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스크랩] 안도현 시모음 (펌)

시치 2006. 8. 31. 18:04

1961년 경북 예천에서 출생.
원광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1981년 대구매일 신문 신춘문예 당선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 <모닥불]> <그리운 여우> <그대에게 가고 싶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바닷가 우체국>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등
1996년 제1회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수상
제13회 소월시문학상
2005년 이수문학상
전주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숭어회 한 접시

 

눈이 오면, 애인 없어도 싸드락싸드락 걸어갔다 오고싶은 곳
눈발이 어깨를 치다가 등짝을 두드릴 때
오래 된 책표지 같은 군산, 거기
어두운 도선장 부근

 

눈보라 속에 발갛게 몸 달군 포장마차 한 마리
그 더운 몸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거라
갑자기, 내 안경은 흐려지겠지만
마음은 백열 전구처럼 환하게 눈을 뜰 테니까

 

세상은 혁명을 해도
나는 찬 소주 한 병에다
숭어회 한 접시를 주문하는 거라
밤바다가, 뒤척이며, 자꾸 내 옆에 앉고 싶어하면
나는 그날 밤바다의 애인이 될 수도 있을 거라

 

이미 양쪽 볼이 불콰해진
바다야, 너도 한 잔 할래?
너도 나처럼 좀 빈둥거리고 싶은 게로구나
강도 바다도 경계가 없어지는 밤
속수무책, 밀물이 내 옆구리를 적실 때

 

왜 혼자 왔냐고
조근조근 따지듯이 숭어회를 썰며
말을 걸어오는 주인 아줌마, 그 굵고 붉은 손목을
오래 물끄러미 바라보는 거라
나 혼자 오뎅 국물 속 무처럼 뜨거워져
수백 번 엎치락뒤치락 뒤집혀 보는 거라


 


미꾸라지 

 

 

추어탕집 양동이에 미꾸라지들이 우글거린다

진흙뻘 속을 파고들 때처럼 대가리 끝에 꼿꼿이 힘을 주고 꼬리를

이리저리 흔들면서 우글우글,

 

몸부림 쳐도

파고들어 가도

뚫지 못하는 게 몸인가

양동이에는 미끄러운 곡선들만 뒤엉켜

왁자하게 남는다

 

그 곡선들 위에

주인 여자가 굵은 소금을 한줌 뿌린다

그러자 하얀 배를 뒤집으며,

소금과 거품을 뱉어내며,

수염으로 제 낯짝을 치며,

 

잘도 빠져나가던 생애를 자책하는지

미꾸라지들은

곧바로 몸에서 곡선을 떼어낸다

그리고는 직선으로 뻣뻣하게 一字로  축 늘어져 눕는다

 

 

 

국방색바지에 대하여

 

저 벽에 걸린 바지는
국방색이다
단단한 청춘의 허벅지가 쑥 빠져나갔다
나는 후줄그레한 저 바지를 볼 때마다
우리들의 뒷골목을 돌아가야 빠꼼하게 간판불을 달고 있는
여인숙을 생각한다
그리운 냄새가 킁킁, 날 것도 같다
휴전선 이남에서 국방색 바지 입고 좆뺑이친 사내들 중에
50년대 이후 거기 누워 옆방에서
힘쓰는 소리, 욕지거리 한번 들어보지 않은 놈 있으면
나와 봐라, 국방색 바지가 걸려 있는 모든 방은
그래서 붉은 유곽이며
우리는 유곽이 키운 자식들이다
빳빳하게 다린 바지 훌러덩 벗고 그곳을 통과하지 않고는
누구도 어른이 될 수 없는 나라에서
그 바지 속에다 팽팽한 두 다리를 밀어 넣고
헌 자전거 타고 연대본부에 출근하던 나는
방위병이었다, 그때
군용트럭 위에서 여자만 보면 주먹감자를 먹이던
현역들의 성욕을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그들의 국방색 바지 속에 숨어 있는
욕망의 종소리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짬밥을 퍼먹을 때
나는 어머니가 차려준 밥을 먹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침마다 어이 물방위, 하고 불러서는 차렷, 열중쉬어 시키던
한참이나 어린 상병의 낯짝에 침 한번 뱉지 못했던 것도
계급 때문이 아니라
내가 국방색 바지를 그보다 먼저 벗게 되기 때문이었다
생전에 우리 아버지는 군에 가면 밥도 주고 옷도 주고
그래야 사람이 된다, 하셨지만
나는 내 아들에게는 다시는 입히지 않을
녹슨 못대가리에 달랑 매달려 있는
치욕의 빈 껍데기 같은
저 국방색 바지

 

 

 

염소의 저녁 
 
할머니가 말뚝에 매어놓은 염소를 모시러 간다
햇빛이 염소 꼬랑지에 매달려
짧아지는 저녁,
제 뿔로 하루종일 들이받아서
하늘이 붉게 멍든 거라고
염소는 앞다리에 한번 더 힘을 준다
그러자 등 굽은 할머니 아랫배 쪽에 어둠의 주름이 깊어진다
할머니가 잡고 있는 따뜻한 줄이 식기 전에
뿔 없는 할머니를 모시고 어서 집으로 가야겠다고
염소는 생각한다


 봄날은 간다

 

늙은 도둑놈처럼 시커멓게 생긴

보리밭가에서 떠나지 않고 서 있는살구나무에

꽃잎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자고 나면 살구나무 가지마다 다닥다닥

누가 꽃잎을 갖다 붙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쓸데없는 일을 하는 그가 누구인지

꽃잎을 자꾸자꾸 이어붙여 어쩌겠다는 것인지

나는 매일 살구나무 가까이 다가 갔으나

꽃잎과 꽃잎 사이 아무도 모르게

봄날은 가고 있었다

나는 흐드득 지는 살구꽃을 손으로 받아들다가

또 입으로 받아먹다가 집으로 돌아가곤 하였는데

 

어느날 들판 한가운데

살구나무에다 돛을 만들아 달고 떠나려는

한척의 커다란 범선을 보았다

살구꽃 피우던 그가 거기 타고 있을 것 같았다

멀리까지 보리밭이 파도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어서 가서 저 배를 밀어주어야 하나

저 배 위에 나도 훌쩍 몸을 실어야 하나

살구꽃이 땅에 흰 보자기를 다 펼쳐놓을 때까지

나는 떠나가는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출처 : 휘수(徽隋)의 공간
글쓴이 : 휘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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