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최승자, 여섯 편의 시

시치 2021. 3. 28. 02:02

 

박진성추천 0조회 27121.02.08 17:22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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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글 본문내용




개 같은 가을이

최승자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 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폐수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최승자, 시집 『이 時代의 사랑』(1981) 중.

__________


20년 후에, 지(芝)에게 

최승자

지금 네 눈빛이 닿으면 유리창은 숨을 쉰다.
지금 네가 그린 파란 물고기는 하늘 물속에서 뛰놀고
풀밭에선 네 작은 종아리가 바람에 날아다니고,

이상하지,
살아 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
빈 벌판에서 차갑고도 따스한 비를 맞고 있는 것 같지.
눈만 뜨면 신기로운 것들이
네 눈의 수정체 속으로 헤엄쳐 들어오고
때로 너는 두 팔 벌려, 환한 빗물을 받으며 미소 짓고······
이윽고 어느 날 너는 새로운 눈(眼)을 달고
세상으로 출근하리라.

많은 사람들을 너는 만날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네 눈물의 외줄기 길을 타고 떠나가리라.
강물은 흘러가 다시 돌아오지 않고
너는 네 스스로 강을 이뤄 흘러가야만 한다.

그러나 나의 몫은 이제 깊이깊이 가라앉는 일. 봐라,
저 많은 세월의 개떼들이 나를 향해 몰려오잖니,
흰 이빨과 흰 꼬리를 치켜들고
푸른 파도를 타고 달려오잖니.
물려 죽지 않기 위해, 하지만 끝내 물려 죽으면서,
나는 깊이깊이 추락해야 해.
발바닥부터 서서히 꺼져 들어가며, 참으로
연극적으로 죽어가는 게 실은 나의 사랑인 까닭에.

그리하여 21세기의 어느 하오,
거리에 비 내리듯
내 무덤에 술 내리고
나는 알지

어느 알지 못할 꿈의 어귀에서
잠시 울고 서 있을 네 모습을,
이윽고 네가 찾아 헤맬 모든 길들을,
- 가다가 아름답고 슬픈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의 동냥바가지에 너의 소중한 은화 한 닢도
기쁘게 던져 주며
마침내 네가 이르게 될 모든 끝의

시작을!

- 최승자, 시집 <즐거운 일기>(1984) 수록

________


내게 새를 가르쳐 주시겠어요 

최승자

내게 새를 가르쳐 주시겠어요?
그러면 내 심장 속 새집의 열쇠를 빌려드릴게요.

내 몸을 맑은 시냇물 줄기로 휘감아 주시겠어요?
그러면 난 당신 몸 속을 작은 조약돌로 굴러다닐게요.

내 텃밭에 심을 푸른 씨앗이 되어 주시겠어요?
그러면 난 당신 창가로 기어올라 빨간 깨꽃으로
까꿍! 피어날게요.

엄하지만 다정한 내 아빠가 되어 주시겠어요?
그러면 난 너그럽고 순한 당신의 엄마가 되어드릴게요.

오늘 밤 내게 단 한 번의 깊은 입맞춤을 주시겠어요?
그러면 내일 아침에 예쁜 아이를 낳아드릴게요.

그리고 어느 저녁 늦은 햇빛에 실려
내가 이 세상을 떠나갈 때에,
저무는 산 그림자보다 기인 눈빛으로
잠시만 나를 바래다주시겠어요?
그러면 난 뭇별들 사이에 그윽한 눈동자로 누워
밤마다 당신을 지켜봐드릴게요.

- 최승자, 시집 『즐거운 일기』(1984년) 중.

_________

일찌기 나는

최승자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198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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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를 위하여

최승자


너는 날 버렸지,
이젠 헤어지자고
너는 날 버렸지,
산 속에서 바닷가에서
나는 날 버렸지

수술대 위에 다리를 벌리고 누웠을 때
시멘트 지붕을 뚫고 하늘이 보이고
날아가는 새들의 폐벽에 가득찬 공기도 보였어

하나 둘 셋 넷 다섯도 못 넘기고
지붕도 하늘도 새도 보이잖고
그러나 난 죽으면서 보았어
나와 내 아이가 이 도시의 시궁창 속으로 시궁창 속으로
세월의 자궁 속으로 한없이 흘러가던 것을
그때부터야
나는 이 지상에 한 무덤으로 누워 하늘을 바라고
나의 아이는 하늘을 날아다닌다
올챙이꼬리 같은 지느러미를 달고
나쁜놈, 난 널 죽여 버리고 말 거야

널 내속에서 다시 낳고야 말거야
내 아이는 드센 바람에 불려 지상에 떨어지면
내 무덤 속에서 몇 달간 따스하게 지내다
또다시 떠나가지 저 차가운 하늘 바다로,
올챙이꼬리 같은 지느러미를 달고
오 개새끼
못 잊어!


_____________
삼십세

최승자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내 꿈은 말이야, 위장에서 암 세포가 싹트고
장가가는 거야, 간장에서 독이 반짝 눈뜬다.
두 눈구멍에 죽음의 붉은 신호등이 켜지고
피는 젤리 손톱은 톱밥 머리칼은 철사
끝없는 광물질의 안개를 뚫고
몸뚱어리 없는 그림자가 나아가고
이제 새로 꿀 꿈이 없는 새들은
추억의 골고다로 날아가 뼈를 묻고
흰 손수건이 떨어뜨려지고
부릅뜬 흰자위가 감긴다.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우리 철판깔았네

___________


https://youtu.be/nQ4IrZtdmW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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