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스크랩] 최서림(최승호) 시모음

시치 2006. 8. 31. 17:55

본명 최승호.

1956년 경북 청도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1993년 월간 <현대시>로 등단,

현재 산업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

1995년  이서국으로 들어가다 (문학동네)

1997년 유토피아 없이 사는 법 (세계사)

2000년 세상의 가시를 더듬다 (문학동네)

2000년 시론집 <말의 혀> <한국적 서정의 본질 탐구> 외 다수

2006년 구멍(세계사)

 

 오동나무

 

예로부터 저쪽 한량들이
기타나 만돌린을 가지고 놀았듯이
이쪽에서도 생활에 구멍 뻥뻥 뚫려있는 축들이
거문고나 피리를 만지며 흥성거려 놀 줄 안다
피리나 대금은 속을 통과해 나오는 바람으로 소리가 나는데
그 속이란 게 그저 뻥 뚫려있는 듯해도
천태만상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허(虛)란 실(實)의 다른 이름인 법
거문고 마디마디 울혈진 가락이 하늘과 땅 사이를 진동시킬 수 있는 이치도 알고 보면
뜯는 이의 마음이 텅 비어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텅텅 비어 있는 마음에서 저며 나와 푸르게 여울져 흘러가는 소리가 바로
뜯는 이의 혼이자 거문고의 정신인 것
잘 익은 가을날 오동나무를 베어 보라
긴 줄기를 따라 虛의 정신으로 꽉 메워진
텅 빈 구멍이 나있을 것이다
잔뜩 움켜쥠보다 손을 탁 놓아 비워버림이
자유롭다는 것을 진즉 알았는지
오동은 씨앗 시절부터 그 안에 구멍을 키워 왔을 게다
마음에 구멍이 뻥뻥 뚫려 있어 놀 줄 아는 축들만이
속이 텅 비어버려 쓸모 없는 오동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법
구멍 없는 것들은
놀 줄도 놀 자유도 모른다
요새 사람들 노는 게 어디 노는 것인가

 

구멍

 

나는 원래 구멍 안에서 만들어졌다

껌껌하고 긴 구멍 안에서 처음으로

아버지의 불씨를 이어 받았다

聖火 봉송하는 릴레이 선수처럼,

아늑하게 조여주는 긴 터널을 뚫고 나와 드디어

거친 빛의 세계로 나왔다. 태초의 명령을 따라

빛을 받아먹고 내 안의 불씨는

바람 센 땅의 삼나무 모냥 자라 올랐다. 이글이글.

언젠가 나는 또 하나의 구멍으로 돌아가리라

나의 불은 그 안에서 소멸되리라. 충직하게

신화와 소문의 산실. 그 비밀스런 구멍은

내 몸이 드나드는 집이고

불이 제 길로 들어가는 통로이다

나는 구멍으로 너를 사랑해 왔다. 정직하게

사랑은 불이다. 참말로

나의 불은 눈구멍, 귓구멍, 콧구멍, 입 구멍, 땀구멍

그리고 처음으로 내가 빚어진 구멍을 통해

내 안의 핵발전소로 흘러들어간다. 법칙보다 더 고집스럽게

불과 불이 얽혀서 핵처럼 터지는 사랑

구멍안에서 탄생하는 불씨 알

또 하나의 눈물 방울  

 

오래된 항아리 

 

  플라스틱 통에서 시들시들 다 죽어가던 감들을 장독 안으로 옮겨 놓으니 그놈들, 금세 생글생글 되살아난다 배가 둥근 장독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꼭 임신한 내 아내 같다 된장이나 감은 장독 안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다 그놈들, 자면서 익는다 이따금 벌어진 아가리로부터만 공기를 마시는 게 아니다 된장이나 감은 항아리 피부를 통해서도 숨을 쉰다 여름날 된장이 천둥 번개에도 까무러치지 않고 마음 푹 놓고 익을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엄마 뱃속같은 항아리 때문이다 오래된 항아리 까칠까칠한 뱃가죽으로 새벽 안개가 여인의 엷은 한숨모냥 스며들고 가을 햇살이 그의 맑은 기름을 풍성히 짜 넣어준다 명태 말라가는 냄새가 뒷간 냄새랑 어깨동무하고 항아리 안으로 숨어 들어가 낄낄 돌아다닌다 자궁 속에서 먹을 것 다 먹고 마실 것 다 마시고 나면, 그야말로 三冬 내내 웅크리고 자고 나면, 된장은 이른 봄날에 말랑말랑 갓난아기처럼 노오랗게 태어난다

 

대나무

 

겨울날 삭풍에 대나무가 더욱 크게 휠 수 있는 것은

속에다 잔뜩 감추고 있는 구멍때문이다

남보다 더 곡진(曲盡)하게 더 음산하게 울 수 있는 것도
칸칸이 방방이 더 시퍼런 불 켜들고 있는 구멍 때문이다

 

구멍은 사물이 놀 수 있는 자리이다
구멍이 없는 사물들은 자유가 없다
대나무들은 각자 자기의 구멍을 차지하고서
스스로 놀고 있다
구멍에서 구멍으로 이어지는 큰 구멍 속에서
대나무들은 서로 얽히면서 부대끼면서도
각자 바로 놀 줄 안다

 

우주도 큰 구멍이면서
다른 구멍 안에 둘러 싸여있다
어떤 소리는 우주 밖으로까지 울려나가기도 하는데
대금이나 피리를 불려면
하늘과 땅 사이를 울리고 꽉 메우는 소리를 내지르려면,
우리의 늑골을 흔들고서 참말로
우리의 혼을 우주 밖으로 까지 끌어올리는 소리를 내려면


대나무 구멍 안에 감추어진 소리를 읽어야한다
겨울밤 미친년모냥 흔들리며 울어댄 소리,
가을날 풀벌레보다 더 외로운 빈 구멍의 소리, 침묵의 소리
남국의 햇살 기름이 자르르 빛나는 영원의 소리.
대나무 통 안으로 계시처럼 스며들어가 있는
태초의 소리부터 부지런히 먹어봐야 한다

 

구멍이 있는 것들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는

구멍이 있다

 

바위의 구멍은

바위의 마음으로 가는 길이다

 

바람 속에도 구멍이 나 있어

호흡이 드나드는 길이 있다

 

물속에도 무수한 구멍이 뚫려 있어

목숨이 흘러가는 길이 보인다

 

구멍있는 것들은 스스로

아프지 않게 쪼개어질 줄 아는 지혜가 있다

 

구멍 있는 모든 것들은

구멍 없는 것들을 참지 못한다

 

목숨이 붙어있지 않은 비닐과 콘크리트를 붙잡고

바람과 물이 부르르 떨고있다

 

목숨 걸고 구멍을 내고 있다

출처, 내영혼의깊은곳

출처 : 휘수(徽隋)의 공간
글쓴이 : 휘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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