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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걸 시조모음

시치 2006. 10. 4. 02:04
이우걸 시집[맹인] ▶<해설: 김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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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3/11/08, 06:02:49
작성자: 샘지기 (http://sijosam.com

*희망 외 10편*

                                          이 우 걸

*희망*

길이 가파른 곳엔
반드시 샘물이 있다
상처가 깊을수록 깊어지는 사랑이 있듯
어둠을 뚫고 빛나는 저 별빛의 일획으로.

-「희망」전문.『사전을 뒤적이며』, p.11.


*잔*

기다리며 마실수록 잔은 말이 없다
생각하며 마실수록 잔은 말이 없다
헐벗은 마음이수록 잔은 더욱 말이 없다

닿으면 되살아나는
무형의 언어들을
이 적요의 공간 속에 한없이 풀어 놓는 일
그대와 내가 가꾸는
절제의 온유함이여.

-「잔」전문.『사전을 뒤적이며』, p.15.


*모란*

피면 지리라
지면 잊으리라
눈 감고 길어 올리는 그대 만장 그리움의 강
져서도 잊혀지지 않는
내 영혼의
자줏빛 상처.

-「모란」전문.『사전을 뒤적이며』, p.14.


*맹인*

맹인은 사물을 손으로 읽는다

손은 그가 지닌 세계의 창이다

마음이 길을 잃으면

쓸쓸한 오독(誤讀)도 있는....


눈 뜬 우리는

또 얼마나 맹인인가

보고도 만지고도

읽지 못한 세상을

오늘은 뜬구름인양

하염없이 바라본다


*이름*

자주 먼지 떨고, 소중히 닦아서

가슴에 달고 있다가 저승 올 때 가져오라고

어머닌 눈 감으시며 그렇게 당부하셨다.


가끔 이름을 보면 어머니를 생각한다

먼지 묻은 이름을 보면 어머니 생각이 난다

새벽에 혼자 일어나 내 이름을 써 보곤 한다


티끌처럼 가벼운 한 생을 상징하는

상처많은, 때묻은, 이름의 비애여

천지에

너는 걸려서

거울처럼

나를

흔든다.


*열쇠*


참으로 유한한 생의 터널에서

열쇠를 떨어뜨렸다 중년 가장인 그는

겨울이 난간에 서서 잔설을 뿌릴 시간에


집을 나올 때도

열쇠를 잊곤 했다

돌아와 문 앞에 서서 그는 가끔 생각했다

어쩌면 영영 열쇠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열쇠를 떨어뜨렸다 중년 가장인 그는

단정한 칼라의 빈틈없는 일과를 위해

지금은 그가 찾아가

열어야 할 방이 없다.


*피아노*

마음에 못질을 하고 누가 떠나갔을까

저녁 상처를 물끄러미 바라볼수록

이별의 빗방울들만

건반 위로 뛰어 오른다


슬픔이나 기쁨을 피아노는 말할 수 없다

그림자에 뒤섞인 저 손끝의 떨림으로

아침이 목련을 빚듯

한 선율을 빚어낼 뿐.


*휴가*

아직도 건너지 못한

맹독의 내일이 있다.

나는 풀밭에 누워 별들을 헤고 있지만

이 지상 어느 곳에도

영일(寧日)이란 술과 같다.


*피*

1

손톱으로 살을 파 보면 어둠이 숨어 있다.

눈 뜨지 못하는 그 어둠의 채찍으로

내 피는 온몸을 돌며

오늘을 노래한다.


노래한다. 그것이 잃어버린 의자라 해도

집나간 아내라 해도 타버린 방이라 해도

빈컵에 담긴 놀처럼

부질없는 꿈이라 해도.


2

어둠을 따라 도는 내 피는 악마의 혼령,

슬픔을 걸러내는 내 피는 천사의 손길.

한 줄기 실개천마저

품어 흐르는 강물이다.


*발에게*

그래, 오십팔년간 자네가 나를 날랐네

영혼이나, 육체 그런 구분은 의미가 없네

묵묵한 한 생의 무게를

감당해온

신뢰밖엔


*빗방울*

새벽 유리창에 빗방울이 매달려 있다

그저 빗방울이다 단순한 빗방울이다

일부러 표정을 살펴 의미를 짓지 말자


빗방울이 그러나 빗방울만일 수 없는 것은

우리네 마음이 지닌 상처들 때문이다

잠들지 않는 상처의 그 울음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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