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이서화 시 모음(9편)

시치 2021. 4. 21. 14:33

 

 

서 있는 것은 무겁지 않다/이서화

 

 

모든 것들은
서 있는 무게와 누워 있는 무게가 다르다
서 있는 무게들의 흔들리는 힘은
누우면 감당의 힘이 된다


서 있는 철근은 건물을 지탱하는 힘
자잘한 흔들림을 견디는 힘


그렇다면 세상의 집은
그 철근의 힘에 기대고 있는지
혹은 감당하고 있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지구에 서 있는 나무들의 무게를 잴 수 없지만

벌목된 나무들을 실어 나르는 트럭을 재면

세상의 이동하는 무게들을 잴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서서 걸어 다니면서
자신의 무게를 소진하고 간다
그런 한 사람이 죽고 몇 명의 장정들이 들어야 하는
저 무게는 사람이 사람을 버린 무게
그 어떤 미련도 없는 무게다


흔들림이란
지탱하려는 중심이다


서 있을 때 가족을 끌고 가지만
누우면 가족의 처지에 끌려가는 무게
흔들면, 흔들리는 가벼운 무게들이란
모두 서 있는 것들이다

 

 

황태 날다/이서화

 

 

 

아가미를 벌리고 큰 추위들이

황태 덕장으로 실려와

겨울을 지날 때까지 온몸이 노릇하게 말라간다

내장을 비운 배 속엔 한파 특보가 가득 들어있다

추위를 먹고도 한 철을 날 수 있다는 경지

틈만 나면 뜨끈한 국물을 속에 넣기 바쁘고

그것도 모자라 한증막 열기에 몸 바깥을 데우는 사람들

크게 입 벌리고 이 겨울,

추위란 추위 모두 먹어버리겠다는

어느 지경에 이르러서 온몸 비린내 다 버리고

옅은 금빛 황태가 되겠다는 작심이 꾸덕꾸덕하다

 

깊은 산속을 찾아가던 바람과

준령을 넘어온 푸른 파도 소리가 맛으로 드는 황태

일렬종대의 덕장 사이로 지나가는 골바람, 차가운 햇빛

어느 투박한 뚝배기를 만나

쓰린 속 풀어줄 한 그릇 맛 보시報施가 녹았다 얼었다 한다

 

밤사이 또 눈이 내리고

아가미 가득 푸른 허공을 물고 눈을 부릅뜨고 있다

누군들 저 푸른 허공 한 그릇 배 속에 넣고

시원하게 속 풀어지지 않겠는가

 

겨울 내내 눈 한번 감지 않는 황태

더 이상 꼬리로는 살지 않겠다는 듯

말라비틀어진 후미 쪽으로 똑똑 물방울들이 떨어지고 있다

하늘을 향해 입 벌리고

겨울 햇살 쪽으로 온몸 뒤틀며 날아오르고 있다

 

/이서화

 

 

오대산 염불암 너와집에서
잘 마른 탑을 만났다
탑은 깊은 우물을 끓이는 중이었다
한두 그루쯤 나무를 베고 쪼개고
가지런히 우물 井으로 쌓아 놓은
저 장작더미는 얼마나 따듯한 탑인가


속세의 아랫목이란 모두
탑이 있던 장소가 아닐까
염불암, 당간지주도 기와 불사도 버리고
속세의 누추한 지붕과 아랫복 빌려와
기우는 만행(蠻行)이 비로소
만행(卍行)에 이르러 있다


높은 곳으로의 탑의 영험을 친다면
저 장작 탑에서 뿜어져 나온 저 연기란
또 얼마나 높은 탑인가
우물 井으로 쌓은 저 탑으로
우물 끓이고 공양을 끓인다


한곳에 오래 정좌하고 있으면 모두 탑을 닮아간다
새벽에 탑이 느릿하게 일어나서
이부자리를 개고 또 한참 동안 탑이 되었다가
몇백 년이 흐른 다음
느린 걸음걸이로 부엌으로 나가
손등에 물 맞춘 밥을 지을 것이다
산골짜기 방 한 칸 덥히는 일은
탑 하나 허무는 일이라는 듯

 

 

 

둥근 방/이서화

 

   

양파는 늦가을부터 초여름까지

여러 겹 나이를 한꺼번에 먹는다

알뿌리들은 뿌리를 묶고

줄기로 바람을 불어넣는다

 

겨울 동안 온갖 바람을 다 들여놓고

부풀어진다고 생각했었다

양파를 까고 칼로 반을 자른 양파 속에는

눈물을 쏙 빼게 하는 질책이 들어있다

눈물을 직감하는 일들처럼

어떤 양파 앞에서는 저렇게 여러 겹으로

웅크린 채 울어본 적이 있다

그런데도 내가 둥글어지지 못한 이유는

매듭지을 뿌리도 바람을 불어넣을

긴 싹이 없었기 때문이다

겉부터 속까지

여기저기 울긋불긋 마음 쓸 겨를이 없다

그냥 사납게 매워지자고

웅크리고 울었던 기억밖에 없다

 

울지 않아야 둥글어진다

 

 

 

스위치백/이서화

 

   

대부분의 간이역들은

덜컹거리는 잠 속에 있다

 

심포리역을 지나며 안내방송을 듣는다.

‘잠시 후 스위치백 구간입니다 4분정도 소요될 예정입니다’

통리 협곡을 지나 흥전역과 나한정역 사이

누구나 지나온 길과 조우할 수 있는 구간이 있다

 

잠에서 깬 몇몇의 승객들 어리둥절한 풍경

차창 밖엔 성의 없이 다가온 가을과

잠결에 놓친 과거가 구불구불 나타나고 길이 되감기고 있다

무슨 재주로 지나 온 길의 뒤편으로 갈 수 있나

지나왔던 시간만큼

뒤로 가는 시간도 구불거린다

 

시간을 끌고 열차는 다시 순방향으로 달린다.

두고 온 어느 즈음에 탄력의 힘이 있다는 것

그 놓친 힘을 다시 찾을 수 있다는 희망 같은 것이 있는

알파벳 Z자 모양으로 올라가거나 내려가는

스위치백 구간

기차가 지나가면 시간은 다시 닫히고 만다.

 

덜컹거리는 잠에 빠져 있던 차창 밖에 있는 전생을

잠 깨서 신기한 듯 바라본다

접어 두었던 날들을 펴면

저 언덕 쉬지 않고 올라가려고만 했었다

 

꽃은 아래쪽에서 위로 피고

저 위에서부터 후진으로 내려오는 단풍

오르내림의 발원이 곧 지금이겠지

 

지상에서 숨을 고른 후

다시 꽃의 계절로 올라갈 계절이 붉다

 

흔들리는 균형

물지게를 기억하시는지

아무리 가득 담아도 출렁출렁 흘리던 걸음

균형 하나가 제대로 잡히기까지

온전한 물통 속의 물은 손실이 크다

그래서 더욱 가득 담아졌던 물

미리 흘릴 균형까지 고려하고 담았었다

담긴 양이 제각각 달라도

물통에 남아 있던 물은 늘 같은 양이었던가

균형은 어깨와 발걸음의

출렁거림이 아니라

물통의 그 수위에 있었다는 것

그러니까, 그때

나의 균형은 다 흘러넘쳤다

빈 것들의 속내일수록 휘청거리기 쉽다

더 이상 흘려버릴 균형추가 없는

나이가 될수록 균형을 지키는 것이 어렵다

가령, 팔이 자꾸 안으로 굽는 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다툼 사이에서

균형은 또 그때처럼 흘러넘친다

봄, 바람이 출렁거리며 넘친 벚나무는 이미 바닥이 났고

평행을 유지하던 몸,

출렁거리던 옛 기억들도 감흥이 없다

그때, 오래도록 물이 다 새어나간

어깨가 살처럼 아프다

 

부론강

올여름 돌들이 굴러왔고

지난여름의 돌들은 다시 굴러갔다

지구의 돌들을 옮기는 강

돌은 크거나 작거나 자신의 무게가 있고

물은 원래의 수위로

넘쳤던 물을 또 불러들인다

한껏 줄어든 물로

물줄기만 이으려 한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것이 있다면

그건 물일 것이다

합수머리, 수목한계선까지 밀고 올라가는

침엽수들이 호수같이 푸르다

강 옆에 사는 사람들의 말에는

모르는 라디오 주파수처럼 가을에는 지지직거리다

강은 난청을 이으며

돌 밑으로 숨는다고 한다

숨어서 지느러미 흉내를 낸다고 한다

덩달아 물고기의 지느러미들이 부풀고

눈꺼풀은 두꺼워진다

여름이 필요한 사람들은

무심한 듯

강의 여울목으로 나가

한껏 가늘어진 물소리를

수제비처럼 뚝뚝 끊어서 끓이고 있다

 

 

엉겅퀴

엉겅퀴는 자꾸

숨으려는 색깔 같다

매 맞은 일을 자꾸

잊어버리려는 색깔 같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아득한 가랑이 속 운세를 떼던 여자의 눈두덩 색깔 같다

삼거리 지나 세 번째 파란 슬레이트집 여자, 엉겅퀴 한입 가득 물었다 아무도 모르게 뱉고 작은 시멘트 다리 건너기 전 기역자집 남자, 욕설 반 푸념 반 섞어 보란 듯이 뱉어내던 그 엉겅퀴

마을 사람 중엔

보라색으로 물든 이빨들이 많았다

엉겅퀴는 자신을 몰라서 모르고

집집들은 짓이겨진 보라색 속으로 숨고

입안에 가시들이 자라고

엉겅퀴는 마을의 집을 빠져나와

흔들리는 풀숲,

바람을 옮겨 다니며 욕설처럼 핀다

비로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글귀를 읽을 때마다
반드시 도달해야 할 그 어떤 곳이 있을 것 같다

그 비로소는 어떤 곳이며 어느 정도의 거리인가

비로소까지 도달하려면

어떤 일과 현상, 말미암을 지나고

또 오랜 기다림 끝에 도착할 것인가

팽팽하게 당겨졌던 고무줄이

저의 한계를 놓아버린 그곳

싱거운 개울이 기어이 만나고야 마는

짠물의 그 어리둥절한 곳일까

비로소는 지도도 없고

물어물어 갈 수도 없는 그런 방향 같은 곳일까

우리는 흘러가는 중이어서

알고 보면 모두 비로소,

그곳 비로소에 이미 와 있거나

무심히 지나쳤던 봄꽃,

그 봄꽃이 자라 한 알의 사과 속 벌레가 되고

풀숲에 버린 한 알의 사과는 아니었을까

비로소 사람을 거치거나

사람을 잃거나 했던

그 비로소를 만날 때마다 들었던

아득함의 위안을

또 떠올리는 것이다

벌레가 살아서 내게 기어 온다

 

이서화 시인 약력

 

2008년『시로여는세상』으로 등단

시집『굴절을 읽다』『낮달이 허락도 없이』

기행시집『밍글라바 미얀마『나자르 본주』공저.

2019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창작지원금 수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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