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시 모음

거미 시 모음 (20편)

시치 2021. 2. 4. 13:40

 

 

거미  

 

                               이면우

오솔길 가운데 낯선 거미줄
아침 이슬 반짝하니 거기 있음을 알겠다
허리 굽혀 갔다, 되짚어 오다 고추잠자리
망에 걸려 파닥이는 걸 보았다
작은 삶 하나, 거미줄로 숲 전체를 흔들고 있다
함께 흔들리며 거미는 자신의 때를 엿보고 있다
순간 땀 식은 등 아프도록 시리다

그래, 내가 열아홉이라면 저 투명한 날개를
망에서 떼어 내 바람 속으로 되돌릴 수 있겠지
적어도 스물아홉, 서른아홉이라면 짐짓
몸 전체로 망을 밀고 가도 좋을 게다
그러나 나는 지금 마흔아홉
홀로 망을 짜던 거미의 마음을 엿볼 나이
지금 흔들리는 건 가을 거미의 외로움임을 안다
캄캄한 뱃속, 들끓는 열망을 바로 지금, 부신 햇살 속에
저토록 살아 꿈틀대는 걸로 바꿔 놓고자
밤을 지새운 거미, 필사의 그물짜기를 나는 안다
이제 곧 겨울이 잇대 올 것이다

이윽고 파닥거림 뜸해지고
그쯤에서 거미는 궁리를 마쳤던가
슬슬 잠자리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나는 허리 굽혀, 거미줄 아래 오솔길 따라
채 해결 안 된 사람의 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노작 문학상 수상 작품




 

낙과에 대하여  

 

                                 이성목

세상의 모든 새끼들은
어미에게 거꾸로 매달려 있다.
박쥐는 저를 낳은 동굴 속에,
거미는 천장에
저를 키운 허공에,
나는 나를 일으켜 세운
세상의 바닥에 쩍 달라붙어 있다.
온 몸이 바닥이었던
어머니, 나를 버릴 수 없다면
끊어주세요. 탯줄
저 꼭대기에 걸어 주세요.
밤나무
쩍 벌어진 자궁에서
석 달 열흘 여문 죄가 후두두
떨어진다.
바닥에
잘 익은 내가
소복하게 쌓인다.


- 다층 2001년 겨울

 

 

 

늙은 거미  

 

                                   박제영

늙은 거미를 본 적이 있나 당신, 늙은 거문개똥거미가 마른 항문으로 거미줄을 뽑아내는 것을 본 적이 있나 당신, 늙은 암컷 거문개똥거미가 제 마지막 거미줄 위에 맺힌 이슬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나 당신, 죽은 할머니가 그러셨지. 아가, 거미는 제 뱃속의 내장을 뽑아서 거미줄을 만드는 거란다. 그 거미줄로 새끼들 집도 짓고 새끼들 먹이도 잡는 거란다. 그렇게 새끼들 다 키우면 내장이란 내장은 다 빠져나가고 거죽만 남는 것이지. 새끼들 다 떠나보낸 늙은 거미가 마지막 남은 한 올 내장을 꺼내 거미줄을 치고 있다면 아가, 그건 늙은 거미가 제 수의를 짓고 있는 거란다. 그건 늙은 거미가 제 자신을 위해 만드는 처음이자 마지막 거미줄이란다. 거미는 그렇게 살다 가는 거야. 할머니가 검은 똥을 쌌던 그해 여름, 할머니는 늙은 거미처럼 제 거미줄을 치고 있었지. 늙은 거미를 본 적이 있나 당신.




 

거미의 길은 젖어 있다 

 

                                                     김승원

1
젖줄을 토해낼 때마다 허공에 다리가 놓인다 격자무늬 그물 사이로 굵은 바람만 빠져나갈 뿐, 거미가 지나간 길은 축축하다

2
모두 마을을 떠난 후, 여뀌며 끈끈이주걱, 바랭이가 무성한 빈집엔 도둑고양이와 생쥐가 떠나고 없다 밤이면 달빛을 풀어 추녀와 젖은 굴뚝 사이 무당거미가 슬그머니 나와 집을 짓는다 연통의 온기가 식어가면서 거미들은 재빨리 세간과 주민등록을 옮기고 이 집의 새 가장이 된 것이다 이제 거미는 썩은 대들보 살집을 파고 들어가 이 집의 내력과 가훈을 갉아먹는다 이 집엔 원래 실직한 사내가 귀향해서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사내가 어느 날 아무도 몰래 밤 기차를 타버리고 그때부터 허물어진 집터를 배경으로 거미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집단 농장을 이루고 산다

3
무너진 것들을 배경으로 투명한 젖줄 풀어 길을 내는 저 무당거미의 삶, 여전히 팽팽하고 가파르다


- 2002 진주신문 가을문예 당선작품

 

 

 

거미 

  

                                박성우

거미가 허공을 짚고 내려온다

걸으면 걷는 대로 길이 된다
허나 헛발질 다음에야 길을 열어주는
공중의 길, 아슬아슬하게 늘려간다

한 사내가 가느다란 줄을 타고 내려간 뒤
그 사내는 다른 사람에 의해 끌려 올라와야 했다
목격자에 의하면 사내는
거미줄에 걸린 끼니처럼 옥탑 밑에 떠 있었다
곤충의 마지막 날갯짓이 그물에 걸려 멈춰 있듯
사내의 맨 나중 생() 이 공중에 늘어져 있었다

그 사내의 눈은 양조장 사택을 겨누고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당겨질 기세였다
유서의 첫 문장을 차지했던 주인공은
사흘만에 유령거미같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조장 뜰에 남편을 묻겠다던 그 사내의 아내는
일주일이 넘어서야 장례를 치렀고
어디론가 떠났다 하는데 소문만 무성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들은
그 사내의 집을 거미집이라 불렀다

거미는 스스로 제 목에 줄을 감지 않는다



 


거미  

 

                 김금하

집 한 채
허공에 떠있다

허방에 걸린
저 얇디얇은

투망에
목숨이 걸려있다

바람이 철썩
삐거덕
집 한 채 출렁인다

아찔하다
산다는 게 

 

 

 

거미고기

 

                              박 남 주

심해 거미고기는 공기주머니가 없다고 한다
물에 뜰 수 없는 그는
그래 깊은 물의 바닥에 철썩 달라붙어 꼼짝도 하지 않나 보다
헤엄칠 수 없어서인지
아니면 물밑 세계에 익숙해지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해서인지
제 몸의 무게로 바닥에 몸을 고정시키고 있다

물의 바닥에 들어앉은 그는
일렁이는 물살에도 끄떡하지 않는다
제 몸에서 쉴새없이 뽑아내는 거미줄은
물샐틈없는 물의 그물로 보인다
그가 던진 그물에 걸려든 먹이를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 그는
물이 흐르는 소리며 새어 들어오는 빛의 줄기를 한 입에 삼켜버린
그 깊은 어둠 속에
자신을 꼭꼭 숨겨놓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무엇이 그를 깊은 어둠 속에 가둬놓게 되었을까
자신이 내는 소리조차 들을 수 없는 그곳
제가 몸 담고 있는 자리에서 한 발짝도 옮겨 디딜 수 없는 그곳

아마 그는 서서히 물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 현대문학 (1998. 6)

 

 

 

거미, 불온한 폭식

  

                                         서안나

그녀는 날마다 수많은 풍경들을 제 앞으로 끌어당긴다.
앞발로 쉴새 없이 불온한 세상을 집어삼키는 그녀
끈적거리는 풍경을 가득 삼킨 어머니가
젖은 기억들을 재빨리 토해낸다.
젖은 상처들이 슬픔의 지형도를 나선형으로 그려낸다.
상처의 끈끈함으로 건설되는 도시는 타액의 힘이다.
제 몸을 찢어 상처의 집을 짓고
고단한 연속무늬를 자아내는 거미들.
어둠이 익숙해질 무렵 늙은 암거미 한 마리 도시를 삼킨다.
그녀 안의 기억의 손길들이
재빨리 풍경들을 저장한다.
상처가 가득 찬 몸은 아무리 먹어도 허기가 채워지지 않는다.
슬픔은 언제나 외로운 각도를 유지한다.
외로운 나선형의 각도는 그녀의 힘이다.
끈끈한 상처를 건너는 자 만이
자신에게 다시 다다를 수 있는 법.
날마다 제 상처를 기어오르는 어머니
내가 다시 나선형으로 재생되고 있다.


- 2003년 겨울호 <문학과 경계> 발표작






 

거미  

 

                    김언희

하루 세 끼의 극약과 세 알의 독약으로 연명하는 거미

()과 독()으로 내공을 쌓는
독거미
허공의 대갈통을 끌어안는
거미
거미가 다 된
거미
혼잣말을 하는
거미

거미는 허공에 대고 대화를 시작한다 허공에 대고
인사를 한다 그리고
없는 문을
닫는다

 

 

 

거미  

                     조말선

나는 생각한다
가랑이가 낳은 집에 대해서
유행에 둔한 건축법에 대해서
실오라기 하나로 이어온 가계에 대해서
이슬의 동그란 노크에 대해서
거꾸로 걸어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거미줄에 포박된 우주에 대해서
나는 가랑이로 생각한다
나를 낳은 기둥과 기둥에 대해서
폐허에 찍은 내 낙관에 대해서
외줄에 매달린 생애에 대해서
매번 마지막인 사랑에 대해서
창밖에 내걸린 사랑의 수의에 대해서
마지막을 유감 없이 처리하는 내 본성에 대해서
나는 가랑이로 배설한다
족보와
사랑과
무덤과




 

거미, 혹은 언어의 감옥  

 

                                               유 하

난 외로움의 힘으로 집을 짓는다 몸의 내부 깊은 곳
음습한 욕망을 나는 은빛 유혹으로 바꿀 줄 안다
꽁무니에서 나오는 가녀린 실의 끈적거림
나는 그만큼 삶에 집착한다 그러니까
내 집은 내 욕망의 무늬이자 미로인 셈이다
내가 풀어 놓은 무늬에 때론 내가 헤매기도 하기에,
오늘은 하루종일 하루살이를 기다렸다 세상의 온갖 방황도
내 집에 갇힌 이상 내 좋은 대리 경험의 양분일 뿐이다
먹이는 고스란히 내 집의 실기둥으로 뽑혀져 나온다
먹이들의 살과 뼈를 원료로 이루어진 집,
나는 안다 자기 몸이 결국 자기 덫이었음을
적어도 나는 그 죽음의 덫을 내 식으로 육화시킬 줄 아는

교활함을 지녔다..... 저주받았으므로, 난 즐겁다
, 내 분신 같은 새끼들아, 날 남김없이 먹어 해치워 다오
난 내 욕망의 무늬를 끝없이 확대 재생산하고 싶다
그리하여 모든 너 안에 내가 살고 싶다

 

 

 

정글의 법칙  

 

                            박이화

사자는 토끼 한 마리 잡기 위해 혼신을 다하고 거미는 나방 한 마리 잡기 위해 온 생을 짜낸다. 살아가는 일이 이렇듯 정글 아닌 곳이 없는데 어째서 너의 생엔 손톱도 발톱도 없는가? 어쩌자고 나를 위협하거나 유혹할 황금빛 해바라기 갈기가 없는가? 나는 그런 크고 순한 너의 귀가 슬퍼, 겁많고 슴벅한 너의 동공이 눈물겨워 차라리 단숨에 너의 숨통을 끊는다. 어서! 잠들라 지금 내 머리 위를 날으는 저 검은 추억의 부리가 네 몸을 탐내기 전에, 이별의 피맛을 아는 굶주린 슬픔이 다시 너를 덮치기 전에. 이것은 정글의 법칙! 처절한 약육강식이 아닌 서러운 내 사랑의 법칙!

- 현대시학 10월호



점자책을 읽으며   

                         신민철 

잔잔한 지면에다 손을 담근다. 페이지마다 꾹꾹 찍혀있던 글자들이 숨을 쉰다. 손가락이 지나는 행간마다 글자들은 가슴에다 등불을 켜고, 지평선에 서서 나는 아득히 눈을 뜬다.

지면에 비친 굴절된 단어, 모음과 자음이 서로 떨어진 낱말, 나는 이제껏 상처 난 글을 눈으로만 읽으려 했던가. 거미줄에 걸린 글자를 하나씩 집어들어 모자이크를 짜 맞추는 점자책에서, 나는 눈물에 젖은 문장을 본다.

거미의 달콤한 침을 바른 받침들은 오늘도 물음표를 하고 있다. 책을 흔들면 출렁이는 파도, 한 페이지를 적시고 나면 하늘과 땅이 한데 섞인다. 목을 메고 자살하는 점자들이 하늘로 떨어진다. 수챗구멍을 열고 나는 받침 잃은 글자들을 버린다. 점자책 밖으로 창백한 글자가 쏟아져 내린다.


- 문학웹진노블신춘문예우수상

 

 

 

 

어둠을 묶어야 별이 뜬다  

 

                                              임영석

거미는 밤마다 어둠을 끌어다가
나뭇가지에 묶는다 하루 이틀
묶어 본 솜씨가 아니다 수천년 동안
그렇게 어둠을 묶어 놓겠다고
거미줄을 풀어 나뭇가지에 묶는다
어둠이 무게를 이기지 못해 나무가지가 휘어져도
그 휘어진 나뭇가지에 어둠을 또 묶는다
묶인 어둠 속에서 별들이 떠오른다
거미가 어둠을 꽁꽁 묶어 놓아야
그 어둠 속으로 별들이 떠오르는 것이였다
거미가 수천년 동안 어둠을 묶어 온 사연 만큼
나뭇가지가 남쪽으로 늘어져 있는 사연이
궁금해졌다 무엇일가 생각해 보니
따뜻한 남쪽으로 별들이 떠오르게
너무 많은 어둠을 남쪽으로만 묶었던
거미의 습관 때문에 나무도 남쪽으로만
나뭇가지를 키워 왔는가 보다 이젠 모든 것들이
혼자서도 어둠을 묶어 놓을 수 있는 것은
수천년 동안 거미가 가르친
어둠을 묶는 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리라
거미는 어둠을 묶어야 별이 뜨는 것을
가장 먼져 알고 있었나 보다





느슨해진다는 것  

 

                                     이정록

병원에서 돌아와 보니,
뒷간에 기대 놓았던 대빗자루를 타고 박덩굴이 올라갔데.
병이라는 거, 몸 안에서 하늘 쪽으로 저렇듯 덩굴손을 흔드
는 게 아닐까. 생뚱맞게 그런 생각이 들데. 마루기둥에 기대
어 박꽃의 시든 입술이나 바라보구 있는데, 추녀 밑으로 거
미줄이 보이는 게야. 링거처럼 빗방울 떨어지는 거미줄을
보구 있자니, 병을 다스린다는 거, 저 거미줄처럼 느슨해져야
하는구나. 처마 밑에서 비를 긋는 거미처럼 때로는 푹 쉬어야
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데. 달포 가까이 제 할 일 놓고 있는
빗자루를, 그래 너 잘만났다 싶어 부둥켜안은 박덩굴처럼,
내 몸에도 새로이 핏줄이 돌지 않겠나. 문병하는 박꽃의 작은
입술을 바라보다가, 나 깊은 잠에 들었네 그려.

비가 오니 마누라 생각이 간절해지는구먼.
부침개 냄새가 코끝을 간질이고 말이여.
참 자네 안사람이랑 애들은 다 잘 있는감.
그리고 말이여, 제수씨 밀가루 다루는 솜씨는 여전한가.


- 시집 <제비꽃 여인숙> (2003년 민음사

 

 

 

 

웅덩이 

  

                    이진심

사나흘 비 내린다.
하수구는 한꺼번에 몰려든 물을 단숨에
들이키지 못한다.

웅덩이들,
물을 머금고 있다가
가만히 눈 감고 있다가
신발이 들어오면 덜컥 물어버린다.
아이들이 한 발짝 들어오면
하얀 스타킹에 덥석
물의 검은 발가락들이 거미처럼 들러붙는다.

서서히 말라붙어 가다가
표면에 맨 나중 밟은 자의 발자국이
범죄현장처럼 보존된다.

거의 말라붙으면
틀니가 빠진 늙은이의 입처럼 쪼그라든다.
잔주름이 조금 남아 있다.

그리고 이제 웅덩이는 없다.

웅덩이는 물이 고여 있을 때만
제 이름을 가진다.

물이 없으면 웅덩이는 다만 식물처럼 조용하다.

 

 


<시현실> 2003년 봄호





숨구멍  

 

                       조용미

언 못에 싸락눈이 덮인다
못에 숨구멍이 나 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의 정수리에 뚫려 있는
얇은 창호지 같은 숫구멍처럼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숨구멍을 가지고 있다

바람이며 땅기운이 드나들기도 하고
영혼이 숨을 내뱉기도 하는
그 구멍은
얇은 막으로 덮여 있다

얼음이 덮이니
나무그늘 아래로 물이 파랗던 여름보다
물은 더 살아 쌔근거린다

아무리 두꺼운 얼음도 물을 다 덮어버릴 수는 없다
눈 덮인 못에 검은 숨구멍이
여럿 나 있다
물이 숨을 내뿜는 곳이다

어떤 숨구멍은 장수하늘소를 닮았고
어떤 것은 거미줄을 치고 있는 거미를 닮아 있고

저 숨구멍은
원생동물인 아메바를 닮아 있다

못이 숨을 쉰다
저 못은 답답한지 우묵하고 검은 숨구멍을
가끔 들썩이고 있다

얼음을 지치는 아이들이 어쩌다 숨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일이 있다
그럴 때 숨구멍은
가장 큰 숨을 쉰다


- 현대시 20048월호

 

 

 

 

거미집  

 

                         조동범

바람이 불 때마다 거미집이 출렁였다. 거미집 사이로 이슬이 두런거리고, 안개 속에서 오히려 선명하게 드러나는 거미집. 나는 과수원의 언저리에서 친구를 기다렸다. 동구 밖에는 첫차가 잠시 솟아오르다 사라졌고 무른 사과 몇 알이 비탈을 굴러갔다. 느티나무 기대 있던 입간판이 자꾸만 내 쪽으로 쓰러졌다. 마을을 향해 난 길에는 하우스용 비닐이 노랗게 물결을 만들고 있었다. 몇 대의 버스가 승객을 기다리다 지쳐 돌아갔을까. 친구는 오지 않았다. 무채색 지붕 위로 천천히 저녁이 왔다. 거미가 내게 말했다. 친구는 오지 않을 거야. 거미집을 향해 나는 돌멩이를 힘껏 던졌다. 그러나 돌멩이만큼만 입을 벌려 돌멩이의 힘을 가늠해보는

구멍난 가슴 속의 거미집.


- 2002년 문학동네 하반기 신인상 당선작

 

 

흰줄표범나비, 죽음을 받아들이는 힘으로  

 

 

                                                  고진하

윙윙거리는 소리가 좀 이상해
보일러통이 있는 뒤꼍으로 돌아가
보일러통 옆, 진뜩한 거미줄에 걸려 있는
흰줄표범나비 한 마리를 보았다.
좀더 가까이 다가가 보니
더듬이와 몸통은 거미에게 파먹혔는지 보이지 않고
찢긴 날개 끝 희고 붉은 표범가죽 무늬가 선명한
두 날개만 흔들흔들.
가여운 생각에
손끝으로 사뿐히 두 날개를 집어 올렸더니
거미줄 쳐진 나무기둥에는
깨알같이 잔뜩 쓸어놓은 노란 알들.
갑자기 난 숙연해진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힘으로
푸른 햇살 아래 밀어 내놓은 신생(新生)의 꿈들!

 

 


감자와 그 밖의 것들에게 

 

 

                                 류시화

감자에게,
만일 내가 감자라면
그렇게 꽉 움켜쥔 주먹으로
자기 자신과 타인을 대하진 않으리라

어린 바닷게에게,
만일 내가 바닷게라면
그렇게 매순간 삶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자기 몸보다 더 큰 다리를 갖고 있진 않으리라

거미에게,
만일 내가 거미라면
그렇게 줄곧 허공에 매달려
초월을 꿈꾸진 않으리라

벌에게,
만일 내가 벌이라면
그렇게 참을성 없이 순간의 고통을 찌르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진 않으리라

언덕에게,
만일 내가 저편 언덕이라면
그렇게 보잘 것 없는 희망으로
인간의 다리를 지치게 하진 않으리라

그리고 밤에게,
만일 내가 밤이라면
그렇게 서둘러 베개를 빼 인간들을
한낮의 외로움 속으로 데려가진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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