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313

2021,신춘문예 시 당선작 모음

2021,신춘문예 시 당선작 모음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블루 / 변영현 파란 동그라미를 그려요 당신은 호수인 줄 알고 뛰어들어요 팔랑팔랑 헤엄쳐요 바다처럼 넓고 깊어요 파란 동그라미 속의 당신이 파랗게 물들고 나를 찾아봐, 하는 목소리에 물이 뚝뚝 떨어져요 안 보여요 안 보인다니까요 여기 있어, 하는 목소리에 숨이 헉헉 차오르네요 파란 동그라미 위에 파란색을 더해요 내게는 다른 색이 없거든요 조금 다른 파란색이면 당신을 찾을지도 몰라요 몰랐어요 더 깊어질 뿐이라는 걸 바닥을 찾지 못할 거예요 하늘을 찾지 못할 거예요 파란 지구별에서 나갈 수 없듯 당신은 거기서 허우적거리겠죠 파란 동그라미 파란 동그라미 블루칩 같기도 하고 버튼 같기도 해요 속는 셈 치고 한번 눌러 볼까요? 잭팟이 터질까요, 당신이..

신춘문예 2021.01.24

2021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책등의 내재율/엄세원

책등의 내재율/엄세원 (본명. 엄인옥) 까치발로 서서 책 빼내다가 몇 권이 기우뚱 쏟아졌다 중력도 소통이라고 엎어진 책등이 시선을 붙들고 있다 반쯤 열린 창문으로 햇살이 배슥이 꽂혀와 반짝인다 정적을 가늠하며 되비추는 만화경 같은 긴 여운, 나는 잠시 일긋일긋 흔들린다 벽장에 가득 꽂힌 책제목 어딘가에 나의 감정도 배정되었을까 곁눈질하다 빠져들었던 문장을 생각한다 감각이거나 쾌락이거나 그날 기분에 따라 수십 번 읽어도 알 수 없는 나라는 책 한 권, 이 오후에 봉인된 것인지 추스르는 페이지마다 깊숙이 서려 있다 벽 이면을 온통 차지한 책등 그들만의 숨소리를 듣는다 어둠을 즐기는 안쪽 서늘한 밀착, 이즈음은 표지가 서로의 경계에서 샐기죽 기울 때 몸 안의 단어들이 압사되는 상상, 책갈피 속 한 송이 압화 ..

신춘문예 2021.01.07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블루 / 변영현

블루 / 변영현 파란 동그라미를 그려요 당신은 호수인 줄 알고 뛰어들어요 팔랑팔랑 헤엄쳐요 바다처럼 넓고 깊어요 파란 동그라미 속의 당신이 파랗게 물들고 나를 찾아봐, 하는 목소리에 물이 뚝뚝 떨어져요 안 보여요 안 보인다니까요 여기 있어, 하는 목소리에 숨이 헉헉 차오르네요 파란 동그라미 위에 파란색을 더해요 내게는 다른 색이 없거든요 조금 다른 파란색이면 당신을 찾을지도 몰라요 몰랐어요 더 깊어질 뿐이라는 걸 바닥을 찾지 못할 거예요 하늘을 찾지 못할 거예요 파란 지구별에서 나갈 수 없듯 당신은 거기서 허우적거리겠죠 파란 동그라미 파란 동그라미 블루칩 같기도 하고 버튼 같기도 해요 속는 셈 치고 한번 눌러 볼까요? 잭팟이 터질까요, 당신이 튀어 오를까요? 하나, 둘, 셋! 아, 물감이 덜 말랐네요 파..

신춘문예 2021.01.06

2021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냄비의 귀/장이소

냄비의 귀/장이소 뜨거운 냄비의 귀를 잡다가 내 귀를 잡았다 순간이 순간에 닿는다 귀 하나 떨어진 양은냄비를 안고 골목을 지난다 삼삼오오, 얼룩이를 가리킨다 얼룩이는 번쩍번쩍 얼룩덜룩하다 고흐는 왼쪽 귀를 자르고 왼쪽으로 들었을까, 어떻게 오른쪽을 들었을까 당신은 떨어진 귀를 버리지 못한 사람 뚜껑을 마저 잃고 배가 된 사람 이마는 당신이 키우던 물고기 떨어진 귀는 물고기의 어디쯤일까 귀를 기울인다 귀는 기울기 물고기가 지느러미를 자른다 어디나 그런 귀 하나쯤 있다 절반이 절반에 매달려 가운데를 안고 돌면 떨어진 한쪽을 위해 두 배속 태엽을 감는다 꼬리에 풀리는 물무늬 아가미로 쏟아지는 물살 삼킨 것들이 중심을 세운다 멱을 잡고 중심을 도는 것은 붙잡지 못한 것들이 많다는 것 밖이 안을 떠받는다 쓸모를 ..

신춘문예 2021.01.06

2021,강원일보신춘문예 시 당선작-설원/김겸

설 원 (雪 原)/김 겸 끝없이 펼쳐진 눈밭이다 바람이 마른 모래처럼 일어난 눈가루를 휘몰아간다 저 막막한 눈밭에 단지斷指한 손가락으로 정방형의 칸을 내어 너를 쓰고 싶다 그 설원의 원고지에 무제無題라고 할 너의 순일한 마음에 대해 쓸까 영어囹圄에 갇힌 너의 죄 없는 욕망에 대해 쓸까 새하얀 너를 앞에 두고 토해냈던 내 먹물 같은 설움에 대해 쓸까 저 막막한 눈밭에 단지한 손가락으로 정방형의 칸을 내어 너를 쓰고 싶다 그 설원의 원고지에 깨어나지 못한 너의 침묵에 대해 쓸까 이 쇠잔한 생에 표착한 너의 불운에 대해 쓸까 외로워, 외로워 말하는 가오나시顔無し 같이 끼니마다 밥을 보채는 너의 허기진 영혼에 대해 쓸까 정해진 과오를 범하고 정해진 책망을 듣는 너의 차갑 게 굳어진 습習에 대해 쓸까 저 막막한 ..

신춘문예 2021.01.06

2021,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핑고 / 황정현

핑고 / 황정현 시인 극지의 순록은 우아한 뿔을 가졌다 거친 발굽으로 수만 년을 걸어왔다 죽은 자식을 동토에 던지며 발길을 돌려야 했고 비틀걸음으로 얼음산을 넘어야 했고 살점을 떼어 어린 자식의 배를 불려야 했고 뿔을 세워 침입자에 맞서야 했고 온몸을 쏟아 무리를 지켰다 죽어서도 흙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치열한 싸움에서 늘 이기고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당신은 무덤을 등에 지고 돌아왔다 무덤은 살고 당신은 죽었다 무덤 속에서 얼음이 자라고 있다 얼음은 흙을 밀어 올려 산이 될 것이다 얼음의 계절이 오면 순록은 바늘잎나무숲으로 순례를 한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당신의 길이 보인다. "이 자리에 제가 앉아도 괜찮은가요?"/미안해요 여기/당신이 앉았던 자리인가요//접혀 있는 페이지는/당신이 읽던 페이지였고//아무..

신춘문예 2021.01.04

2021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야간산행/여한솔

야간산행/여한솔 공룡처럼 죽고 싶어 왜 뼈가 남고 자세가 남고 내가 연구되고 싶어 몸 안의 물이 마르고 풀도 세포도 가뭄인 형태로 내가 잠을 자거나 울고 있던 모습을 누군가 오래 바라볼 연구실 사람도 유령도 먼 미래도 아니고 실패한 유전처럼 석유의 원료가 된대 흩어진 눈빛만 가졌대 구멍 난 얼굴뼈에서 슬픔의 가설을 세워 준 사람 가장 유력한 슬픔은 불 꺼진 연구실에서 흘러나왔지 엎드린 마음이란 혼자를 깊이 묻는 일 오래 봐줄 것이 필요해 외계인이거나 우리거나 눈을 맞추지 뼈의 일들 원과 직선의 미로 속으로 연구원이 잠에 빠진다 이게 우리의 이야기 강이 비추는 어둠 속에서 신발 끈을 묶고 발밑을 살펴 걷는 동안의 심사평 신선한 목소리와 상상력 돋보여 총 2천332편의 응모작 중 예심을 거친 10명의 작품이..

신춘문예 2021.01.04

2021,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 이 거울이 마음에 든다/남수우 한 사람에게 가장 먼 곳은 자신의 뒷모습이었네 그는 그 먼 곳을 안으러 간다고 했다 절뚝이며 그가 사라진 거울 속에서 내가 방을 돌보는 동안 거실의 소란이 문틈을 흔든다 본드로 붙여둔 유리잔 손잡이처럼 들킬까 봐 자꾸만 귀가 자랐다 문밖이 가둔 이불 속에서 나는 한쪽 다리로 풍경을 옮기는 사람을 본다 이곳이 아니길 이곳이 아닌 나머지이길 중얼거릴수록 그가 흐릿해졌다 이마를 기억한 손이 거울 끝까지 굴러가 있었다 거실의 빛이 문틈을 가를 때 그는 이 방을 겨눌 것이다 번쩍이는 총구를 지구 끝까지 늘리며 제 뒤통수를 겨냥한다 해도 누구의 탓은 아니지 거울에 남은 손자국을 따라 짚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내게 뒷모습을 안겨주던 날 모서리가 처음 삼킨 ..

신춘문예 2021.01.04

2021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시-저녁의 집 / 유수진

저녁의 집/유수진 아침이라면 모를까 저녁들에겐 다 집이 있다 주황빛 어둠이 모여드는 창문들 수줍음이 많거나 아직 야생인 어둠들은 별이나 달에게로 간다 불빛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건 다 저녁의 집들이다 한 켤레의 염치가 짝짝이로 돌아왔다 수저 소리도 변기 물 내리는 소리도 돌아왔다 국철이 덜컹거리며 지나가고 설거지를 끝낸 손가락들이 소파 한 끝에 앉아 어린 송아지의 배꼽, 그 언저리를 생각한다 먼지처럼 버석거리는 빛의 내부 어둠과 빛이 한 켤레로 분주하다 저녁의 집에는 온갖 귀가들이 있고 그 끝을 잡고 다시 풀어내는 신발들이 있다 적어도 창문은 하루에 두 번 깜박이니까 예비별의 자격이 있다 깜박이는 것들에겐 누군가 켜고 끄는 스위치가 있다 매번 돌아오는 관계가 실행하는 수상한 반경엔 집으로 돌아오는 ..

신춘문예 2021.01.03

2021 전남매일 신춘문예 시 당선작 -개미들의 천국/ 현이령

개미들의 천국/현이령 아버지가 아침 일찍 공원 숲으로 간다. 노란 조끼를 입고서, 숲이 아닌 것들은 모두 줍는다. 나무와 나무 사이 아버지와 아버지 사이 쓰레기를 줍다가 잘못 건드린 개미집에서 후드득 쏟아져 나오는 아버지. 아버지는 아버지를 물고 개미는 개미를 물고 이끼처럼 들러붙어 저녁을 먹는 우리 집. 아버지의 집에는 아버지도 모르는 집들이 많아. 나는 개미처럼 더듬이가 자라고 발로 툭 치면 무너져 내리는 불안들. 바닥을 잘 더듬는 내력이 우리의 유전자에 있지만 나는 한낮에도 까만 개미가 무섭다. 땅바닥을 쳐다보다 땅이 되는 게 꿈인 아버지가 떵떵거리지 못하는 건 기우뚱한 어깨 때문. 개미는 개미에게 의지하고 의지는 의지에 기대고 아버지의 몸을 기어 다니는 수많은 개미 떼. 아버지는 밤마다 방을 쓸어..

신춘문예 2021.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