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모음

하순희 시조모음

시치 2006. 10. 4. 20:52
하순희 시조집[적멸을 꿈꾸며] ▶<해설: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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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5/01/26, 12:37:45
작성자: 샘지기 (http://sijosam.com

*비, 우체국 외 6편*

                                                    하 순 희

난 한 촉 벌고 잇는 소액환 창구에서
얼어 터져 피가 나는 투박한 손을 본다
"이것 좀 대신 써 주소, 글을 씰 수 없어예."
꼬깃꼬깃 접혀진 세종대왕 얼굴 위로
검게 젖은 빗물이 고랑이 되어 흐른다
"애비는 그냥 저냥 잘 있다. 에미 말 잘 들어라."
갯벌 매립 공사장, 왼종일 등짐을 져다 나르다
식은 빵 한 조각 콩나물 국밥 한술 속으로
밤새운 만장의 그리움, 강물로 뒤척인다.
새우잠 자는 부러진 스티로폼 사이에
철 이른 냉이꽃이 하얗게 피고 있다
울커덩 붉어지는 눈시울,
끝나지 않은 삶의 고리


*석탄*

다시 나를 보내다오 아프리카 밀림으로
맘모스와 공룡이 어울려 함께 어울려
광막한 푸른 초원 위
야자수 잎새 춤추던

수억 광년 빛의 세월 거슬러 내려가면
거기 가슴 저린 손발 저린 진폐증
눈물도 검은 눈물도
말라붙은 동공이

푸르러 더 싱싱한 지구의 허파 그 시대로
철철철 넘치는 수액 온몸을 적셔주는
돌아가 태어나고 싶다.
다시 푸른 몸으로


*겨울 고원*

잔기침 소리에도 금이 가는 겨울 산정
눈보라 한가운데 에스키모 가고 있다.
바람은 회오리치며
온몸을 쓸고 간다.

저 혼자 부는 바람 바람개비 돌리고
세월의 끝에 서서 언 하늘을 바라보며
누가 또 이 먼 밤길을
혼자서 떠나는가


*그릇*

산산이 부서져라 한 점도 남기지 말고
부서져 어느 도공의 손끝에 다시 가 닿아
수만도 불길 속에서 끓는 물이 되거라

어쩌지 못해 지녀왔던 못난 삶의 언저리
바스러질 대로 바스러져 형체 모두 지워버린 채
티끌로 먼지로 변해 흙으로 돌아가라

하얀 피 철철 흘려 깨어지는 아픔 있어도
풀잎 돋고 뿌리내린 나무 밑의 한줌 흙으로
몇 억겁 바람이 불어도 그 세월 이기거라

그런 날 인연 닿는 어느 도공의 눈에 띄어
시린 마음을 담아 데워서 건네주는
이 지상 단 하나 남을 결 고운 그릇이 되거라.


*적멸을 꿈꾸며*

해진 신발을 끌며 가야 할 길 남아있어
난타하는 북소리 온몸으로 받으며
몸 하나 깨끗이 사를
장작 한단 마련키 위해

눈감아도 젖어오는 흐린 날 강둑에서
흩뿌리면 그만인 이름 없는 늑골들
적멸에 들고픈 홀씨
바람결에 날아간다


*가을의 시(詩)*

억새 피는 고향 언덕 마음두고 떠나와
하늘 끝에 서걱이는 마른 설움 풀어내며
해마다 늘 이맘때면
노오란 인동꽃이네

내리붓는 폭염 건너 단풍 물든 산자락 지나
가림 없는 빈손 모으며 물이 되어 가는 길
서늘한 법열의 자리
그대에게로 가는 길

온전히 버리고서야 남아 있는 씨앗 한 점
풀 소리 바람 소리 숨겨둔 뜰에 서면
한 생을
저 가을 햇살처럼
갈무리 하고싶다.


*이중섭의 흰 소를 보며*

한 획 등뼈처럼 내리그은 화필 끝에
언 땅을 노려보는 잠들 수 없는 눈빛
삭혀도 되살아나는
어쩔 수 없는 멍울인가

네 뿔이 이고 있는 군청(群靑)의 하늘 아래
주린 창자 안고 가는 흰옷 입은 이웃들과
뒤틀린 발자국 같은
배리(背理)의 길도 있었지.

나눠 지닌 궁핍 앞에 바람막이로 버티면서
묵묵히 네가 갈던 이 땅의 묵정밭에
오늘은 또 다른 문명이
짙은 그늘 딛고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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