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낭인(浪人)을 위하여 (외 2편)/이관묵
버즘나무는
근처에 버스 정류장을 데리고 삽니다
이발소도 키웁니다
무허가 복덕방도 심었습니다
이제 보니 버즘나무의 둥근 둘레와 높이가 훌쩍 자란 것이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노래 속에 넣어 둔 노래
절반은 가슴이고 절반은 등뿐인 서로
윤곽이 다른 걱정
입구와 출구가 바뀐 이별
사람 끝에서 캔 사람
버즘나무는
저 혼자 버즘나무가 된 게 아니었습니다
버즘나무 아래서 세계는 자애롭고
버즘나무가 버즘나무로 충분해질 무렵,
나는 무애(無碍)와 환절(換節)과 연(緣)이라는 말들이 멀리 내다보이는 곳에서 한 철을 노숙했습니다
반지하
갓 여남은 살이나 되었을까 사내아이가 반지하 단간 방 찬 바닥에 새우처럼 구부리고 잠을 잔다, 며칠 전 병원으로 실려 간 할머니의 잠을 둘둘 말아 개 놓고 오늘은 할머니가 입던 시간도 깨끗이 빨아 널었다. 연탄아궁이 앞 엎어진 운동화 한 짝은 모든 길이 공중에 나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지상의 물음에 지하의 묵묵부답이 깊어지는 세계. 절반은 낮이고 나머지 절반은 늘 끌고 다닌다. 오늘도 그 절반을 데리고 멀리 방파제 가서 한참을 앉았다 왔다.
우편번호
자연산 생활 한 박스만 보내다오
감잎 붉게 물드는 속도를
고서의 너덜너덜한 페이지 넘기는 소리를
재고로 쌓아 둔 불면을
어두운 낙서가 내다뵈는 창문을
폐교 벽에 아직도 재직 중인 ‘정숙’을
곁에 두고 싶은 망각(望角)을
풀 뽑다 실수로 사람 뽑은 손을
목요일도 기억 못하는 목요일을
늦은 도착을
늙음의 주소 앞에 세워다오
쉽게 찾아올 수 있도록
정장 차림으로
차렷 자세로
⸺시집 『반지하』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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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묵 / 1947년 충남 공주 출생. 197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수몰지구』 『변형의 바람』 『저녁비를 만나거든』 『가랑잎 경』 『시간의 사육』 『동백에 투숙하다』 『반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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