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김희준 시 보기(8편)

시치 2020. 12. 27. 14:55

 

 

제페토의 숲  (7)/김희준

 

 


거짓일까 바다가 격자무늬라는 말 ,

 

고래의 내장에서 발견된 언어가 촘촘했다 아침을 발명한 목수는 창세기가 되었다 나무의 살을 살라 말을 배웠다

 

톱질 된 태양이 오전으로 걸어왔다

 

가지 마 나무가 되기 알맞은 날이다 움이 돋아나는 팔꿈치를 가진 인종은 초록을 가꾸는 일에 오늘을 허비했다 숲에는 짐승 한 마리 살지 않았다 산새가 궤도를 그리며 날았다

 

지상의 버뮤다는 어디일까

숲에서 나무의 언어를 체득한다

 

목수는 톱질에 능했다 떡갈나무가 소리 지를 때 다른 계절이 숲으로 숨어들었다 떡갈나무 입장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목수는 살목범 (殺木犯 )이었으므로

 

진짜일까 피노키오 피노키오 떡갈나무 피노키오 개구쟁이 피노키오 피노키오 피노키오 귀뚜라미 떡갈나무 요정은 피노키오를 도와주지요 삐걱삐걱삑삑삐걱삐걱삑삑삐걱삐걱삑삑 삐걱삐걱삑삑 개구쟁이 피노키오 나무인형 피노키오 피노키오 피노키오

 

숲으로 가게 해주세요

 

나무는 물기가 없었다 바람은 간지러운 휘파람이 되었다 빽빽하게 그린 나무의 결이 달랐다 동급생 사이에 전염된 그림 면역체계를 찾으려면 격자무늬를 수혈 받아야 한다

 

소리를 가져간 피노키오 숨이 언어인 피노키오 참말 하는 피노키오 떡갈나무 피노키오 삐걱삐걱 피노키오 진짜일까 피노키오 나무인형 피노키오

 

모든 책이 은밀해졌을 때 나는 쫓겨났다

저 너머를 건너는 거짓말이 길어졌다

 

피노키오가 인간을 키운다 다각형 몸이 심해에 잠긴다 고래가 뒤척일 때 인간은 나무가 되었다 나무는 나를 읽어낸다

 

해체된 태양이 떠오르는 남쪽에서부터 창세기가 시작되고

나는 제자리걸음을 한다

 

사라진 숲의 버뮤다에 새들이 궤도를 바꿔 날았다

 

 

 

 

구름 포비아에 감염된 태양과 잠들지 않는 티볼리공원 그러나 하나 빼고 완벽한 목마

 

 

 

여름이 오기 전에 헤어져

 

목마를 길들이는 일에 한 계절이 지났다 서커스단이 훔쳐 간 태양이 안데르센 천막으로 팔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공중으로 산란하는 바람 ,

 

초원을 달리는 소년과 태엽에 감긴 소년은 어디로 갔을까

 

바람개비가 예보 없이 쏟아진다 찢긴 구름은 흰 목마가 된다 여름의 단면에서 쑥독새가 태어난다

 

오르골을 열면 구름을 타고 날아오르는 소년 관람차에선 낡고 경쾌한 방식으로 말이 달리고

 

높은 곳을 무서워하는 새에겐 긴 막대를 줘야지

 

프로펠러 프로펠러 쑥독새가 말을 배우는 곳에서 소년이 알을 품는다 목마를 포란하는 밤이 스스로 회전한다

 

소년은 밤의 활동을 해독하는 사람 ,

여름이 지나간 방향으로 분실된 천문학이 기록된다

 

거꾸로 돌리는 거야 ,

 

계절의 안쪽에서 소년은 소년이 된다

 

안부를 물을 수 없다 그리하여 구름이 고장 난 나침반과 떠났다는 말은 믿지 않기로 한다

 

소년이 회전목마를 탄다

어지럽지 않니 ?

 

음각된 정오가 구석에서 파기된다 이미 그해 여름이 지났다는 소문을 들었다

 

한 차례 바람개비가 내린다

 

바람의 태엽을 달고 태어난 목마가 초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생경한 얼굴  

 

 

   따라와 바다를 지나면 골목이 나올 거야 왼쪽으로 돌거나 두 블록 먼저 꺾거나 아무튼 전등이 축축하게 켜질 때 첫번째로 보이는 여관 말이야 거기서 혼자가 아닌 우리였던 적이 있어 비린내 나는 이야기지만 바다가 고요해지고 달이 차오르면 낯선 냄새로 북적이는 그 동네 말이야 여관방 벽지에 낙엽이 말라가고 그리움이 천장까지 닿을 때 우리는 버석버석한 섹스를 나누었지 그날 우리는 시소를 탔어 갈망의 무게만큼 발돋움이 심했던가 나는 언제나 낮은 부분이라고 생각했는데 모르겠다 너는 발에 모래가 파인다고 투덜거렸지 돌아온 방안에서 우리는 양말을 뒤집어 조개를 찾거나 퇴적층 겹겹이 냄새를 말렸어 몰래 배가 부풀기를 기다렸던 것 같아 내 몸에 쌓이는 게 모래나 바다라면 잠든 네 발로 내 속을 파이게 만들었을 텐데 그랬다면 죽어도 울지 않는 태생 같은 건 몰랐을 텐데 전등이 꺼지기 전에 아무튼 돌아가거나 먼저 두 블록 꺾어 왼쪽으로 나오면 골목이 보이지 그 수족관에 알을 낳는 거야 그리고 우리는 아침으로 알탕을 먹는다 입안에서 알이 터질 때마다 응앙응앙 소리가 들리는 건 비밀로 하자  

 

 

 친애하는 언니

 

 

      

    유채가 필 준비를 마쳤나봐  4 월의 바람은 청록이었어 손가락으로 땅에 글씨를 썼던가 계절의 뼈를 그리는 중이라 했지 옷소매는 죽어버린 절기로 가득했고 빈틈으로 무엇을 키우는지 알 수 없었어 주머니에 넣은 꽃잎을 모른 체했던 건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

 

    박음질이 풀릴 때 알았지 실로 제봉된 마음이었다는 걸 의사는 누워있으라 했지만 애초에 봄은 흐린 날로 머무는 때가 많았지 벚꽃과 유채가 엉킨 들판에 어린 엄마와 어린 언니가 있어 놀이기구가 안개 속에 숨어있었던 거야 숨바꼭질을 좋아하던 언니가 이불과 옥상과 돌담 그리고 유채꽃과 산새와 먹구름 속으로 달려가는

 

    한때 비가 내리고 물의 결대로 살 수 없다면 늙지 않은 그곳으로 가자 소매 안에 훔쳤던 벚나무에 대해 사과하는 밤 나무의 탯줄이 보고 싶었다 뭉텅이로 발견되는 꽃의 사체를 쥘 때 알았던 거지 비어버린 자궁에 벚꽃이 피고 사라진 언니를 생각했어 비가 호수 속으로 파열하는 밤에 말이야 물속에 비친 것은 뭐였을까

 

    언니가 떠난 나라에선 계절의 배를 가른다며 애비가 누구냐니 사생하는 문장으로 들어가 봄의 혈색을 가진 나를 만날 거야 떨어지는 비를 타고 소매로 들어간 것이 내 민낯이었는지 알고 싶어

 

   파문된 비의 언어가 언니에게서 나왔다는 걸 알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

 

 

 

요르문간드의 띠

 

 

이따금 뱀이 꿈에 나옵니다

실뱀이고요 의인화할 만한 형체가 없습니다

꼬리를 물 수 있을 정도로 긴 뱀이 선명합니다

거대한 허물은 배경으로 남습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어머니를 낳고

나는 상자를 낳습니다

다섯번째와 여섯번째 마디로 교미하는 지렁이는 쾌락일 뿐

번식하지 못합니다

깨고 나면 사라질 잠깐의 기억과 동의어입니다

자신을 집어삼키면서 정자를 뿜거나

동시에 한 달에 한 번 뜨거운 태양을 배출할 수 있습니다

뱀은 나를 헤집습니다

척추의 능선이 관능적으로 다가옵니다

질척한 체액을 뿌릴 때 이따금 꿈을 꿨다 생각합니다

속옷에 손을 넣고

오래전 잘라버린 내 정체성을 더듬습니다

광활한 흉터 몇 개와 바늘자국이 실뱀처럼 꿈틀거립니다

잠의 잔상에서 심한 풍랑을 일으킨 것이 뱀인지 나인지

벗어놓은 허물이 사람 가죽인지

초점이 흐릿한 꿈의 끝에서 나는 꼬리를 입에 문 뱀처럼

나를 연결합니다

내 속을 찢자 우글대는 뱀 수십 마리가 튀어나옵니다

뱀을 가르면 독에 젖은 내가 있습니다

 

 

 

머메이드 구름을 읽어내는 방식

 

나는 반인족

안데르센의 공간에서 태어난 거지

 

오빠는 속눈썹이 가지런했다 컨테이너 박스를 잠그면 매일 같은 책을 집었다 모서리가 닳아 꼭 소가 새끼를 핥

은 모양이었다 동화가 백지라는 걸 알았을 땐 목소리를 외운 뒤였다 내 머리칼을 혀로 넘겨주었다는 것도

 

내 하반신이 인간이라는 문장

너 알고 있으면서 그날의 구름을 오독했던 거야

 

동화가 달랐다 나는 오빠의 방식이 무서웠다 언어는 풍성한 머릿결이 아니라고 아가미로 숨을 쉬었기에 키스를

못한 거라고 그리하여 비극이라고

 

네가 하늘을 달린다

팽팽한 바람으로

 

구름은 구름이 숨쉬는 것의 지문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누워서 구름의 생김새에 대해 생각하다가 노을이 하혈

하는 것을 보았다 오빠는 그 시간대 새를 좋아했다 날개가 색을 입잖아, 말하는 얼굴이 오묘한 자국을 냈다

 

사라지는 건 없어

밤으로 스며드는 것들이 짙어가기 때문일 뿐

 

오빠에게 오빠의 책을 읽어준다 우리가 읽어냈던 구름을 베개에 넣으니 병실 속 꽃처럼 어울린다 영혼이 자라

는 코마의 숲에서 알몸으로 뛰는 오빠는 언제나 입체적이다 책을 태우면서 연기는 헤엄치거나 달리거나 다분히

역동적으로 해석되고

 

젖은 몸을 말리지 않은 건 구름을 보면 떠오르는 책과 내 사람이 있어서라고

 

너의 숲에서 중얼거렸어

 

 

 

루루와 나나  

 

 

가위를 쥐어봐요

우리는 유전자가 편집된 채 태어난 최초의 쌍둥이

에이즈에 걸리지 않는 미래형 맞춤 아기예요

말랑한 유리를 만지는 모순된 인류 미래의 심장입니다

크리스퍼 베이비 (Crisper Baby)

바코드를 파란 엉덩이에 붙여도 좋겠습니다

 

어쩌다가 만들어졌어 루루는 득을 따지지만 나나는 우연이라 하지  8 월은 어쩌다가 포도에게 빚을 져서는 ,

여름을 담보한 과일이 속절없이 투명해져 가

 

루루 무례한 씨를 가졌구나 당도 높은 태양이 바구니에서 후숙되는 중이야 다음 생은 입 없는 하루살이가 좋겠어 평생 말을 연습하다가 끝내 소리할 수 없는 계절을 삼키다가 당신 이름이 유언이 되는 비루한 알몸이면 좋겠어

 

나나 과일을 조심해야 해 파란 혈맥을 가진 여름을 함부로 만지는 건 위험해 태양이 파과하고 있어 바구니에 죽은 열기가 번지고 ,

 

이리 와 퍼즐을 맞추자

비어버린 부분을 맞춘 조각을 쏟아버렸지 이건 누가 잘라둔 장마일까

 

루루 어쩌다가 태어났더라 네가 죽는 걸 봐야겠어

여름이 오려둔 절기가 내리고 있어 바구니가 멍이 들고 우리는 금방 슬퍼지겠지

물컹한 태양을 만지다 보면 캄캄해지는 한쪽을 어떻게 해야 할까

포도 넝쿨에 매달린 우리는 알맹이만큼 다양한 안색이야

 

나나 사랑스러운 말을 연습하자 우리가 우리라는 걸 알게 된 건 언제였더라 아파본 적 없는 루루가 아픔을 배우게 된 건 또 언제였지

 

넝쿨이 서걱거리는 저녁

 

정교한 탯줄을 빨아들이는 우리의 다음 생

 

나가자 나나 돌아와 루루

                     계간  시산맥  2020 년 가을호

 

 

기형적으로 순환하는 너와 나의 설원 그리고 파라다이스 혹은 샴쌍둥이

 

 

 

  아뇨 설원 끝으로 가요

  켄과 메리 나무 앞에 세워주세요

 

  초인종이 울린다 투명하고 세속적인 밤이 타닥인다 서력기원부터 쌓인 첫눈이 유리에 가득하다 닿는 건 가져가렴 ,

 

  나는 가만히 젖는다 말린 종이처럼 눅눅해진 나무의 체질처럼

 

  첫눈이 되고 싶어

 

  깍지를 낀다 신기루도감에는 잠들지 않은 순록이 세기를 기다린다 몸을 포개볼까 고매한 책갈피가 될까 서기를 기록할까 세상 끝으로 가면 녹슨 율령을 새긴 내가 물기 없이 말라가겠다

 

  춥진 않니 ?

 

  초인종이 울린다 망설이다가 어항에 눕는다 물비린내가 난다 어항은 물고기를 믿지 않는다 나는 나를 믿지 않는다

 

  물이 오래 고인다면 젤리가 될지 모르지 말캉한 몸을 가진 켄과 메리는 하나의 길을 찾았을까 통조림으로 저녁을 때우고 그 안에서 잠을 잔다 빈 캔을 뒤집으니 젤리 속에 갇힌 내가 떨어진다

 

  첫눈이 따뜻하면 좋겠어

 

  그리하여 어항이 따뜻하면 좋겠어 금붕어가 따뜻하면 좋겠어

 

  초인종이 울린다 투명하고 세속적인 밤이 시작될 때 나는 나를 찾고 나를 맞이한다 안녕 위태로운 피부가 깨진다 밤이 말라간다 극지의 오로라가 몸을 펼친다 근사한 지느러미가 결정체로 남는다면

 

  나는 설원의 행성이 되어야겠다 불온한 내가 나를 기다리는 곳에서 ,

 

  빙하의 결말이 첫눈이라는 말 순록은 결빙된 입김에서 달리고

  초인종이 울린다 문을 열자 내가 서있다

 

  우리의 탯줄과 켄과 메리 나무 아래 두고 온 이름을 생각한다

 

  내 뒷모습은 어땠었나 고갈되지 않은 두 개의 낙원이 팽창한다 낮과 밤이 일시에 요약된다

 

  초인종이 울린다

 

 

                     계간  시산맥  2019 년 여름호 , ‘시여 눈을 감아라

 

 

⸺시집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 (2020 년  9 월 )

----------

김희준  (1994~2020) / 경남 통영 출생 . 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 같은 대학원 (현대문학 전공 ) 재학 중 . 2017 년  《시인동네 》 신인상으로 등단 .  시집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

 

'시인의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문재의 시 다섯 편  (0) 2021.03.28
시인 김사인의 시 여섯 편  (0) 2021.03.28
보리멸의 여름(외 3편)/최형심  (0) 2020.08.08
기형도 시 보기(7편)  (0) 2020.02.07
송찬호 동백시 모음(9편)  (0) 2020.0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