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모음 67

(제20회 성파시조문학상 수상자 작품 : 2003 )

*바람 외 5편* / 강 호 인 황막한 골짜구니 빈 수레 몰아가다 별빛 저민 가락 풀어 영원을 비질하는 형해도 자취도 없이 뒤척이는 넋이다. 나울 미쁜 파도 위에 갈매기 나래칠 때 펄럭이는 깃발 아래 목쉰 고동 부리면서 때로는 사공이 되어 망망대해 노를 젓고 청산 오르다가 숨이 차 잠시 쉬면 이름 모를 풀꽃망울 살며시 귀를 열어 한 말씀 새겨들을 듯이 반기면서 모신다. 능금알 익어가는 과원 들러 정을 주어 갈햇살 볕여울로 속살 헹궈 꿈 쟁이고 단풍잎 품에 안기면 춤사위도 황홀해. 천심 지심 깨울 소명 신탁 받은 숙명이거나 행여의 고된 사역 못 떨칠 천형이든간에 내민 손 아랑곳 않는 그 무위 거룩하네. *안개論 . 3* 몽타아즈 한 장 못뜰 범인들의 천국인가 겹겹의 가면 쓰고 탈춤 추듯 능청 떠는 지금은 ..

시조 모음 2022.05.05

[중앙 시조 백일장] 1월 수상작

◆응모안내 응모 e메일 주소가 바뀌었습니다. 매달 20일까지 e메일(j.sijo@joongang.co.kr) 또는 우편(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48-6 중앙일보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으로 접수 할 수 있습니다. 등단하지 않은 분이어야 하며 3편이상, 5편 이하로 응모할 수 있습니다. 02-751-5315 〈장원〉 햇볕 계단 -김보선 짧은 치마에 담긴 햇살 어디로 간 건지 수많은 신발이 머릿속을 헤집는다 창문은 빛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기울이고 무릎 걸친 바깥은 안쪽의 배후를 알까 숨어 있는 반 지하 붉은 눈을 밝혀도 당신 꿈 도착하기 전 골목이 고단하다 평생 오르고 싶은 마음 속 햇볕 계단 눅눅한 반점을 군데군데 남겨놓고 한 번도 환해본일 없이 눈빛만 번식한다 ◆김보선 국립 한경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시조 모음 2022.04.10

[중앙 시조 백일장] 3월 수상작

〈장원〉 너瓦, 함께하는 지붕 한승남 너瓦, 함께하는 지붕 지붕은 예기치 않은 시간을 담은 팔레트 구멍 뚫린 사이로 보이는 하늘색 오래된 밑그림 되어 박꽃 위로 솟는다 널브러진 너瓦 개비 껍질 벗겨 던지고 떨어진 비늘 조각처럼 밀려난 아버지 더 이상 날리지 않도록 칡넝쿨로 묶어둔다 누름대는 당신 마음 누가 알아챘을까 바람의 기척이 소리 없이 사라져 지붕은 산그늘 향해 또 한 생을 읊는다 ◆한승남 서울 출생. 고려대 정보통신 대학원 졸업. 전 정우직업전문학교 원장. 현 고려아트컴퓨터학원 원장. 〈차상〉 에그문(EGG MOON)* 주은 보름을 며칠 앞둔 미완의 달항아리 물레를 돌릴 때마다 풍만해진 몸피는 토라져 파편이 될까 다독이는 구름愛 꽃바람 근심걱정 맨 손결로 빚어내면 찰랑이는 달빛물결 교교히 흩날린다..

시조 모음 2022.04.10

[중앙 시조 백일장] 2월 수상작

〈장원〉 다보탑을 줍다 강영석 하루의 무게를 주머니에 구겨 넣고 퍼즐 같은 보도블록 하나, 둘 더듬다가 가로등 기대고 있는 십 원을 주웠다 수많은 눈길 속엔 짐 같은 존재였는지 짓밟히고 채이다가 생채기만 남은 흔적 검붉은 이끼 사이로 팔각 난간 상처 깊다 시퍼렇게 날 선 바람 난도질하는 골목길에 몸 하나 담고 남을 몇 원 짜리 박스 포개 힘겹게 허기를 줍는 백발의 부르튼 손 먼 곳만 바라보며 걷던 발길 멈춰 섰다 발끝을 찌른다 딛고 섰던 바닥이 오늘 난, 국보 20호 단단함을 보았다 장원/강영석 경기 여주 출생. 2018년 6월 중앙시조백일장 차상. 현 D.CUBE 대표. 〈차상〉 어떤 도전 최은지 코로나에 휘둘리다 가다 말다 대학 4년 뉴스로 본 취준생 어느새 나도 뛴다 이력을 만드느라고 눈발 손발 붉..

시조 모음 2022.04.10

낭만의 무늬 (외 2편)/홍성란

낭만의 무늬 (외 2편)/홍성란 같은 악기를 쓰는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젠이 한창 전쟁 중일 때 포로가 된 악사가 총구를 들이댄 병사에게 죽기 전 소원이라고 꼭 한 번 연주하게 해달라고 ‘자만차’를 가리켰다 총구를 거두자 어릴 적 흥겨운 마을 축제 음악이 가늘게 흐르고 눈물을 흘리던 병사는 포로를 도망치게 했다 명분을 이긴 건 무얼까, 눈물일까 소리일까 갈잎 사원 늘 다니던 길에서 처음 만난 빈집 쥐똥나무 가는 가지에 둥지를 단 뱁새는 알 낳고 새끼 키우고 어디 멀리 갔을까 긴 겨울 버리고 허공으로 드는 꽃 저 허술한 궤도 이탈하지 않기를 가다가 돌아보면 한 채, 손짓하는 신의 집 곡우穀雨 지렁이도 물이 올라 여린 풀은 머리 빗고 잘 견디었네 고생 많았네 어제보다 의젓하네 온 들녘 물 마시는 소리 가지런..

시조 모음 2022.03.25

홍성란 시조

가을 용문역 / 홍성란 산문(山門)에 와 배웠다 모르는 건 죄라고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듣고도 듣지 못하였으니 간다고 갈 줄 몰랐으니 가다 올 줄 알았으니 앉을 데 앉은 금박(金箔) 은행잎 꽃무덤을 던져 올린 순간 쏟아지는 환호(歡呼) 여기 와 없는 죄를 사하고 말려 올라간 하늘이다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신사동 편액 하루는 도올 선생이 마누라하고 만해마을에 왔어 교수고 한의사고 동경대 하버드대 박사라는데 논리로서는 당할 수가 없는 거야. 신문을 보니까 도올이 세계의 심장에 혈을 꽂겠다며 미국 갔다 왔다는데 몽둥이를 칠까, 대갈통을 깨뿔까 하다가 세계의 심장이 어디냐 물었지. 즉답이 나와야 하는데 오 분이 지나도 대답이 없어. 그래 내가 "네 마누라 배꼽이 세계의 심장이다"하고 할망구 배꼽을 가리켰더니 ..

시조 모음 2022.01.22

2022,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모음

● [조선일보 2022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허블 등대/박샘 날리는 모래들이 눈에 자꾸 끼어든다 빠지고 싶어 했던 깊이가 있었다고 열리면 바로 닫히는 문을 열고 또 연다 떴다가 감았다가 점멸하는 등대처럼 별이 든 눈에서는 깜박이면 반짝여서 출처를 밝힐 필요가 모래에겐 없었다 들 만한 깊이라면 찾기가 쉽지 않아 운석을 지나왔고 사막을 건넜으나 빠지면 나오지 않아 없다고도 할 수 있다 껐다가 다시 켜진 반복은 언제 쉬나 왔다 간 잠이 또 온 불면의 행성에서 모래는 침몰을 향해 국경선을 넘는다 ● 심사평 ; 발견에 입히는 사유와 이미지 조합이 정교 신춘의 설렘이 무색한 시절이다. 응모작들에서도 일상이 된 마스크 속의 고통과 고독이 많이 짚인다. 홀로, 따로, 안으로 침잠하며 감염병 시대를 건너가는 각자 도생..

시조 모음 2022.01.06

답청踏靑/유종인

1 맨발로 밟고 가자 바람을 밟고 가자 피를 좀 흘려보자 초록을 좀 눌러보자 헌혈차 문을 밀고서 겨울 피를 봄에 주자 2 들판은 연둣빛 들판 돌아올 땐 초록 들판 외딴 것들 빈손에는 연애담이 풀물 들어 지구에 또 사랑이 걸린다 짙어가자 마음이여 3 비천한 듯 고고한 듯 가난한 듯 소슬한 듯 그러나 품고 넘자 거리의 소산일랑, 맨발로 달려가 맞자 천둥 치는 천기天機의 뜰

시조 모음 2022.01.06

墨梅 外1편 / 김일연

墨梅 고양이 발자국이 점점이 다녀간 후 매화 먹 가지에 물오르는 환한 밤 우물에 별자리인 양 뜨고 있는 괭이눈꽃 가느다란 붓끝이 찍고 간 눈동자에 별빛 모아 불꽃일 것만 같다 봄밤에 다녀가시라고 끈 풀어놓는다 *표암 강세황(1713~1791)의 「墨梅圖」. -격월간 2011년 3,4월호 별 연필을 깎아주시던 아버지가 계셨다 밤늦도록 군복을 다리던 어머니가 계시고 마당엔 흑연 빛 어둠을 벼리는 별이 내렸다 총알 스치는 소리가 꼭 저렇다 하셨다 물뱀이 연못에 들어 소스라치는 고요 단정한 필통 속처럼 누운 가족이 있었다 -2008년 ⸺계간 《열린시학》 2021년 가을호 제21회 고산문학상 시조부문 수상자의 대표작 중에서 ------------------- 김일연 / 1955년 대구에서 태어나 경북대학교를 졸업..

시조 모음 2021.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