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산 수타사로 물미나리나 보러 갈까 패랭이꽃 보러 갈까 구죽죽 비는 오시는 날 수타사 요사채 아랫목으로 젖은 발 말리러 갈까 들창 너머 먼 산이나 종일 보러 갈까 오늘도 어제도 그제도 비 오시는 날 늘어진 물푸레 곁에서 함박꽃이나 한참 보다가 늙은 부처님께 절도 두어 자리 해바치고 심심하면 그래도 심심하면 없는 작은 며느리라도 불러 민화투나 칠까 수타사 공양주한테, 네기럴 누룽지나 한 덩어리 얻어먹으러 갈까 긴 긴 장마
- 김사인,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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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김사인
귓속이 늘 궁금했다.
그 속에는 달팽이가 하나씩 산다고 들었다. 바깥 기척에 허기진 그가 저 쓸쓸한 길을 냈을 것이다. 길 끝에 입을 대고 근근이 당도하는 소리 몇낱으로 목을 축였을 것이다. 달팽이가 아니라 도적굴로 붙들려간 옛적 누이거나 평생 앞 못 보던 외조부의 골방이라고도 하지만, 부끄러운 저 구멍 너머에서는 누구건 달팽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 안에서 달팽이는 천년쯤을 기약하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고 한다. 귀가 죽고 귓속을 궁금해할 그 누구조차 사라진 뒤에도 길이 무너지고 모든 소리와 갈증이 다한 뒤에도 한없이 느린 배밀이로 오래오래 간다는 것이다. 망해버린 왕국의 표장(標章)처럼 네개의 뿔을 고독하게 치켜들고 더듬더듬 먼 길을.
시집 『어린 당나귀 곁에서』 (2015년)
* “귓속이 늘 궁금했다.” 눈은 감을 수 있지만 귀는 감을 수 없다. 잠이 찾아오면 눈은 스르르 감기지만, 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에도 귀는 활짝 열려 있다. 그러니까 내 의식에 닿지 않은 말과 온갖 소리들이 귀에는 닿았다. 잠든 사람 앞에서라면 어떤 고백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잠든 사람 앞에서라야 어떤 비밀은 꽁꽁 묶어두었던 보자기를 살며시 풀어볼 것이다. 잠든 사람의 숨결을 느끼며 하는 말은 혼자 하는 말과 어떻게 다른가. 잠든 사람의 귓속에 공기분자의 파동을 일으키는 말은 혼잣말보다 덜 외로울까. 그것은 대화일까, 독백일까. 언젠가 잠든 당신을 향해 나는 한참 말을 건네고 있었다. 내가 잠든 후에야 꺼낼 수 있는 말이 당신에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귓속이 궁금한 것은 그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마음이 궁금한 것이다. (김행숙)
* 시의 기울기는 ‘그리고’, ‘그런데’, ‘그러나’ 같은 접속어에 의해 만들어져요. ‘그리고’는 너무 밋밋하고 ‘그러나’는 너무 가팔라요. 이상적인 각도는 ‘그런데’가 아닐까 해요. ‘그런데’는 벨트의 운동 방향을 무리 없이 바꿔주는 톱니바퀴 역할을 해요.
- 이성복 시론, 『무한화서』중.
* 이 시는 아마도 ‘달팽이관’이라는 말에서 시작한 것 같습니다. 달팽이관이라는 말에서 자연스럽게 귀를 연상하고 그 연상에서 더 나아가 존재의 어떤 비밀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 시로 보입니다. 이 시의 묘미는 3연에 있다고 봐야할 텐데, 가령, “귀가 죽고/ 귓속을 궁금해할 그 누구조차 사라진 뒤에도/ 길이 무너지고/ 모든 소리와 갈증이 다한 뒤에도/ 한없이 느린 배밀이로/ 오래오래 간다는 것이다.”라고 말할 때, 이 시는 단순히 “달팽이”와 “귀” 이야기에서 우리의 존재론으로 번지고 있는 느낌입니다. 하나의 존재가 사라졌다고 해도 그 존재의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겠지요. “모든 소리와 갈증이 다한 뒤에도” 남는 어떤 것에까지 확장되면서 이 시는 단순한 묘사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사라진 후에 우리를 증명하는 그 어떤 것 위에서 달팽이는 계속 기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이 시는 말하는 듯합니다. “더듬더듬/ 먼 길을.”, 안 보이는 그 길을 지금도 계속 가고 있는 달팽이. 귀와 달팽이의 유사성으로 시작한 시가 ‘그런데’ 이후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더 멀고 더 깊은 길을 열심히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후가 어쩌면 시에서 시 쓰는 사람이 정말 공들여야 하는 부분이겠지요. (박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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虛空藏經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학교를 중퇴한 뒤 권투선수가 되고 싶었으나 공사판 막일꾼이 되었다 결혼을 하자 더욱 어려워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었다 떨어 먹고 도로 서울로 와 다시 공사판 급성신부전이라 했다 삼남매 장학적금을 해약하고 두 달 밀린 외상 쌀값 뒤로 무허가 철거장이 날아왔다 산으로 가 목장을 맸다 내려앉을 땅은 없어 재 한 줌으로 다시 허공에 뿌려졌다 나이 마흔둘.
-김사인,『현대시학』 2006년 3월.
* 시는 말하는 게 아니라, 말을 숨기는 거예요. 혹은 숨김으로써 말하는 거예요. 슬픔을 감추는 것이 슬픔이에요. 슬픔에게 복수하려면, 슬픔이 왔을 때 태연히 시치미를 떼야 해요. 그것이 시예요. (이성복)
* “시의 언어는 경제적이어야 한다”라는 단순한 명제를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언어의 운용을 통해 한 사람의 일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한 사람'은 말할 나위 없이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가난하고, 낮고, 힘 없는 사람들의 초상이겠습니다. 수식어를 허용하지 않고 있는 시인의 수사는 그 삶에 서투른 연민이나 동정을 개입시키지 않으려는 시인의 적극적 의지로 보입니다. 이 시는 한 개인의 삶을 적극적으로 껴안으면서 시대의 환부를 아프게 찌르는, 이를테면 시로 쓴 시론인 셈이겠습니다. (박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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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
몸이 있으나 몸을 부려둘 공간이 없다 그들에게는 소비할 공간이 없다 먹고 죽을 공간도 없다 그러니 어떻게 발을 두나 머리를 두나 먹을 입과 담아둘 위장과 배설할 항문을 어디에 두나 똥은 또 어디에 내려놓나 모든 가능 공간을 몰수당했으므로 그들은 존재할 수 없음 그러므로 그들의 시간도 꽃필 수 없음 나프탈린처럼 또는 유령처럼 생으로 졸아들다가 증발한다 그러나 그들의 시간도 튀긴 구정물처럼 길가 담벼락이나 애꿎은 바지자락 같은 곳에 묻어 오갈들 뿐 그 떳떳하던 공간들을 다 먹어치운 것인가 소문처럼 그 착한 공간들을 어디에 똥 눠 치운 것인가 마이너스 공간에서 반(反) 물질을 소비하며 그들은 있다 아닌 공간의 그들을 인 공간에서 보면 없다, 떼먹은 공간을 변제하고 그들은 없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현재는 오직 게워냄에 있다 제 안을 밖으로 뒤집는 데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게운다 제 목구멍을 제 내장을 제 항문을 항문 바깥의 우수마발(牛溲馬勃) 장삼이사 돗깃갯긴을 피눈물을 마지막으로 게우는 제 입까지를 게운다 구강에서 항문까지 속통의 안팎이 홀딱 뒤집힌 채 그들은 있다, 있음인 체해본다 한사코 그들은 완성이자 죽음인 블랙홀이다 모든 공간은 몰수되고
우리는 그들의 내장 위에 붙어 있다 우리는 그들이 게워낸 공간 위에 다시 게워져 있다 우리는 그들의 항문을 지나 그 다음에 있다
- 김사인,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중.
* 노숙자에 대한 아프고 고통스런 긴 서술의 끝에서 그들과 우리의 관계가 재설정된다. 그들은 “모든 가능 공간을 몰수당했으므로” 존재할 수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있으므로 모든 떳떳하고 싱싱하고 착한 공간들을 다 먹어치웠다. 그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곳이 반(反) 공간임을 말해준다. 그들이 없어야 할 곳에 있다면 우리도 그렇다. 우리는 반공간의 반공간에 있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그들의 내장 위에 붙어 있고, 그들이 게운 공간에 다시 게워져 있으며, 그들의 항문을 지나 그들이 똥 눠버린 공간에 있다. 마지막 연의 충격적인 진술은 그들로 인해 우리에게 반성적인 공간이 마련되었다는 뜻이다. 그들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진정한 위치를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설정해둔 경계와 공간, 지위를 차지한다. 대상인 그들이 주체인 “우리”의 정체성을 설정해주는 것이다.
- 권혁웅, 『시론』(문학동네, 2010)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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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짝 붙어서다
굽은 허리가 신문지를 모으고 상자를 접어 묶는다. 몸뻬는 졸아든 팔순을 담기에 많이 헐겁다. 승용차가 골목 안으로 들어오자 벽에 바짝 붙어 선다 유일한 혈육인 양 작은 밀차를 꼭 잡고.
고독한 바짝 붙어서기 더러운 시멘트 벽에 거미처럼 수조 바닥의 늙은 가오리처럼 회색 벽에 낮고 낮은 저 바짝 붙어서기
차가 지나고 나면 구겨졌던 종이같이 할머니는 천천히 다시 펴진다. 밀차의 바퀴 두 개가 어린 염소처럼 발꿈치를 졸졸 따라간다.
늦은 밤 그 방에 켜질 헌 삼성 테레비를 생각하면 기운 싱크대와 냄비들 그 앞에 선 굽은 허리를 생각하면 목이 멘다 방 한구석 힘주어 꼭 짜놓았을 걸레를 생각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