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05/01/26, 12:37:45 작성자: 샘지기 ( http://sijosam.com) *비, 우체국 외 6편*
하 순 희
난 한 촉 벌고 잇는 소액환 창구에서 얼어 터져 피가 나는 투박한 손을 본다 "이것 좀 대신 써 주소, 글을 씰 수 없어예." 꼬깃꼬깃 접혀진 세종대왕 얼굴 위로 검게 젖은 빗물이 고랑이 되어 흐른다 "애비는 그냥 저냥 잘 있다. 에미 말 잘 들어라." 갯벌 매립 공사장, 왼종일 등짐을 져다 나르다 식은 빵 한 조각 콩나물 국밥 한술 속으로 밤새운 만장의 그리움, 강물로 뒤척인다. 새우잠 자는 부러진 스티로폼 사이에 철 이른 냉이꽃이 하얗게 피고 있다 울커덩 붉어지는 눈시울, 끝나지 않은 삶의 고리
*석탄*
다시 나를 보내다오 아프리카 밀림으로 맘모스와 공룡이 어울려 함께 어울려 광막한 푸른 초원 위 야자수 잎새 춤추던
수억 광년 빛의 세월 거슬러 내려가면 거기 가슴 저린 손발 저린 진폐증 눈물도 검은 눈물도 말라붙은 동공이
푸르러 더 싱싱한 지구의 허파 그 시대로 철철철 넘치는 수액 온몸을 적셔주는 돌아가 태어나고 싶다. 다시 푸른 몸으로
*겨울 고원*
잔기침 소리에도 금이 가는 겨울 산정 눈보라 한가운데 에스키모 가고 있다. 바람은 회오리치며 온몸을 쓸고 간다.
저 혼자 부는 바람 바람개비 돌리고 세월의 끝에 서서 언 하늘을 바라보며 누가 또 이 먼 밤길을 혼자서 떠나는가
*그릇*
산산이 부서져라 한 점도 남기지 말고 부서져 어느 도공의 손끝에 다시 가 닿아 수만도 불길 속에서 끓는 물이 되거라
어쩌지 못해 지녀왔던 못난 삶의 언저리 바스러질 대로 바스러져 형체 모두 지워버린 채 티끌로 먼지로 변해 흙으로 돌아가라
하얀 피 철철 흘려 깨어지는 아픔 있어도 풀잎 돋고 뿌리내린 나무 밑의 한줌 흙으로 몇 억겁 바람이 불어도 그 세월 이기거라
그런 날 인연 닿는 어느 도공의 눈에 띄어 시린 마음을 담아 데워서 건네주는 이 지상 단 하나 남을 결 고운 그릇이 되거라.
*적멸을 꿈꾸며*
해진 신발을 끌며 가야 할 길 남아있어 난타하는 북소리 온몸으로 받으며 몸 하나 깨끗이 사를 장작 한단 마련키 위해
눈감아도 젖어오는 흐린 날 강둑에서 흩뿌리면 그만인 이름 없는 늑골들 적멸에 들고픈 홀씨 바람결에 날아간다
*가을의 시(詩)*
억새 피는 고향 언덕 마음두고 떠나와 하늘 끝에 서걱이는 마른 설움 풀어내며 해마다 늘 이맘때면 노오란 인동꽃이네
내리붓는 폭염 건너 단풍 물든 산자락 지나 가림 없는 빈손 모으며 물이 되어 가는 길 서늘한 법열의 자리 그대에게로 가는 길
온전히 버리고서야 남아 있는 씨앗 한 점 풀 소리 바람 소리 숨겨둔 뜰에 서면 한 생을 저 가을 햇살처럼 갈무리 하고싶다.
*이중섭의 흰 소를 보며*
한 획 등뼈처럼 내리그은 화필 끝에 언 땅을 노려보는 잠들 수 없는 눈빛 삭혀도 되살아나는 어쩔 수 없는 멍울인가
네 뿔이 이고 있는 군청(群靑)의 하늘 아래 주린 창자 안고 가는 흰옷 입은 이웃들과 뒤틀린 발자국 같은 배리(背理)의 길도 있었지.
나눠 지닌 궁핍 앞에 바람막이로 버티면서 묵묵히 네가 갈던 이 땅의 묵정밭에 오늘은 또 다른 문명이 짙은 그늘 딛고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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