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외 1편)/김행숙
내 기억이 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그래서 나는 무엇인가
사람처럼 내 기억이 내 팔을 늘리며 질질 끌고 다녔다, 빠른 걸음으로 나를 잡아당겼다, 촛불이 바람벽에다 키우는 그림자처럼 기시감이 무섭게 너울거렸다
사람보다 더 큰 사람그림자, 아카시아나무보다 더 큰 아카시아나무그림자
그러나 처음 보는 노인인데…… 힘이 세군, 내 기억이 벌써 노인을 만들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생각을 하는 누군가가 나를 돌보고 있었다
기억이 나를 앞지르기 시작했
마지막 여관
조금 전에 키를 반납하고 떠나는 손님을 봤는데 분명히, 당신은 그 손님과 짧은 작별인사까지 나눴는데
당신은 빈방이 없다고 말합니다. 오늘은 더 이상 빈방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말은 이상하게 들립니다. 당신은 기껏해야 작은 여관의 문지기일 뿐인데, 세계의 주인장처럼 당신의 말은 몇 겹의 메아리를 두르고 파문처럼 퍼져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동심원 가운데 서 있으면 나도 나를 쫓아낼 것 같습니다. 그러면 한겨울 산속에서 길을 잃은 나무꾼 이야기 같은 게 자꾸 생각나고,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인데, 왜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자랐을까? 왜 그런 이야기만 기억날까? 왜 그런 이야기에 도시빈민 출신의 내가 나오는 것일까?
깊은 산속에서 나는 간신히 여관 하나를 찾아냈습니다. 여관도 쓰러질 것 같고, 나도 쓰러질 것 같지만, 이런 산속에 여관이 있다니, 세상에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감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여관은 귀신의 집이었습니다. 산 사람은 손님이 될 수 없다고 합니다. 나는 숨을 쉬지 않고도 말할 수 있어요. 실로 나는 산 사람이 아니요, 유령 같은 존재올시다.
죽은 사람 흉내 내는 것들은 이제 아주 지긋지긋하다고 당신이 치를 떨었습니다. 당신의 말은 이상하게 들립니다. 두 번 다시 시체 따위 치우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내가 잠들면 죽게 돼 있다고 마치 당신은 나의 운명을 일러주는 것 같았습니다.
잠만 자겠습니다. 나는 시퍼런 입술을 벌렸지만, 내게도 얼음 같은 내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시집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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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행숙 /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나 199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사춘기』 『이별의 능력』 『타인의 의미』 『에코의 초상』 『1914년』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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