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스크랩] 장석주 시모음

시치 2006. 8. 31. 17:46

1954년 충남 논산 출생
1975년 '월간문학' 신인상 공모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햇빛사냥], [그리운 나라], [새들은 황혼 속에 집을 짓는다],

[어떤 길에 관한 기억],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 [크고 헐렁한 바지]
평론집 [한 완전주의자의 책읽기], [비극적 상상력], [문학, 인공정원]
소설  [낯선 별에서의 청춘], [길이 끝나자 여행은 시작되었다],

[세도나 가는 길] 
현재 동덕여대 문예창작과에서 소설창작 강의

 

버드나무여 나를 위해 울어다오

뭇별 뜬 밤이 아픈 것은
내가 세상과의 싸움에 진 탓이다
한밤중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나는 저 오래된 고요에 마음을 빼앗겼다
후회가 물 빠진 저수지보다 먼저 가서
바닥을 드러낸 탓이다

앞뒤를 차근차근 살피고 나면
밤을 새운 후회는 때로 근력이 되기도 하니
벽촌의 한 뙈기 땅에 노각나무 묘목을
종일 심기도 하는 것이다

세상과의 싸움에 진 자가 가는 길이라고
왜 무궁이 없었겠는가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쳤을 뿐
재 남은 화덕에서 청노새 한 마리가
꾸역꾸역 나온다
지난 겨울 뿌리가 언 감나무 아래를 지나
잘 닦인 저 무궁의 놋쇠 하늘길을
청노새가 가고 있다

옻샘 약수터

누옥 뒤편으로 난
경사진 밤나무 숲 속 길을 오르면
옻나무 군락지는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다
왼쪽 어깨 쪽을 물 빠진 저수지에 고스란히 내어주는
옻나무 군락지의 샘물을
사람들은 약수라고 한다

오래 입은 옷을 양잿물에 삶아 빨아
볕 좋은 곳에 널어놓은 뒤
그늘 아래 한참을 앉아 있다

그늘이란 누군가 내게 내어주는
재 속마음인 걸 나는 안다
저 샘물도 누군가 입 틀어막고 참아내다가
마침내 터져 나오는 울음이 아닌가

작은 그늘 따위에
마음이 쉽게 눅눅해질 수는 없으니
내 속에 검정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또 다른 누군가 있다는 증거다

새 날은 저문 뒤에 오고
나무도 저물어야 새 잎을 피운다
당신과 오래 떨어져 있었으나
서로가 마음 환하게 밝히는 기쁨인 것을
옻샘 약수를 향해 오르며
새삼 깨닫는다

딱 한 번만 그립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덧문을 걸어 잠그면
검정 우산을 쓰고 걸어가던 사람이 우산을 접고
어 추워, 하며 내 몸으로 불쑥 들어와
함께 저물 것이다

옻샘 약수 몇 방울에 내 몸은 진정된다
몸이 저물어서 어두워질 때
비로소 마음은 지금 여기 없는 것들로
환해지던 것이다

소 금

아주 깊이 아파본 사람마냥
바닷물은 과묵하다
사랑은 증오보다 조금 더 아픈 것이다
현무암보다 오래된 물의 육체를 물고늘어지는
저 땡볕을 보아라
바다가 말없이 품고 있던 것을
토해낸다

햇빛이 키우는 것은 단 하나다
한 방울의 물마저 탈수한 끝에 생긴
저 단단한 물의 흰 뼈들
저 벌판에 낭자한 물의 흰 피들

염전이 익히고 있는 물의 석류를 보며
비로소 고백한다, 증오가
사랑보다 조금 더 아픈 것이었음을
아주 오래 깊이 아파본 사람이
염전 옆을 천천히 지나간다
어쩌면 그는 증오보다 사랑을 키워가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낯선 새

수령 칠팔십 년 되는 밤나무들이 빽빽한 숲
고요는 밤나무 숲의 유일한 피부양가족이다
그 숲의 끝은 벼랑이고
벼랑 아래는 성씨가 다른
아주 깊은 생이 모여 있다

물가로 소풍을 나서기도 하는데
간밤의 뒤숭숭한 꿈은
내 소풍의 간소한 점심식사로 챙긴다

숲 중턱에서 낯선 새가 청아하게 울고 있다
이 숲에서는 처음 보는 새다

너였구나, 간밤에
꿈속에서 울던 새
너 가늘게 떨고 있는 자폐의 영혼이여

미안하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나는 너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너를 소유하고 싶었던 거다

여태 너는 내 속에서
울고 있었구나!
낯선 새를 배웅하고 돌아서며
비로소 나는
저 숲에 너를 놓아준다

밤나무 숲과 천 개의 달

저 으슥한 밤나무 숲에 대해
나는 사유하노라

밤나무 숲은 실은 늙은 어머니의 숨겨진 과거다
밤나무 숲이 벙어리라는 걸 알려준 것은
물론 어머니였다
밤나무 숲에서 돌과 가랑잎,
그늘과 이끼류를 키우는 어머니
어머니가 몰래 젖 물려 키우는
천 개의 유전하는 달
달은 병치레하는 일이 없다, 어머니는
달이 밤나무 숲의 사생아라고
말한 적이 없다
한가함과 고요가 양치류 식물처럼 양육되는
밤나무 숲은
또한 천 개의 도서관을 가졌다
밤나무 숲에서 나는 비로소 연민과 동정을
또한 한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려운지를 배웠다
밤나무 숲에서는 상징과 은유 때문에
자주 길을 잃는다
물가를 서성이는 밤나무 숲 이야기를 듣고는
웬일인지 애인은 눈물을 글썽인다
무정부주의자들의 단명은 불가피한 운명이다

밤나무 숲이 키우고 있는 저 무정부주의자인
달을
나는 이미 알고 있노라

물의 이 둥근 쉼표 속에서

나는 바닥은 친 사람이다
나는
그걸 바닥이라고 말한다

요컨대 노동으로 생계를 세우지 못하고
간소하게 살지 못했다

마음에 하현달 하나 품고 들어온
나는 장기수배자다
물의 이 둥근 쉼표 속에
은신 중이다

이 물의 정거장 부근을 오래 서성이며
생각해보면 문제는 삶이다
얼마나 잘 살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잘못 살지 않았느냐가 문제다

나는 너무나 삶에 중독되어 있던 포유류다
빗방울이여, 얼마나
졸렬해질 수 있는가
원추리꽃이여, 얼마나 졸렬해질 수
있는가, 검정 강아지여,
얼마나 더 졸렬해질 수 있는가

빗방울이여, 네가 부처다
원추리꽃이여, 불편한 데는 없는가
내가 너를 극진히 모실 것이다
검정 강아지여, 네가 입적할 때까지
너를 충성스럽게 섬길 것이다

난 괜찮아

새벽이 되어도 넌 잠들지 못한다
밤나무 숲의 하늘 위로
일찍 잠 깬 새들이 이슬을 털며 날아간다

네가 잠들지 못한 것
네 안에서 화석이 되어버린 그 기억 때문이다
누구도 비밀의 무게를
함께 나누지는 못한다는 걸 알지만
내가 아무 위로도 되지 못한다는 게 괴로웠다

저녁이 되면 너는 씩씩하게
울혈된 목청으로 떨림이 많은 노래를 하거나
나무 아래에서 그늘 밑의 이낄들아, 라고
시작되는 긴 편지를 쓰곤 했다
네 자리는 지금 비어 있다
네가 떠난 그 자리엔
천 년을 마르지 않을 강물이 흐른다
청과일처럼 싱싱한 보름달을 안고 강물이 흐른다
어두운 길에 소나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는데도
너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네가 읽던 책들이 뒹굴고 있는
빈자리가 내게 속삭인다

난 괜찮아
정말 괜찮아


-시집<< 물은 천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그림같은 세상,2002년 2월 - 에서

출처, 시산맥

출처 : 휘수(徽隋)의 공간
글쓴이 : 휘수 원글보기
메모 :

'시인의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백석 시모음  (0) 2006.08.31
[스크랩] 안도현 시모음 (펌)  (0) 2006.08.31
[스크랩] 최서림(최승호) 시모음  (0) 2006.08.31
[스크랩] 유홍준 시모음  (0) 2006.08.31
[스크랩] 정일근 시모음  (0) 2006.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