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충남 홍성 출생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1994년 첫시집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 문학동네
1996년 <풋사과의 주름살>, 문학과지성사
1999년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 문학과지성사
2001년 <제비꽃 여인숙>, 민음사
2004년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 문학동네
2006년 <의자>, 문학과지성사
2006년 제26회 소월시문학상 우수상
뒷짐
짐 꾸리던 손이
작은 짐이 되어 등뒤로 얹혔다
가장 소중한 것이 자신임을
이제야 알았다는 듯, 끗발 조이던
오른 손을 왼손으로 감싸 안았다
세상을 거머쥐려 나돌던 손가락이
자신의 등을 넘어 스스로를 껴안았다
젊어서는 시린 게 가슴뿐인 줄 알았지
등뒤에 양손을 얹자 기댈 곳 없던 등허리가
아기처럼 다소곳해진다, 토닥토닥
낮은 언덕의 어깨 위로 억새꽃이 흩날리고 있다
구멍 숭숭 뚫린 뼈마디로도
아기를 잘 업을 수 있는 것은
허공 한 채를 업고 다니는 저 뒷짐의
둥근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겠는가
등허리의 빈 손 위에, 짐짓
우주 한 채가 가볍게 올라앉았다
문학사상(2004, 2월호)
모서리의 힘
내장탕 전문인 청일식당
빈대 콧구멍만한 화장실엔
대각선으로 변기가 놓여 있다
일 보는 동안 어쩔 수 없이
모서리를 바라봐야 한다
똥처럼 마모된 모서리를 반성해야 한다
겉은 둥글둥글 따스해야 하지만
속으론 모서리의 힘을 갖고 있어야지
탈취제 빈 그물에 갇혀 있는 상표를 보며
자신의 이름을 반성해야 한다
네 귀퉁이 모서리마다 낡은 거미줄이 있고
입적을 마친 빈 방들이 매달려 있다
청양 버스터미널 옆 청일식당에 가면
대각선의 중심에 앉을 수가 있다
그래, 모서리는 힘이지
모서리가 있어야 똥심이 있지
독을 들이마시며 자신을 지워가는
순백의 탈취제, 그 낡은 이름표를 바라보며
중심을 찍고 나온다
버스를 한 대쯤 놓쳐 버리면 어떤가
칠갑산 그늘에 오래 숙성된
좋은 술이 팔짱을 끼리니
건배 대신 구기자를 외치며
칠갑산 계곡처럼 깊어지면 어떤가
대추나무
땅바닥으로 머리를 디미는 시래기의 무게와
옆구리 찢어지지 않으려는 어린 대추나무의 버팅김이
떨며 떨리며, 겨우내 수평의 가지를 만든다
봄이 되면 한없이 가벼워진 시래기가
스런스런 그네를 타고, 그해 가을
버팀목도 없이 대추나무는
닷 말 석 되의 대추알을 흐드러지게 매다는 것이다
숟가락
작은 나무들은 겨울에 큰단다 큰 나무들이 잠시 숨 돌리는 사이, 발가락으로 상수리도 굴리며 작은 나무들은 한겨울에 자란단다 네 손등이 트는 것도 살집이 넉넉해지고 마음의 곳간이 넓어지고 있는 것이란다
큰애야, 숟가락도 겨울에 큰단다 이제 동생 숟가락들을 바꿔야겠구나 어른들이 겨울 들녘처럼 숨 고르는 사이, 어린 숟가락들은 생고구마나 무를 긁어먹으며 겨울밤 고드름처럼 자란단다
장에 다녀오신 어머니가 福자가 쓰인 숟가락 세 개를 방바닥에 내놓으신다 저 숟가락이 겨우내 크면 세 자루의 삽이 될 것이다
쌀밥을 퍼 올리는 숟가락처럼 나무들 위에 눈이 소복하다 함 뼘 두 뼘 커 오를 때마다 나뭇가지에서 흰 눈 이 쏟아지고 홍역인 듯 항아리 손님인 듯 작은 새들이 날아간다
하늘이 다시 한 번 털갈이를 시작한다
우표
우표의 뒷면은
얼어붙은 호수 같다
가장자리를 따라 얼음 구멍까지 뚫어놓았다
침이라도 바를라치면
뜨건 살갗 잡아당기는 것까지
우표는 쩔걱쩔걱한 얼음판을 닮았다
우표와 마주치면 언제라도
혓바늘 서듯 그대 다시 살아나
지난 몇십 년의 겨울을 건너가고 싶다
꼬리지느러미 좋은 화염의 추억에 초고추장 찍어
아, 그대의 입천장 들여다보고 싶다
편지봉투를 불자, 아뜩하게
얼음 깨지는 소리며 빙어 튀어 오르는 소리 올라온다
불면의 딱따구리가 내 늑골에다 파놓은 구멍들
그 어두운 우체통에 답장을 넣어다오
저 얼음 우표가 봄으로 가듯
나의 경계도 소통을 꿈꾼다
우표의 울타리, 빙어알만 한 구멍들도
반절로 쪼개지며 온전한 한 장의 우표가 된다
우표의 뒷면에 혀를 댄다
입술과 우표가 나누는 아름다운 내통
입맞춤의 떨림이 사금파리처럼 싸하다
그대 얼음장 안에 갇혀 있는 한
성에 가득한 혓바닥, 그 끝자리에
언 목젖을 가다듬는 내가 있다
출처, 간이역에이는시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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