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관련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시치 2022. 8. 1. 18:40

 

[ Also sprach Zarathustra ]

저자출간연도분야
프레드리히 빌헬름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83
철학사상

이 책의 제3부까지가 출간된 것은 1880년대의 전반이지만, 당시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아직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과 근대 휴머니즘의 영광에 신뢰를 보내고 있었던 시기이고, 따라서 신의 죽음이라는 현대의 니힐리즘적 상황을 선구적으로 감지하고 그 극복의 방도를 획기적인 철학적 에세이로서 결실을 본 이 책이 당초에는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무시되었다. 이 책은 일단은 이야기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따라서 이 책의 개요를 서술한다.

제1부 서두의 "짜라투스트라의 서설"은 다음과 같은 글로 시작된다. "짜라투스트라는 30세 때 그의 고향과 고향의 호수를 떠나서 산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그는 그의 정신과 그의 고독을 즐기고, 그 일에 10년 동안 싫증내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드디어 그의 마음은 변했다". 그는 "다시 인간이 되려고 원한 것"이고, 여기서 그의 이른바 "몰락"이 시작된다. 몰락이란 그가 그 고독한 사색생활에 의해서 성숙한 사상을 사람들에게 제공하기 위해서 고독을 떠나서 속세에 내려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최초로 만난 것은 숲 속의 성자이다. 이 성자에게 경의를 표하면서도 결별한 후에 그는 자기의 마음을 향해서 이렇게 말한다. "도대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이 늙은 성자는 자기의 숲 속에 있으면서 신이 죽었다는 것에 관하여 아직 아무것도 듣지 않고 있다". 신의 죽음을 인식한다는 것은 참으로 창조적인 의지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지는 현재 있는 그대로의 인간에 대하여 엄하게 철추를 가하는 행동으로서 나타난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에 대한 짜라투스트라의 사랑의 실상인 것이다.

다음으로 그는 숲 곁에 있는 마을로 들어가서 그 시장에서 다수의 민중을 향하여 한 줄타기꾼의 곡예에 빗대면서 "인간은 초극되어야 할 존재이다"라고 비로소 초인사상을 말한다. 그러나 민중은 그것을 자기자신의 문제로 들어주지 않고 도리어 조소로써 맞는다. 거기서 그는 다음으로 "최후의 인간"을 제시함으로써 역의 방법으로 초인사상의 의의를, 즉 인간의 자기초극의 필요성을 민중에게 납득시키려고 한다. 최후의 인간이란, 현재 있는대로밖에 있을 수 없는 인간, 이제는 어떠한 자기초극의 가능성도 안에 가지고 있지 않는 가장 경멸해야 할 인간이다. 그러나 민중은 그러한 인간이기를 오히려 원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짜라투스트라는 알게 된다.

이 때 줄타기꾼이 곡예사의 성화에 못이겨 추락하는 사건이 돌발한다. 짜라투스트라는 줄타기꾼의 시체를 메고 출발하나 곧 곡예사를 만나 "이 마을에서 떠나라"고 경고를 받는다. 다음으로 마을의 입구에서 묘파는 이로부터 조소를 받지만, 그것에는 답하지 않고 밤길을 더듬어서 곧 동네에서 떨어진 외딴집에 사는 늙은 은둔자를 찾아 빵과 포도주를 얻고서 어느 깊은 숲속에 시체를 파묻고 그리고 곧 잠든다. 그리고 다음날 늦게 잠이 깬 그는 "하나의 새로운 진리"를 알게 된다. 그것은 시장에서 민중을 상대로 말하는 것의 어리석음이라는 진리이고, 그는 이제는 "살아있는 길동무"를, 즉 "함께 창조하는 사람들"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때 한낮의 태양이 정남에 떠있고 그의 머리 위에는 한 마리의 뱀을 지닌 독수리가 광대한 원을 그리면서 공중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독수리와 뱀은 그의 하인이고, 그의 자랑과 현명함을 상징한다. 그의 현명함은 세인과 원활하게 사귀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그의 설교활동을 효과적인 것으로 하기 위한 필수의 덕성이다. 한편 그의 자랑은 그의 실존의 핵심을 이루는 덕성이고, 그런 의미에서 그가 결코 갖지 않을 수 없는 덕성이다. 이 핵심적인 덕성을 에워싸고 그 주변을 가리고 있는 가면의 정신 혹은 의지가, 그의 현명함인 것이다.

대체로 "짜라투스트라의 서설"에서 이와 같은 한 주야에 걸친 사건이 서술되고 있으나, 그것이 끝나면 드디어 "짜라투스트라의 설화"가 시작한다. 22장에 이르는 제1부의 이 설화는 신의 죽음을 배경으로 하는 초인사상을 주제로 하는 것이고, 그의 제자라고 자칭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향해서 행해진다. 그 장소는 "얼룩소라고 불리는 마을"이다. 제노바를 생각케하는 이 마을은 그의 마음에 드는 마을이어서 그의 산중의 동굴에서 걸어서 이틀의 거리에 있다.

제1부의 최종장 "증여하는 덕에 대하여"는 그가 이 마을에 고별을 고할 때, 그의 제자들을 향해서 한 이별의 말이다. "이제야 나는 혼자서 걷는다. 나의 제자여! 너희들도 또한 이제 떠나서 혼자서 가라! 그것이 내가 바라는 바다". "이제 나는 그대들에게, 나를 버리고 스스로를 찾아라, 하고 명한다. 그리고 그대들이 모두 나를 부정했을 때 비로소 나는 그대들의 곁에 돌아 오려고 생각한다". 이리하여 이야기는 제2부로 옮긴다.

그 최초의 장에서 짜라투스트라는 다시 산중으로 돌아오고 이 고독한 자의 몸에 몇 세월이 지나가는 동안에, 그의 지혜는 성장하고 그것의 충실 때문에 그를 괴롭히게 되었으나, 어느날 아침 그는 다시 하산을 결심한다는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다. "나의 적들이 강력해지고 나의 가르침의 초상()이 비틀어졌다. 그래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조차, 내가 그들에게 준 선물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안될 지경이다. 나는 나의 친구들을 잃어버렸다. 나는 내가 잃은 자들을 찾아야 할 때가 온것이다!"

제2부는 22장으로 되어 있고 그 주제는 "권력으로의 의지"라는 사상이다. 이것은 인간의 자기초극을 지향하는 초인사상이 인간존재를 넘어서서 세계원리에까지 확장된 것이다. 그러나 제2부의 전반(무도가() 이후)에 이르면 제3부의 주제인 "같은 것의 영원회귀( )"라는 사상이 점차로 뚜렷하게 암시되고 제3부로 옮겨간다. 제2부의 설교활동은 시실리아 섬들을 생각케 하는 "지복()의 섬들"에서 소수의 제자들을 향해서 행해지는 것이지만, 영원회귀사상은 그의 가장 사랑하는 제자들에게조차, 아니 그 자신에게조차, 부주의하게 털어놓을 수 없는 놀라운 심연의 사상이다. 그가 제2부의 설교활동을 끝내고 또 한번 산중의 동굴에 돌아오려고 할 때, 마지막 장 "가장 조용한 때"의 서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의 몸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나의 친구들이여! 너희들이 보다시피 나는 흐트러지고 재촉을 받아 마지못해 복종하면서 갈 각오를 했다.-아아 너희들로부터 떠나가는 각오를! 그렇다. 다시 한번 짜라투스트라는 그의 고독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곰(불평가의 뜻)은 이번에는 별수 없이 자기의 동굴로 돌아간다!" 이것은 영원회귀사상을 참으로 나의 것으로 하기 위한 고투가 예감되기 때문이다.

제3부는 니체가 "이 책의 근본구상"이라고 부르는 영원회귀사상을 주제로 하여 16장으로 구성되고, 사상적으로도 시적으로도 이 책의 클라이맥스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서 짜라투스트라는 거의 오로지 그 자신에게만 이야기하고 혹은 노래 부른다. 이 제3부의 전반에서 그는 "지복의 섬들"에서 산중의 동굴로의 귀로의 도상에 있다. 서두의 "유랑인"이라는 장에서 아침 일찍 섬 저쪽 편의 정박장에서 배를 타기 위해서 한밤중에 섬등선을 넘어가면서 자기 마음 속을 향해서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이 나타난다.

"나는 한 사람의 유랑인이고 한 사람의 등산자이다". "단지 돌아왔을 뿐이다. 결국은 나 쪽으로 귀향하는 것이다.-나 자신의 자기는 결국 자기에 속하는 것이고, 오래도록 타향에 있고 일체의 사물이나 우연 속에 흩어져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 나의 최후의 산장 앞에 서서 내가 해야할 최후의 최후까지 유보된 것의 앞에 서있는 것이다. 아아, 나의 가장 험한 길을 나는 올라가야 한다! 아아, 나는 나의 가장 고독한 방랑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가 여기서 "최후의 최후까지 유보되어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그의 자기가 본래 있어야 할 곳에까지, 즉 영원회귀사상의 교사()로까지 성숙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 장에서 그는 선상()에 있다. 그가 본 "환영과 수수께끼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형태이지만 선원들을 향하여 여기서 처음으로 영원회귀사상에 대하여 주제적으로 이야기한다. 우선 이 사상이 갖는 니힐리즘을 초극한 경지가 "이것이 생이었던가? 자 다시 한번!"이라고 정식화된 후에 이렇게 말한다. "보라, 이 순간을! 순간이라는 이름의 통용문에서 한줄기의 긴 영원의 오솔길이 뒷쪽으로 뻗어있다". "일체의 제 사물 속에서 달릴 수 있는 것은 벌써 언젠가는 이 오솔길을 달렸음에 틀림없었던 것이 아닌가?" "일체의 제 사상 속에서 달릴 수 있는 것은 이 밖으로 통하는 긴 오솔길도-장래 언젠가는 달림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영원히 회귀하는 것이 틀림없는 것이 아닌가?"

이리하여 "지복의 섬들"에서 4일의 여정()정도 멀어졌을 때에 그는 "뜻에 반하는 지복"이 닥쳐와서 다음으로 "일출 전"이라는 장에서 고독한 혼과 천공과의 아름답고도 심원한 이야기가 서술된다. 그리고 다시 육상으로 올라온 그는 가지가지 우로()를 지나 여러 도시를 통과하면서 최후로 "얼룩소라고 불리는 마을"을 지나서 결국 그의 동굴에 귀향한다.
"오오, 고독이여! 너 나의 고향인 고독이여! 나는 거친 타향에서 거칠게 산다는 것, 너무나도 긴 세월이 지났기 때문에 너의 곁으로 귀향하니 눈물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귀향"이라는 장의 서두의 한 글귀이다.

이하 제3부의 후반은 산중의 고독 속에 있는 그의 최후의 자기초극의 과정이다. 그리하여 "신구()의 제판()에 대하여"라는 30장에 달하는 긴 장에서 이 책의 전설교의 요약이 행해진 후 "회복하고 있는 자"라는 장에서 영원회귀사상에 대하여-그의 하인인 동물들의 말이지만-다시 주제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일체는 가고, 일체는 돌아온다. 존재의 쳇바퀴는 영원히 회전한다. 일체는 사멸하고 일체는 다시 꽃핀다. 존재의 세월은 영원히 지나간다". "일체는 깨지고 일체는 새롭게 접합한다.

존재의 동일한 집은 영원히 스스로를 짓는다. 일체는 헤어지고 일체는 다시 인사를 교환한다. 존재의 원환()은 영원히 스스로에 충실하다". "모든 찰나에 존재는 시작한다. 모든 '여기'를 에워싸고 '저기'의 공은 회전한다. 중심은 도처에 있다. 영원이 밟는 소로는 굽어있다". "이 같은 생, 동일한 생으로, 최대의 것에 있어서도 최소의 것에 있어서도 동일한 생으로 나는 영원히 회전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제3부는 시간의 본질에 관한 "한밤중의 노래", 즉 "오오, 인간이여! 마음이여! 깊은 한밤중에 무엇을 말하는가? <나는 잠자고 있었다. 나는 잠자고 있었다.-깊은 꿈에서 나는 깨어났다.-세계는 깊다. 내가 생각하기보다 깊다. 세계의 고통은 깊다.-쾌락은-마음의 번뇌보다 더 깊다. 고통은 말한다. 지나가라! 고. 그러나 일체의 쾌락은 영원을 바란다.-깊은, 깊은 영원을 바란다!>라는 노래의 여운 속에서 최종 장 "7개의 봉인"(혹은 옳소와 아멘의 노래)을 가지고 끝난다.

제1부의 최종장에서 짜라투스트라는 그의 제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어느 날엔가 너희들은 나의 벗이 되고, 같은 희망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때 나는 재삼 너희들의 곁에 있어서 너희들과 함께 거룩한 정오를 축하하리라 생각한다". "<모든 신들은 죽었다. 이제 우리들은 초인으로 살기를 원한다> 이것이 언젠가 거룩한 정오에 있어 우리들의 최후의 의지이기를!". 이 세번째의 하산은 이 책의 최초의 구상에 있었지만, 제4부에서 끝난 이 책에서는 실현되지 않는다. 제4부는 제3부까지와는 흐름이 다르고 세 번째의 하산에 앞서는 일종의 "간주곡"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제4부는 20장으로 되어 있다. 그 최초의 장 "벌꿀의 공양"의 서두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하여 다시 몇 세월이 짜라투스트라의 혼의 위를 지나갔으나 그는 그것에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그의 머리는 희어져버렸다". 이하, 이 한 장()은 어느 날의 사건이고 다음 장에서 최종 장까지는 그 다음 아침부터 다음다음 아침까지의 꼭 한 주야()에 걸치는 사건이다. 즉 그는 인간이라는 물고기들을 꼬시기 위한 미끼로서 그의 산의 자유라는 꿀을 던진다. 그러자 신의 죽음이라는 현대의 니힐리즘적 상황에 절망한 "고등인간들"이, 이 절망을 초극한 짜라투스트라를 찾아서 그의 산중의 동굴로 올라온다.

그들은 위대한 피로의 예언자, 두 사람의 왕, 정신의 양심적인 자, 마술쟁이, 신이 죽었을 때에 실직한 늙은 교황, 가장 추한 인간, 스스로 걸인이 된 자 및 짜라투스트라의 그림자와 같은 면면들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자기를 그들과 구별하면서도, 그들이 이 대중의 시대에 있어 사는 방법을 모르는 그 고등성() 때문에 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아니 그들은 모두 그의 자기존재의 여러 가능성인 것이고, 따라서 그들의 고민에 있어 그 자신도 어느 정도는 함께 고민하는 것이다. 이 함께 고민한다는 것, 즉 그들에 대한 "동정"을 초극하는 것에 의해서, 그가 그의 최후이고 최고의 성숙을 쟁취하는 것이 제4부에서의 그의 과제이다. 제4부는 다음과 같은 말과 더불어 종결된다.

"<좋다! 이렇게 된 것도-이제야 이루었다! 나의 고뇌와 나의 동정-그것에 무슨 일이 있겠는가! 도대체 내가 뜻하는 바가 행복을 얻는 것인가? 내가 뜻하는 바는 나의 사업을 성취하는 것이다! 좋다! 사자가 왔다. 우리들의 아이들이 가까이 있다. 짜라투스트라는 열이 났다. 나의 때가 왔다.-이것은 나의 아침이다. 나의 대낮이 시작한다. 자아 올라오라. 올라오라. 너 위대한 정오여!>-이렇게 짜라투스트라는 말하고 그의 동굴을 떠났다. 이 자태는 어두운 산속에서 나타나는 아침의 태양처럼 이글거리면서 힘찬 것이었다".

이상이 이야기에 따른 이 책의 대요이다. 그러나 니체가 왜 고대 페르시아의 전설상의 예언자의 이름을 이 책의 주인공의 이름으로서 빌려왔는가. 니체에 의하면 이 고대의 예언자는 도덕적 선악의 창조자이다. 거기서 니체는 그의 주인공에게 "성실함 때문의 도덕의 자기 초극자"라는 의의를 부여하기 위해서 짜라투스트라라는 이름을 빌린 것이다. 즉 니체에 의하면 기독교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세계와 역사에 대한 그 도덕적 해석이고, 그러한 것으로서의 기독교는 종래의 도덕을 대표하지만, 이 기독교적 도덕 그 자체가 인간의 성실함을 고도로 발달시키고, 그리고 이 성실함 때문에 도덕 그 자체가 초극되기에 이르는 것이 그의 이른바 "도덕의 자기 초극"인 것이다.

끝으로 이 책의 근본적인 사상에 대하여 해설하기로 한다. 기독교의 도덕적 가치에 대표되는 초월적 가치가 참다운 실재라고 믿어지고, 그것에 의하여 이제까지 사람들이 질서있는 공동생활을 보내왔으나 그러한 신앙이 점차로 허물어지고 초월적 가치가 실은 허무가 아닌가 하고 사람들이 생각하게 된 결과, 인간의 공동생활이 그 근거를 잃고 현실생활이 본질적으로 권력의지의 싸움의 세계로서의 양상을 갖는 것이 폭로되기에 이른 현대의 위기적 상황, 그것이 니체의 이른바 "신의 죽음"이라는 니힐리즘적 상황이다.

그러한 현대의 니힐리즘적 상황으로부터 도피하지 않고서 도리어 그것을 있는 그대로 확인하려는 그의 유례없는 실존적 성실함에서 나온 사상이 "권력에로의 의지"라는 그의 사상이다. 그의 "초인"사상의 근본적 의의도 인간의 실존적 존재방식을 우리들에게 호소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각자가 자기의 현재의 존재방식을 뛰어넘어서 자기대로의 있어야 할 방식을 실현해 가는 것이 긴요한 것이다, 라고 이 사상은 우리들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라는 그의 사상도 또한 니힐리즘과 그것의 초극이라는 양면을 가지고 있다. 모든 것이 같은 무의미한 것의 되풀이이고 살아있어도 아무런 보람이 없다는 절망이 때때로 우리들의 인생을 위협하지만 그것이 이 사상의 니힐리즘적인 면이다. 한편 인생의 단 하나의 순간일지라도 끝없이 충실하게 산다는 것, 즉 그러한 순간이 영원히 되풀이되는 것을 원하지 않을 수 없을만큼 유의미하게 산다는 것, 그것으로부터 이 순간이 존재하기 위해서 꼭 필요로하는 인생의 기타 모든 견디기 어려운 순간에 관해서도 그것의 영원회귀를 의욕하게 될 때, 이 사상이 포함한 니힐리즘은 극복되고, 이 사상의 운명애적인 긍정적인 면이 여기서 비로소 진정으로 나의 것이 되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 (세계의 사상, 2002. 5. 20., 고영복, 사문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