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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장마>에 관한 시

시치 2017. 12. 9. 01:05

장마

                               이시하

 

장마철이면 시골집 뒷간들이 들썩인다

쌓아 놓았던 곰삭은 속들을 퍼내 개울물에 쏟아버린다

하루걸러 똥 퍼 대는 냄새로 마을은 욱, 욱, 욕지기를 하고

아이들은 코를 싸잡은 채 구경삼아 몰려 다닌다

더러워, 더러워, 똥지게 뒤를 졸망졸망 따르다보면

하늘은 기어이 어두워지곤 했다

 

속을 비워낸 뒷간은 휑하니 깊다

어린 녀석들은 얼마간 누이 손을 잡고서야 힘을 쓸 것이다

새로 오린 신문지가 걸리고 뜯는 달력이 걸리면 즐겁다

어디선가 낯익은 냄새가 퍼진다

 

뉘집서 오늘 똥 푸나보다

부침개를 뒤집으며 어머니, 개울물 많이 불었으니 나가지 말라신다.

 

 

 

장마 

                                         이동훈

 
프로테스탄트의 혁명이 시퍼렇게 싹을 틔울 때였지
갓 생리를 시작할 무렵의 13세 어린 소녀
횃불을 들고 탄광의 입구를 밝혔어
광부들이 갱도를 나오는 몇 십 분의 캄캄한 밤을 밝히기 위해서 말이야
빵 한 조각, 단지 배가 고파서 빵 한 조각을 위해서 말이지
오므린 연한 사타구니를  타고 내리는 선혈을 지켜보던 책임자는
짐승만도 못한 욕정에 소녀를 범하였지
지켜본 목격자들 모두 혀를 차면서도
생계를 위하여 잘릴까봐 못 본 척 하였던 게야
씨팔 친구의 딸이 겁탈을 당해도 말이지
탐욕의 제물로 받쳐진 사생아는 물의 혁명을 기억하지
고인 물을 엎지 못하면 위에서 물을 부어 제끼는 수밖에 없거든
죽음을 담보로 한 종교개혁자들이 필두로 나선거야
그리하여, 아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전된 앙금은 여전히 탁함을 자랑하지
썩어 빠진 농도의 차이뿐
튀어 오른 매연이 죽기 살기로 양복 바지춤에 앙금을 남기듯
시커멓게 속내를 감추고
가만가만 폐부를 압박하고 잠식하는 것처럼 말이지
그런데 목격자인 하늘이 가만 있겠어

지천으로 물을 퍼붓고 흘러내리게 하여
강간의 그날을 잊지 말라고 지천을 황토 빛으로 물들이는 것을.

 

 

 

장마  

                                                  목필균

 

전선이 머무른 우기(雨期)
무수한 작살이 아스팔트에 꽂힌다

한낮 어둠 속을 질주하는
자동차 불빛이 흔들린다

흥건하게 고이는 하수구를
급히 빠져나가려는 흙탕물에
발목까지 점벙점벙 담그며
축축한 습기를 마시는 날들

가슴에 퇴적되었던
푸른 날들이 한꺼번에 침식된 채
뚝뚝 붉은 살점을 떼어준다

무너지고 무너지며
허옇게 드러난 기억의 뼈들
봉합되지 못한 시뻘건 상처가
그대로 길을 된다

 

 

 

장마 

                                      김종제

 

한 사나흘
바람 불고 비만 내려라
꿈결에서도 찾아와
창문 흔들면서
내안에 물 흘러가는 소리 들려라
햇빛 맑은 날 많았으니
아침부터 흐려지고 비 내린다고
세상이 전부 어두워지겠느냐
저렇게 밖에 나와 서 있는 것들
축축하게 젖는다고
어디 갖다 버리기야 하겠느냐
머리부터 발끝까지
누구에게 다 젖고 싶은
그 한 사람이 내게는 없구나
문 열고 나가
몸 맡길 용기도 없는 게지
아니 내가 장마였을 게다
나로 인해
아침부터 날 어두워진 것들
적지 않았을 테고
나 때문에 눈물로 젖은 것들
셀 수 없었으리라
깊은 물속을 걸어가려니
발걸음 떼기가 그리 쉽지 않았겠지
바싹 달라붙은 마음으로
천근만근 몸이 무거워졌을 거고
그러하니 평생 줄 사랑을
한 사나흘
장마처럼 그대에게 내릴테니
속까지 다 젖어 보자는 거다

 

 

 

장마 참새 되기 

                                              황 동 규
                                             

하류(下流) 끊긴 강이 다시 범람한다
세 번 네 번 범람한다
외우지 않기로 한다
―물이 지우는 몇 개의 섬

신문을 읽지 말고
혹은 읽으면서 잊어버리고
몇 번 재주 넘어
―천천히 참새가 된 나와 아내

비가 내린다
물이 거듭 쳐들어 온다
새는 지붕 간신히 막아놓고
아들아, 아빠가 춤을 춘다

창 틈으로 날아들었다가
머리를 바람벽에 부딪치고
눈 앞이 캄캄해져서
참새가 참새가 춤을 춘다.

 

 

 

칠월령 -장마

                                     유안진 
  

칠칠한 머리채 풀어
목을 놓아 울고 싶구나

뼈가 녹고 살이 흐물도록
이승 너머 저승까지

모질게 매듭진 인연
그만 녹여 풀고 싶구나.


 장마 

                                        강현덕

바람에 누운
풀잎 위로
바쁜 물들이 지나간다
              
물 속에서
더 짙어진
달개비의 푸른 눈썹
              
세상은
화해의 손을
저리 오래 흔들고 있다

 

 

장마 

                                 천상병


7월장마 비오는 세상
다 함께 기 죽은 표정들
아예 새도 날지 않는다.

이런날 회상(回想)은 안성맞춤
옛친구 얼굴 아슴프레 하고
지금에사 그들 뭘 하고 있는가?

뜰에 핀 장미는 빨갛고

지붕밑 제비집은 새끼 세 마리
치어다 보며 이것저것 아프게 느낀다.

빗발과 빗발새에 보얗게 아롱지는

젊디 젊은 날의 눈물이요 사랑

이 초로(初老)의 심사(心思) 안타까워라-
오늘 못다하면 내일이라고
그런 되풀이, 눈앞 60고개
어이할거나
이 초로의 불타는 회한(悔恨)-

 


장마 

                                  김승동

 
아침부터 창밖은
늘어진 흑백영화다
우산 속의 아이도 종종걸음이고
빗길 자동차도 구성진 음색이다
가끔씩 뻥뻥 뚫어진 화면으로는
무료한 시간만 튀었다 사그라진다

갈 데도 없이
칙칙한 손잡이만 잡았다 놓았다 하면서
검열에 용케 빠진
난해한 장면이라도 기대해 보지만
수북한 잿더미에
담배꽁초만 꼼지락거린다


아무래도 오늘은
열리지 않을 풍경 같지만
햇빛 한 줌 훔쳐두지 못한 아쉬움이
은막에 숨은 그림자처럼
빗물 위에 일렁인다

물방울에 터진 마음
치렁치렁 흘러내리는 날
유리창에 매달려
백열등에 차임벨 기다려 보지만
무엇이 서러운지
오늘은 하루종일 연속상영이다

 

 

 

장마  

                                      이 정 화


하늘로부터 땅에 이르는 큰 자궁
모래집물 속
알맞게 따스하고 편안하다
목숨의 햇싹, 탯줄을 달고
내 의식은 끝없이 유영(遊泳)한다
눈도 채 뜨지 못한 채
붉은 위험부표 저 너머
무한 우주에까지 나아간다

 

 

 

장 마  

                                             원 태 연

 며칠 전부터 이렇게 잠이 오지 않는다
 소리를 내지 않는 둥근 벽시계는 두 시에서 세 시를
 묵묵히 건너가고 있는데 쓸데없는 이야기를 끄적이며
 시간을 잡아먹고 있다
 아마도 며칠 전부터 시작된 장마 때문인 것 같다
 작년 장마 때도 이렇게 빗소리 끄적이며
 조냈던 것 같은데, 올해도 빗소리 쓸 줄 몰라
 이렇게 끄적이고만 있다
 며칠 전부터 통 잠이 오지 않는다

 "그립지. 그리워 죽겠지. 왜 아니겠어
 그러나 말할 틈을 주지 않잖아. 얼굴조차 보여주지 않잖아
 내가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 이빨이 또 아픈지
 니가 보고 싶다가 머리가 너무 아파서 또 울었는지
 답답해서 왜 이렇게 답답할까 생각해보면
 그 끝에 너의 얼굴이 그려지고 있잖아"
 
 눈물에…… 얼굴을 묻는다

 쓰라린 마음. 쓰라린 기억. 쓰라린 나의 이름



장마

                           고 진 하


평생을 쇠갈퀴 같은 손으로 흙
만 파며 살아가신 할머니의
열 손가락엔 지문이 없다
반질반질하게 닳은
호밋자루
낫자루처럼 그렇게
닳아서 없어진 것일까.
사람의 손가락에 새겨진
나선형의 지문을
영혼이 들어오고 나간 흔적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하지만 난
지문없는 손을 잡고는
할머니의 영혼의 숨결을
뜨겁게 느끼곤 한다.
그 쇠갈퀴 같은 할머니의 손에
가끔씩 붙들리고 싶지만
벌써 쭈글쭈글한
우주배꼽으로
돌아가신지 오래다
오늘도 난 볼록 튀어나온
내 배꼽을 만지며
그리움을 달랜다

 

장마와 장마 사이

                                            박진성 


장미가 시들면서 기온이 올라가고
습도가 높아졌다 추악하게
가지 끝에 매달려 있는 장미가
저기압의 구름들을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28번을 타보면 안다 우이동에서부터
강남 일대까지 장미 軍團이 서울을 점령했다
오월의 겨드랑이나 허벅지 같은 곳 이를테면
홍릉 수목원 버드나무 아래에서 연인들은 키스를 해댔다
이파리에서 가시로 점프하는 벌레, 어머니는
김치를 가방에 담아서 올라왔다 등이 굽은 노인이
느릿느릿 걸어가고 아이들은 철수 바보, 영순이 병신
이런 글자들을 벽에 陰刻했다 어떤 절실함도 없이
애인을 만나고 돌아오는 새벽
측백나무 뾰족한 가시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장미, 장미, 장미의 계절, 공중에서 부유하는
날벌레 떼가 가로등에 모이기 시작했다
반지하 창문 아래에 누워서 빗소리를 들어도
뿌리까지 젖지는 못했다 나무의 뿌리 깊이에서
다운받은 음악 파일을 밀어 올려도
옆집 여자는 카드 빚을 진 아들과 자꾸만 싸웠다
장마가 올 것이다 기다렸다는 듯
습기가 파고들겠지 어서 오시라
모든 것이 부패할 준비가 되어 있는 집
방부제처럼 나는 혼자서 싱싱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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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동향사람들
글쓴이 : 이승기(동.41)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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