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313

2024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운주사 천불천탑 / 김준경 그 누구도 시키지 않았고 그 누구도 떠밀지 않았다 저마다 한손에 정을, 다른 손에 망치를 들고 찾아왔다 운주계곡 조용한 골짜기를 따라 돌을 쪼는 소리가 이어진다 하나의 고통을 담아 한번의 망치질, 하나의 괴로움을 담아 쌓은 한층 사바세계로부터 깎여나간 마음 부여잡고 눈앞의 돌을 깎아 나간다 참아낼 수 없는 아픔을 돌위에 올려 깎아서 내버리면 눈이 나오고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돌위에 올려 깎아서 내버리면 귀가 나오고 벗어날 수 없는 원망을 돌위에 올려 깎아서 내버리면 입이 나온다 고해의 파도 속에서 멈추지 않고 들리는 돌 쪼는 소리 고통이 모여 돌을 가루로 만들고 괴로움이 쌓여 탑을 이룰 무렵, 돌속에서 웅크려 있던 부처님이 들꽃같이 환하게 피어난다 풀내음을 품은 미소를 지으며..

신춘문예 2024.01.09

[2024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상현달을 정독해 주세요 / 박동주(박현숙) 햅쌀을 대야에 가득 담아요 차고 푸른 물을 넘치도록 부으면 햅쌀은 물에서 부족한 잠을 채워요 쌀눈까지 하얗게 불었을 때 당신을 향한 마음이 몸을 풀어요 상현달처럼 떠오르는 마음을 알아차렸다면 속삭여 주세요 도톰한 떡살에 소를 넣어요 당신을 향한 비문은 골라내고 꽃물결 이는 구절만 버무려 소를 만들어요 당신 생각으로 먹먹해지는 마음이 색색의 반달로 차오르도록 한밤중이 되었을 때 서쪽 하늘을 골똘히 보아주세요 반죽을 작게 떼어 양 손바닥 사이에 넣고 가을볕이 등을 쓰다듬듯 잔잔히 궁글려요 이야기를 담은 소를 가운데 넣어 가을 한나절을 빚은 색색의 상현달들 떡살에 별자리가 뜨기도 해요 비껴간 당신을 향해 밤하늘 높이 상현달을 띄워요 이야기가 스며든 여러 빛깔의 편지지..

신춘문예 2024.01.09

2024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벽/추성은 죽은 새 그 옆에 떨어진 것이 깃털인 줄 알고 잡아본다 알고 보면 컵이지 깨진 컵 이런 일은 종종 있다 새를 파는 이들은 새의 발목을 묶어둔다 날지 않으면 새라고 할 수 없지만 사람들은 모르는 척 새를 산다고,연인은 말한다 나는 그냥 대답하는 대신 옥수수를 알알로 떼어내서 길에 던져두었다 뼈를 던지는 것처럼 새가 옥수수를 쪼아 먹는다 몽골이나 오스만 위구르족 어디에서는 시체를 절벽에 던져둔다고 한다 바람으로 영원으로 깃털로 돌아가라고 애완 새는 컵 아니면 격자 창문과 백지 청진기 천장 차라리 그런 것들에 가깝다 카페에서는 모르는 나라의 음악이 나오고 있다 언뜻 한국어와 비슷한 것 같지만 아마 표기는 튀르크어와 가까운 음악이고 아마 컵 아니면 격자 창문과 백지 청진기 천장이라는 제목일 것이고 새..

신춘문예 2024.01.09

2024,세계일보,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웰빙/한백양 힘들다는 걸 들켰을 때 고추를 찧는 방망이처럼 눈가의 벌건 자국을 휘두르는 편이다 너무 좋은 옷은 사지 말 것 부모의 당부가 이해될 무렵임에도 나는 부모가 되질 못하고 점집이 된 동네 카페에선 어깨를 굽히고 다니란 말을 듣는다 네 어깨에 누가 앉게 하지 말고 그러나 이미 앉은 사람을 박대할 수 없으니까 한동안 복숭아는 포기할 것 원래 복숭아를 좋아하지 않는다 원래 누구에게 잘하진 못한다 나는 요즘 희망을 앓는다 내일은 국물 요리를 먹을 거고 배가 출렁일 때마다 생각해야 한다는 걸 잊을 거고 옷을 사러 갔다가 옷도 나도 서로에게 어울리지 않는 곳에서 잔뜩 칭찬을 듣는 것 가끔은 진짜로 진짜 칭찬을 듣고 싶다 횡단보도 앞 노인의 짐을 들어주고 쉴 새 없이 말을 속삭일 때마다 내 어깨는 더욱 비좁..

신춘문예 2024.01.09

202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여기 있다/맹재범 접시와 접시 사이에 있다 식사와 잔반 사이에 있다 뒤꿈치와 바닥 사이에도 있는 나는 투명인간이다 앞치마와 고무장갑이 허공에서 움직이고 접시가 차곡차곡 쌓인다 물기를 털고 앞치마를 벗어두면 나는 사라진다 앞치마만 의자에 기대앉는다 나는 팔도 다리도 사라지고 빗방울처럼 볼록해진다 빗방울이 교회 첨탑을 지나는 순간 십자가가 커다랗게 부풀어 올랐다 쪼그라든다 오늘 당신의 잔고가 두둑해 보인다면 그 사이에 내가 있었다는 것,착각이다 착각이 나를 지운다 빗방울이 바닥에 부딪혀 거리의 색을 바꿔놓을 때까지 사람들은 비가 오는지도 모른다 사무실 창문 밖 거리는 푸르고 흰 얼굴의 사람들은 푸르름과 잘 어울린다 불을 끄면 사라질지도 모르면서 오늘 유난히 창밖이 투명한 것 같아 커다란 고층빌딩 유리창에 맺..

신춘문예 2024.01.09

2024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take/김유수 쓰레기를 줍는다 나는 쓰레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그것이 나를 쓰레기라 불렀다 쓰레기를 입고 거리를 활보했다 추운 거리를 그것이 배회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그것의 입 속은 차갑다 지나가는 그것의 입술은 아름다웠다 지나가는 그것의 코트가 차갑다 쓰레기와의 동일시는 어떻게 줍는 것일까 너는 왜 나처럼 쓰레기를 줍지 않을까 어떤 부부가 예쁜 쓰레기를 주워 간다 어떤 직장인이 따분한 쓰레기를 주워 간다 어떤 시인이 터무니없는 쓰레기를 주워 간다 그러한 쓰레기의 용도는 내가 입을 수 없는 옷이었다 지나가는 그것이 코를 틀어막고 간다 지나가는 그것이 눈을 질끈 감고 간다 지나가는 그것이 옷을 건네주고 간다 지나가는 그것을 코트로 덮어버렸다 지나가는 그것이 무덤,이라고 말한다 지나가는 그것이 나의..

신춘문예 2024.01.09

2023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 시 대상 수상작

간이역에 사는 사람들-서호식 발이 많아서 천천히 멀리가도 지치지 않는 통일호는 어디나 서며 누구나 내려주고 아무나 태웠다 완행열차를 통일호라고 이름 지은 것은 통일은 더디 와도 된다는 걸까 자정을 깨워 간이역마다 지친 잠들이 내리고 서울역에도 부스스한 다음날이 내렸다 간이역은 가난하고 고루한 기차만 서는 곳인지 작고 더딘 사람만 내리는 역인지 내리고 싶지 않은 기차는 제 몸뚱이를 철로 위에 길게 널어두고 바람만 달려 보내기도 한다 사라진 간이역이 골목 모퉁이에 문을 열었다 驛시 지치고 느린 사람들이 가쁜 걸음으로 들러 소주를 병째 들이켜고 엉킨 혀로 돌아가는 작고 헤진 역 역장 아줌마와 연착 된 하루를 풀고 간다 심사평-감정을 언어로 잘 형상화한 작품들 친절하게도 신문사에서 직접 전달해준 응모작 전부를 ..

신춘문예 2023.01.12

2023, 신춘문예 시 당선작 모음

2023 신춘문예 시 당선작 모음 (인쇄용) 202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묘목원/권승섭 ​ 버스를 기다린다 신호가 바뀌고 사람이 오가고 그동안 그를 만난다 ​ 어디를 가냐고 그가 묻는다 ​ 나무를 사러 간다고 대답한다 ​ 우리 집 마당의 이팝나무에 대해 그가 묻는다 ​ 잘 자란다고 나는 대답한다 ​ 그런데 또 나무를 심냐고 그가 묻는다 ​ 물음이 있는 동안 나는 어딘가 없었다 없음이라고 말해도 ​ 좋을 것 같다 ​ 무슨 나무를 살 것이냐고 그가 묻는다 ​ 내가 대답이 없자 나무는 어떻게 들고 올 것이냐고 묻는다 ​ 나는 여전히 말이 없다 먼 사람이 된다 ​ 초점이 향하는 곳에 나무가 있었다 ​ 잎사귀로는 헤아릴 수 없어서 기둥으로 그루를 세야 할 것들이 무수했다 ​ 다음에 나무를 함께 사러 가..

신춘문예 2023.01.03

2022,한국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수미산 외 1편/홍서연 십이월, 마른 나뭇가지 위에 어미 새가 집을 짓는다 앙상한 바람 사이로 고집멸도의 지푸라기를 얹는다 하루 사흘 그리고 며칠, 바닥에서 퍼드덕거리는 아기 개똥지빠귀 모닥불이 훨훨 타고 있었다 휘이 휘이, 여린 휘파람 소리 나지막이 저 먼 치서 들리는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겨울 잎새 하나, 와불 와불 굴러다닌다. 중력 너머 식물의 뿌리가 아래로 자라는 것처럼 폭포가 너의 우듬지를 때리는 것처럼 생활 밖으로 뻗어가는 중력은 어둠의 적막으로 향하는 것만은 아니지 세수를 하고 집을 나설 때마다 벽이 조금씩 조금씩 자라나지 어떤 옷을 입을까 고민할 때마다 벽은 조금씩 조금씩 부풀어 오르지 멀어지는 사랑만큼 벽 따라 골은 파이고 몸을 밀어 넣을수록 자라나는 욕망은 휘어지고 깊고 깊은 밥을 배부..

신춘문예 2022.0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