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김륭 신작 시 모음

시치 2007. 4. 1. 23:26

달의 뒷문/김 륭 
            ―맷돌을 찾아서


 
  버려진 맷돌 하나가 붕- 떠오르려다 망한 거야
  찌르레기 몇 마리 배곯다가는 빈집 처마 밑으로 덩그러니
  그러니까 턱수염 무성하게 자란 풀벌레 울음소리에 펄쩍, 까무러친
  달의 뒷문 한 짝 떨어져 있는 거야

 

  이이허어이 어흐 이어동허라/이어 이어허언 이이얼 이어동허라*
 
  무슨 소린지 알아먹겠니?
  배터지게 먹어보는 게 소원이던 시절의 휴대폰 벨소리……, 드르륵 드르륵 
  마침내 꼬르륵 배꼽까지 곡물로 갈았던
  맷돌, 어둔 공원벤치 별빛에 궁둥이 물린 연인들처럼 몸 포개고 있는
  윗돌과 아랫돌 내려다보며 나는 참 엉뚱하지
 
  지금 내가 사는 나라 돌아가는 꼴도 어처구니없이 버려진 저 맷돌 신세가 아닐까 생각했지 남북으로 배창시 갈라진 나라 사람들 꽃으로 피우고 꽃으로 지우기 위해 윗돌이 된 해와 아랫돌이 된 달, 쉬쉬 검붉은 저녁구름 몰아와
  불지피던 아궁이에 머리통을 들이민 거야

 

  울컥, 농협 빚에 쓰러진 아버지를 구하지도 못하고 총을 반납한 나는
  메콩강변의 베트남여자 하나 물수제비처럼 떠와 농사나 짓고 살까 투쟁(鬪爭)보다 투병(鬪病)으로 기운 날들 새까맣게 밑이 탄 솥단지로 걸어놓고
  천둥번개나 끓여 먹고싶던 나는 살짝 맛이 갔나봐
  대를 이어 이 집을 지키다간 부부들의 부들부들 살 떨리던 가난과 사랑 그리고 뼈를 갈던 섹스, 부서진 음악처럼 절박했지만 드르륵 생의 뒷문을 열지 못한
  맷돌질을 떠올린 거야

 

  정승 팔자 에에이헐 좋나믄/이어 이언 이얼 이어동허라
  백성들잉 에헤이엉 대들보 메영/이어 이언 이얼 이어동허라*

 

  눈물 한 장 갈아 끼우지 못한 윗돌과 아랫돌, 불 끄진 성감대 사이로
  속눈썹 그린 총부리가 참 어처구니없다는 듯 입을 봉한
  맷돌,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꿈꿀 수 없다면 파르르
  혀라도 뽑아 피를 돌려야 한다는 거지

 

*맷돌소리-옛 아낙네들이 맷돌에 곡식을 타면서 부르는 소리.

 

<현대문학 4월호 2007 신춘문예 당선자 특집>

 
 

 
꽃을 굽는 여자/김 륭 


       
꽃은 조개가 더 좋아한다며 찡긋 눈웃음치는 여자
포장마차 아줌마 빨간 매니큐어 칠한 손톱에 기죽은 칼끝을
꽃잎처럼 물고 한사코 죽음을 손사래치던
조개, 연탄화덕 위에 가만히 올려놓으면 너무 오래 기다렸다는 듯
왈칵, 몸 열어준다
뻘구덩이에 처박혔다 가는 생生이 어디 조개 캐는 아낙들뿐이랴
조개 또한 단 한순간이라도 뜨겁게 살고 싶었던 것이다
비린내나는 목숨이나마 꽃피우고 싶었던 것이다
속살 깊숙이 음악처럼 묻었던 끼룩끼룩 갈매기 소리 한 접시
파도 소리 한 접시 따로 담아
낯붉히는 조개구이
입 다물면 알 수 없는 속내 시커멓게 타버리면
그게 바로 꽃이라고 속삭이는 조개 
썩지도 않는 바다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지지도 않는
바다, 염낭게 겁탈하던 밤바다를 지글지글
꽃피우고 있다
못 다한 사랑을 불지르고 있다
징글징글하다, 이놈의 바다
온 바다가 된통
꽃밭이다


 

탁본拓本/김 륭

 

 

돼지국밥집 배불뚝이 주인사내가 파리를 쫓고 있다
불안하다 나는 파리만 날리는 오후 4시를 숟가락으로 움켜쥔다
건너뛸 뻔했던 한 끼 목숨을 꿀꺽, 제 밥그릇이라고 우기는
파리 한 마리
모르는 척 돼지국밥 우겨넣고 있는 나를 향해 식은땀 뻘뻘 흘리며 다가서는
사내, 한 끼 밥을 위해 싹싹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있는
까짓 파리 목숨 하나 조이기 위해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저토록 엄숙하고 경건하겠는가?
플라스틱 파리채 하나 꽃대처럼 세우고 
엉덩이 뒤로 쭈―욱 뺀
사내
탁!

 

돼지국밥 속에 비친 눈꺼풀 사이로
오래오래 핏기 가시지 않을
탁본 한 장

 

내 목숨이 아니라고 하기엔 알리바이가 부족하다
시뻘겋게 나는 눈도 감지 못한 채 
전생을 건너온 것이다


 

<계간문예 다층 봄호-기획특집 2007 신춘문예를 진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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