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03/11/08, 06:02:49 작성자: 샘지기 ( http://sijosam.com) *희망 외 10편*
이 우 걸
*희망*
길이 가파른 곳엔 반드시 샘물이 있다 상처가 깊을수록 깊어지는 사랑이 있듯 어둠을 뚫고 빛나는 저 별빛의 일획으로.
-「희망」전문.『사전을 뒤적이며』, p.11.
*잔*
기다리며 마실수록 잔은 말이 없다 생각하며 마실수록 잔은 말이 없다 헐벗은 마음이수록 잔은 더욱 말이 없다
닿으면 되살아나는 무형의 언어들을 이 적요의 공간 속에 한없이 풀어 놓는 일 그대와 내가 가꾸는 절제의 온유함이여.
-「잔」전문.『사전을 뒤적이며』, p.15.
*모란*
피면 지리라 지면 잊으리라 눈 감고 길어 올리는 그대 만장 그리움의 강 져서도 잊혀지지 않는 내 영혼의 자줏빛 상처.
-「모란」전문.『사전을 뒤적이며』, p.14.
*맹인*
맹인은 사물을 손으로 읽는다
손은 그가 지닌 세계의 창이다
마음이 길을 잃으면
쓸쓸한 오독(誤讀)도 있는....
눈 뜬 우리는
또 얼마나 맹인인가
보고도 만지고도
읽지 못한 세상을
오늘은 뜬구름인양
하염없이 바라본다
*이름*
자주 먼지 떨고, 소중히 닦아서
가슴에 달고 있다가 저승 올 때 가져오라고
어머닌 눈 감으시며 그렇게 당부하셨다.
가끔 이름을 보면 어머니를 생각한다
먼지 묻은 이름을 보면 어머니 생각이 난다
새벽에 혼자 일어나 내 이름을 써 보곤 한다
티끌처럼 가벼운 한 생을 상징하는
상처많은, 때묻은, 이름의 비애여
천지에
너는 걸려서
거울처럼
나를
흔든다.
*열쇠*
참으로 유한한 생의 터널에서
열쇠를 떨어뜨렸다 중년 가장인 그는
겨울이 난간에 서서 잔설을 뿌릴 시간에
집을 나올 때도
열쇠를 잊곤 했다
돌아와 문 앞에 서서 그는 가끔 생각했다
어쩌면 영영 열쇠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열쇠를 떨어뜨렸다 중년 가장인 그는
단정한 칼라의 빈틈없는 일과를 위해
지금은 그가 찾아가
열어야 할 방이 없다.
*피아노*
마음에 못질을 하고 누가 떠나갔을까
저녁 상처를 물끄러미 바라볼수록
이별의 빗방울들만
건반 위로 뛰어 오른다
슬픔이나 기쁨을 피아노는 말할 수 없다
그림자에 뒤섞인 저 손끝의 떨림으로
아침이 목련을 빚듯
한 선율을 빚어낼 뿐.
*휴가*
아직도 건너지 못한
맹독의 내일이 있다.
나는 풀밭에 누워 별들을 헤고 있지만
이 지상 어느 곳에도
영일(寧日)이란 술과 같다.
*피*
1
손톱으로 살을 파 보면 어둠이 숨어 있다.
눈 뜨지 못하는 그 어둠의 채찍으로
내 피는 온몸을 돌며
오늘을 노래한다.
노래한다. 그것이 잃어버린 의자라 해도
집나간 아내라 해도 타버린 방이라 해도
빈컵에 담긴 놀처럼
부질없는 꿈이라 해도.
2
어둠을 따라 도는 내 피는 악마의 혼령,
슬픔을 걸러내는 내 피는 천사의 손길.
한 줄기 실개천마저
품어 흐르는 강물이다.
*발에게*
그래, 오십팔년간 자네가 나를 날랐네
영혼이나, 육체 그런 구분은 의미가 없네
묵묵한 한 생의 무게를
감당해온
신뢰밖엔
*빗방울*
새벽 유리창에 빗방울이 매달려 있다
그저 빗방울이다 단순한 빗방울이다
일부러 표정을 살펴 의미를 짓지 말자
빗방울이 그러나 빗방울만일 수 없는 것은
우리네 마음이 지닌 상처들 때문이다
잠들지 않는 상처의 그 울음들 때문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