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빙/한백양
힘들다는 걸 들켰을 때
고추를 찧는 방망이처럼
눈가의 벌건 자국을 휘두르는 편이다
너무 좋은 옷은 사지 말 것
부모의 당부가 이해될 무렵임에도
나는 부모가 되질 못하고
점집이 된 동네 카페에선
어깨를 굽히고 다니란 말을 듣는다
네 어깨에 누가 앉게 하지 말고
그러나 이미 앉은 사람을
박대할 수 없으니까
한동안 복숭아는 포기할 것
원래 복숭아를 좋아하지 않는다
원래 누구에게 잘하진 못한다
나는 요즘 희망을 앓는다
내일은 국물 요리를 먹을 거고
배가 출렁일 때마다
생각해야 한다는 걸 잊을 거고
옷을 사러 갔다가
옷도 나도
서로에게 어울리지 않는 곳에서
잔뜩 칭찬을 듣는 것
가끔은 진짜로
진짜 칭찬을 듣고 싶다
횡단보도 앞 노인의 짐을 들어주고
쉴 새 없이 말을 속삭일 때마다
내 어깨는 더욱 비좁아져서
부모가 종종 전화를 한다 밥 먹었냐고
밥 먹은 나를 재촉하는 부모에게
부모 없이도 행복하다는 걸 설명하곤 한다
◆당선소감 - “모두에 감사… 지금보다 나은 모습 보일 것”
나는 될 줄 알았다. 그러니 여러분들 또한 될 것이다.
이 문장까지만 쓰고 많은 문장들을 떠올렸다가 지웠다. 대개의 시 쓰기와 다르지 않다. 최선의 문장을 선택했다는 생각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좋은 문장이 있을 거란 망설임. 어쩌면 위 문장이 이미 완결된 것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여러분들 또한 될 것이다’ 그것이 등단이든, 인생의 어떤 성취이든, 혹은 말 그대로 인생을 살아내는 것이든 상관없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해야 할 일은 우리가 어떤 기분이든 우리 앞에 나타나는 법이니까.
그러니 할 일을 하자. 글을 쓰고 삶을 살고, 불행과 행복을 반복하자.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다.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뻤던 것과 달리, 할 일이 있었고, 할 일을 다 마친 다음에는 완만한 기쁨이 남아 있었을 뿐이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이겠지. 어떤 일은 기쁘고, 어떤 일은 슬플 것이다. 그러나 괜찮다. 일들은, 감정은 흐르고 있다. 무엇도 어떤 것도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 다만 희망과 예감을 노 대신 저어가며 우리는 흐름을 견뎌야겠지.
좋은 시를 쓰고 싶다.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싶다. 지금의 나는 이러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번 일을 성과라고 여기고 싶진 않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무척 불안하다. 앞으로 잘 해낼 수 있을까. 내 잘함이 과연 잘한 게 맞을까.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일단은 나아가야 고, 그것이 내게는 시인 것뿐이므로. 그래서 나는 내가 될 줄 알았다. 그러므로 여러분들 또한 될 것이다. 가족과 친지들, 선생님들, 그리고 모자란 내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분들까지. 감사해야 할 분들이 그득하지만 굳이 말하지 않겠다. 그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것은 지금보다 나아진 나여야 할 것이고, 나아가기 위해선 지금을 박차는 힘이 필요하다. 앞으로는 그 힘을 보여주려고 노력하겠다. 모두에게 온전한 감사를 담아, 좋은 시를 쓸 것이다.
한백양: 1986년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개인 교습.
◆심사평 - 안도현·유성호 “일상과 불화·화해하는 아이러니 잘 담아내”
시 부문 예심을 거쳐 올라온 작품들 가운데 잘 조직된 언어적 매무새에 정성을 쏟은 시편들이 호의적으로 다가왔다. 그 과정에서 최종 논의 대상이 된 작품은 김은유씨의 ‘바깥공상’과 한백양씨의 ‘웰빙’이었다. 결과적으로 시상의 완결성과 시인으로서의 가능성을 참작하여 ‘웰빙’을 당선작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바깥공상’은 방 안에서 상상해 보는 바깥의 세상을 얼룩과 이불이라는 소재로써 개성적으로 풀어낸 가편이었다. 민활한 심리적 움직임을 단정한 흐름 속에서 명민하게 포착하고 서술한 면이 돋보였다. 선정하지 못해 끝내 아쉬웠다. ‘웰빙’은 스스로의 일상과 때로 불화하고 때로 화해하는 심리적 교차점을 잘 그려냈다. 존재론적 확장을 희망하는 마음이 선연하게 형상화되었으며, 그러한 희망을 때로 억압하고 때로 포기하지 못하게 하는 현실을 반어적으로 잘 담아냈다. 삶의 아이러니를 긴 호흡으로 구성해 가는 만만찮은 능력을 보여주었다고 생각된다. 웰빙 아닌 웰빙의 조건 속에서 스스로를 성찰하고 좀 더 누군가에게 잘하고 누군가의 짐을 들어주면서 진짜 칭찬을 듣고 싶어하는 희망앓이를 하는 마음이 잘 나타났다. 앞으로도 서정성과 일상성을 잘 결속하여 구체성 있는 삶의 서사를 잘 온축해 갈 것으로 기대된다.
이 밖에도 구체성 있는 필치와 시상을 통해 자신만의 언어를 드러낸 시편들이 많았다. 당선작은 언어 구사의 참신함과 완성도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당선자에게 크나큰 축하의 말씀을 드리고 응모자 여러분께 힘찬 정진을 당부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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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왼편/ 한백양
집의 왼편에는 오래된 빌라가 있다
오랫동안 빌라를 떠나지 못한
가족들이 한 번씩 크게 싸우곤 한다
너는 왜 그래, 나는 그래, 오가는
말의 흔들림이 현관에 쌓일 때마다
나는 불면증을 지형적인 질병으로
그 가족들을 왼손처럼 서투른 것으로
그러나 아직 희망은 있다
집의 왼편에 있는 모든 빌라가
늙은 새처럼 지지배배 떠들면서도
일제히 내 왼쪽 빌라의 편이 되는
어떤 날과 어떤 밤이 많다는 것
내 편은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아직 잠들어 있을 내 편을 생각한다
같은 무게의 불면증을 짊어진 그가
내 가족이고 가끔 소고기를 사준다면
나는 그가 보여준 노력의 편이 되겠지
그러나 왼편에는 오래된 빌라가 있고
오른편에는 오래된 미래가 있으므로
나는 한 번씩 그렇지, 하면서 끄덕인다
부서진 화분에 테이프를 발라두었다고
다시 한 번 싸우는 사람들로부터
따뜻하고 뭉그러진 바람이 밀려든다
밥을 종종 주었던 길고양이가 가끔
빌라에서 밥을 얻어먹는 건 다행이다
고양이도 알고 있는 것이다
제 편이 되어줄 사람들은 싸운 후에도
편이 되어주는 걸 멈추지 않는다
【당선소감】두렵기 때문에 앞으로도 쓰고 또 쓰며 살아갈 것이다
기쁨보다 두려움이 더 크다. 나는 늘 기대를 저버리는 편이었다. 비록 운 좋게 내가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더 좋은 시들이 있었을 것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아꼈지만 빛을 보지 못한 시들이 있다. 심사위원분들의 날카로운 관점과 별도로 응모한 다른 분들의 모든 시 또한 귀하고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는 다만 운이 좋았을 뿐이다. 그러니까 두렵다.
두렵기 때문에 나는 앞으로도 꾸준히 써야 할 것이다. 그다지 좋은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늘 두려워하며 살 것이고, 또 스스로를 경계하며 살아갈 것이다. 감사한 모든 분들…. 가족과 친지들, 그리고 은사님들과 심사위원분들을 호명해야겠으나, 한편으로는 그들의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될까봐 무섭다. 그러지 않으려면 결국은 시를 써야 할 것이다. 어제 그랬던 것처럼, 오늘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나는 시를 쓰면서 살아갈 것이다. 뭔가 좋은 일이 있어도, 나쁜 일이 있어도 마찬가지다. 시를 쓰는 일에 뭔가 의미를 부여하고 싶진 않다. 재주 없는 인간인지라 오랫동안 했던 일을 반복하는 것뿐이다. 그러다 보면 지금처럼 좋은 일들이 올 수도, 또 나쁜 일이 올 수도 있겠지. 뭐 어떤가. 적어도 나는 그러려고 사는 것이다. 그러려고 쓰는 것이다. 딱 하나 욕심이 있다면 한 가지, 다시 한 번 시를 통해 독자분들과 만나고 싶다. 그럴 수 있는 시를 쓰기 위해 앞으로도 노력할 것이다.
한백양/전남 여수시 출생.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심사평】일상적인 장면을 사유화 이미지로 벼리는 솜씨 탁월
전반적으로 올해 신춘문예 투고 편 수가 늘었다는 말이 들린다. 최근 들어 시집 가판대가 부활하고 각급 단위에서 시를 읽고 쓰는 모임이 다시 활성화됐다고도 한다. 물론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시 읽기를 즐기고 시를 쓰는 것에서 어떤 보람을 느끼는 것 역시 노력과 수고를 요청하는 어떤 밀도와 깊이에 기반할 때 좀 더 매혹적으로 삶을 끌어당기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심사위원들은 이번에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의 밀도가 고르지 않다는 것에 공감했다. 대표적으로 세 가지 현상을 꼽을 수 있겠다. 소소한 일상을 담담한 어조로 스케치하는 경쾌함은 있지만 부박함과 구분되지 않는 경우, 그럴듯한 분위기는 조성하고 있지만 알맹이가 없고 장황한 경우, 문장을 만들고 행과 연을 꾸미는기술은 있지만 단 한 줄에도 시적 진술의 맛과 힘이 담기지 않은 경우들이 그것이다.
이런 난맥 가운데서도 심사위원들이 최종적으로 논의한 작품은 네 편이었다. ‘그 이후’의 일부 문장들은 흥미롭게 읽히지만 전체적으로 시가 유기적으로 구성됐다고 판단하기 어려웠다. ‘컨베이어 벨트와 개’는 일상의 고단함속에서 언뜻 발견하는 휴지와 파국을 실감 있게 그려냈지만 전체적으로 묘사에 치중한 소품으로 보인다. 최종 경쟁작 중 하나였던 ‘수몰’은 삶과 죽음, 시와 현실을 얽는 솜씨가 돋보였고 이미지 구사도 견실했지만 주제를 장악하는 사유의 힘이 아쉬웠다. 심사위원들이 ‘왼편’을 당선작으로 결정한 것은 지극히 일상적인 장면을 사유와 이미지의 적절한 결합을 통해 문제적 현장으로 벼리어 내미는 솜씨 때문이었다. 이미지를 통해 핍진하게 전개되는 사려 깊은 성찰이 마지막 대목에서 자연스럽게 공감을 이끌어내고 있는 것도 인상적이다. 더욱이 투고된 다른 시편들도 편차가 적어 신뢰를 더한다. 당선자에게 축하와 격려의 악수를 건넨다.
정호승 시인·조강석 문학평론가(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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