랜 역사를 통해 논란이 거듭되어 왔던 것을 기록을 통해 접해 볼 수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논어』의 <子曰 詩三百 一言以蔽之曰 思無邪>(위정편爲政篇)와 <放鄭聲 達佞人 鄭聲淫 佞人殆>(위령공편衛靈公篇)에서 야기되었다고 보이는 오직 <사무사>, 사특함이 없는 순수 그 자체일 따름이냐, 아니면 <음시淫詩> 또한 거기 상당수 혼효되어 있다는 주장 등 단순하지가 않다. 공부자의 『시경』이 저러하거늘 다른 것은 말해 무엇하랴. 시를 고르고 제자리에 앉히는 일이란 실로 어렵고도 어려운 일임을 실감할 때가 적지 않다. 더군다나 요즈음 우리 주변엔 시가 넘치고 있다. 실제로는 자본주의, 그 욕망의 구조 속에서 날로 시가 지워져 가고 있는 게 사실인데도 그렇다. 아무래도 이변이랄 수밖에 없다. 하긴 그렇게 발표되고 있는 시들을 보면 그 시의 됨됨이에 관계 없이 모두 자본주의가 이 세계에 가져다 준 인간성 상실과 문명의 오염에 대한 저항과 극복의 포즈를 취하고 있기는 하다. 아마 그들도 이 시대의 순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가 바로 시라고 믿고 있기 때문일 터이다. 그렇다면 이 소박한 신뢰를 탓할 게 없다. 나쁠 것도 없다. 이렇게 두고 볼 때 <나쁜 시>는 있을 수가 없지만 <좋은 시>는 따로이 있게 마련이라는 생각이다. 무엇이 <좋은 시>인가. 한 마디 말로 줄일 수야 없지만 <시가 되어 있는 시>가 좋은 시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시가 되어 있지 않은 시가 요즈음 너무 넘치고 있다. 그걸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시들이 너무 많다. 아마추어의 그것과 프로의 그것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혼효의 극단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산시>가 어렵고, 더욱 엄격한 <산시>가 요구되고 있다. 제도상의 모순과 결함이 있겠지만 해마다 새해 아침의 빗장을 신선하게 뽑아 주는 이른바 <신춘문예>의 시들도 그전 같지 않고 정말 시들하다는 이야기들이고, 하루에 평균 한 권 정도로 우송되어 오는 시집들 가운데서도 <이것이다!>하고 집어들 것이 거의 없다. <산시>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탓이다. 하기야 갈 데까지 가 있는 이 어지러운 혼효 속에서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최근의 자료만으로 두고 보더라도 문예 종합지 17종, 전문지 22종, 동인지 122종에 1년 동안 발표된 시가 시와 시조 합해서 13,000여 편에 이르고 있다(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91년도 심의자료). 어떻게 이것들을 다 읽고 거기서 <좋은 시>를 가려 낼 수 있겠는가. 물론 가려 읽는 사람들의 꾸준한 시 읽기에 따라 제대로 된 <산시>의 결과를 얻어 볼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시인들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이다. 시를 쓸 때부터 <산시>의식을 함께 가져야 한다. 그것이 어떤 형편에 놓여져도 알 바 아니라는 투로 쓰인 시가 좋을 까닭이 없다. 좋은 시들을 보면 이 <산시>의 의식이 투철하다. 흔히 자신은 초탈한 경지에 이른 양 전혀 독자를 의식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경우를 접할 때가 있지만 그것은 단순 영합의 경우다. 누구에게 이 시가 어떻게 읽힐 것인가를 엄정하게 추구하는 일은 시를 쓰는 일 그 자체일 수도 있다. <산시>란 시인 자신이 이미 이룬 것을 독자가 다시 만나는 것일 따름이다.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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