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관련글

시와 이미지-심 재 휘 (시인, 대진대 문창과 교수)

시치 2019. 5. 21. 02:04

시와 이미지


      심 재 휘 (시인, 대진대 문창과 교수)

 

  


  1. 

  심상(心象)으로 풀이되는 이미지(Image)는 리듬과 함께 시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이다. 시를 읽거나 혹은 쓸 때, 이 문학적 용어가 담당하는 역할이 얼마나 절대적인가는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안다. 그러나 또 이미지라는 말의 뜻을 막상 설명하려고 하면 그것 역시 쉽지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미지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논리적이라기보다는 다소 직관적이라는 데 원인이 있을 것이다.

  일상에서도 우리는 이미지라는 말을 흔히 사용한다. 가령 예상치 못한 상황을 보고 그것을 ‘충격적인 이미지’라고 말한다거나, 처음 만난 사람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받았다’고 하기도 한다. 또한 ‘그 사람의 이미지는 따뜻하다’라는 말처럼, 중첩된 느낌을 표현할 때에도 이 용어를 쓴다. 일상어의 일부가 된 이 말은 따지고 보면 결국 ‘인상(印象)’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어떤 대상이 경험자의 마음에 특정한 감각으로 각인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일상에서 사용하는 이미지란 말은 감각경험의 상태에 대한 표현일 터이다. 그렇다면 문학용어로서는 어떤가.

 

  헤겔이 ‘절대정신의 감각적 드러냄’으로 예술 미학을 설명할 때, 우리는 ‘정신(Geist)’이라는 헤겔적인 개념의 철학성보다는 ‘감각적 드러냄’이라는 말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는 당연히 예술적 표현의 어떤 특성을 고려한 말이다. 그러니까 예술은 이성에 호소하는 양식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에 가 닿고 또 의도한 감흥을 이끌어내려고 노력하는 행위일 것이며 그 노력의 정체는 바로 ‘감각적 드러냄’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사전적인 의미로 감각(感覺)이란 눈․귀․코․혀․살갗 등 신체의 기관을 통해 받아들이는 느낌을 뜻한다. 결국, ‘감각적 드러냄’이란 감각기관을 통해 자극을 받는 것과 유사한 미적 경험을 제공하는 것 또는 그 의도를 포괄하는 말이 된다. 마치 보고 듣는 것처럼 혹은 냄새가 나는 듯, 촉감이 느껴지는 듯 생생하게 느낌을 구현하는 것이 창조적 예술의 공통된 과제가 되는 셈이다. 시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2.

  시의 경우 ‘감각적 드러냄’은 이미지라는 용어로 집약된다. 이미지는 그만큼 감각적 인식의 산물이며 시의 장르적 속성을 가장 잘 대변하는 말이다. 문학이론서의 고전인 <<문학의 이론(Theory of Literature)>>에는 이미지가 ‘감각의 잔류를 표상하는 것’으로 정의되어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말로 만들어진 그림’(C.Day.lewis), ‘감각체험의 재현으로서 감각의 어떤 것에 호소하는 것’(C.Brooks & R.P.Warren) 등, 여타의 언급들도 이미지의 핵심적인 성질로서 감각적 자질을 거론한다. 이는 다분히 시의 비유적인 속성을 전제로 한다. 다음의 시를 보자.

 

  

군중 속에 있는 얼굴들의 환영 

축축한 검은 가지 위의 꽃잎들 

  

- 에즈라 파운드 「지하철 역에서」, 전문

 

  

  위의 시는 에즈라 파운드의 그 유명한 「지하철 역에서」라는 시이다. 그는 ‘축축한 검은 가지 위의 꽃잎들’이라는 새로운 이미지로 현대사회의 황폐와 삭막을 표현하였다. ‘축축한’, ‘검은’ 등의 감각적인 느낌이 ‘가지’와 만나면서 선명한 배경을 만들고 거기에 ‘꽃잎들’이 연결되면서 지하철 역의 군중들의 모습이 특정한 의미를 지닌 하나의 이미지로 재생된다. 수사법 상으로 보자면 위의 시에서 이미지는 비유에 의해 발생한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병치시킨 은유가 그것이다. 비유어가 곧 이미지가 된 셈인데 그렇다면 비유어와 이미지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가 의문스러워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 미지와 비유어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비유어는 수사법 상의 언어 기능을 지칭하는 것인데 반해, 이미지는 그 비유어가 환기하는 느낌에 해당하는 말이다. 즉 비유어는 언어적인 것이고 이미지는 감각적인 것이므로 개념의 차이가 있다. 비유어와 이미지가 간혹 동일시되기도 하지만 실상 비유어보다 이미지의 개념은 더 광범위하다.

  

  문학용어 사전에 의하면 이미지는 몇가지 층위로 나누어 정의된다. 좁은 뜻으로 이미지는 시각적 대상이나 장면의 ‘묘사(描寫)’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은유나 직유처럼 일종의 매개어(媒介語)에 의한 비유언어(Figurative Language)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그러나 이미지의 의미가 포괄적으로 사용될 때에는 대단히 애매한 용어가 되기도 한다. 시의 독자에 의해 경험되는 心象(mental picture)의 뜻에서부터 한 편의 시를 형성하는 요소들의 총체를 담당하는 용어에 이르도록 그것이 관장하는 의미의 영역은 상당히 넓다. 감각적 지각의 모든 대상이나 특질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 모호함은 앞서 언급하였듯이 이미지를 문학적인 자질로서만 인정한 것인가 아니면 심리적인 측면을 고려할 것인가와 관련이 있다.

  그런데, <<문학의 이해>>에서는 이미지의 의미를 단순히 감각 경험의 표출로만 한정하지 않는다. ‘과거의 감각상의 혹은 지각상의 체험을 지적으로 재생하는 것, 즉 기억(memory)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미지의 개념을 설정한다. 이 언급은 시를 읽는 과정 혹은 창작하는 현장을 상정할 때, 상당히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이미지를 기억의 일종이라고 하는 논리는 다음과 같이 풀이할 수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겪게 되는 감각경험이 단순히 생리적인 반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알 것이다. 감각경험은 경험자의 기억으로 저장된다. 그런데 감각경험이 기억으로 저장되는 과정에는 알게 모르게 추가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경험에 대한 경험자의 해석이다. 우리는 흔히 ‘인상적이었어’라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印象的’이라는 말은 단순히 외부 자극의 강도를 드러내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또한 경험자가 경험에서 얻은 인상적인 느낌에 특징적인 코드를 부여한다는 뜻과도 같다. 기억에는 그래서 수많은 코드가 저장되어 있게 마련인데 그 기억이 시적 상상력을 표현하게 될 때 코드화된 이미지로 재생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저녁 무렵, 일과를 마치고 접어드는 동네 어귀의 익숙하지만 특징적인 풍경, 혹은 독특한 냄새는 사람에게 어떤 인상적인 느낌을 주게 된다. 가령 그것이 편안함이라는 느낌으로 기억 속에 저장되었다고 하자. 시를 읽을 때 동일한 표현이나 상황을 접한다면 독자에게 그 이미지는 편안함을 상기시켜주는 코드로 작용할 것이다. 이는 역으로도 가능하다. 시를 창작할 때 편안함, 혹은 귀가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형상화하자면 인상적인 느낌의 코드로 입력된 특정한 이미지가 그 추상성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귀가의 편안함은 동네 어귀의 느티나무가 있는 풍경이나, 담장을 타고 흘러나오는 된장국 냄새로 형상화 될 것이고 그것은 곧 하나의 이미지가 될 것이다. 이미지가 기억의 일종이라는 말은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다음의 시를 보자.

  

 

잎이 나기 전에 꽃을 내뱉는 살구나무, 

중얼거리며 좁은 뜰을 빠져 나가고 

노곤한 담벼락을 슬픔이 윽박지르면 

꿈도 방향도 없이 서까래가 넘어지고 

보이지 않는 칼에 네 종아리가 잘려 나가고 

가까이 입을 다문 채 컹컹 짖는 中年 남자들 

네 발목, 손목에 가래가 고인다, 벌써 어두워! 

 

- 이성복 「봄 밤」, 부분

 

  이 시는 봄밤에 느끼는 어떤 정서를 드러내고 있다. 우리가 봄밤에 대해 생각하는 관습적인 느낌과는 많이 다르다. 봄날 밤의 정취는 시인에게 그리 부드럽거나 포근한 무엇이 아니라 황당하고 황망하며 절망적이고 치욕스럽게 인식된다. 그것은 시인이 어떠한 연유에 의해 얻게된 절실한 고민의 발로이다. 그러니까 시인에게 봄밤의 감회는 비극적인 느낌으로 다가온 것이고 그 느낌은 다시, 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 <살구나무>, <좁은 뜰>, <담벼락>, 넘어진 <서까래>, <종아리>, <중년 남자>, <가래> 등으로 구체화된다. 동원된 소재들은 시각적인 이미지를 구현하면서 특정한 느낌, 나아가 주제적인 정황을 형성해나간다.

  그런데 이미지들이 환기하는 어떤 분위기는 그 소재들에 대한 시인의 기억에서 발원한다. 다시 말하자면 <살구나무>에서 <가래>에 이르는 시인의 감각경험이 하나의 이미지 코드로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 <살구나무>에 대한 이미지가, 달빛이 내리는 봄밤의 <좁은 뜰>과 <담벼락>에 대한 이미지가 하나의 느낌을 이루며 이렇게 개성적이고도 구체적으로 제시되지는 못할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미지가 어떤 기능을 하는지는 자연스럽게 확인된다. 이미지의 기능은 단연 관념을 구체화하는 일이다. 시의 주제를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감각으로 현상해내는 일을 이미지가 담당한다. 시는 의미를 내장하고 있는, 혹은 의미를 환기하고 있는 이미지의 덩어리로 독자에게 제시된다. 그러므로 시 속에서 이미지가 제대로 기능할 때, 그 시는 높은 감응력을 발휘한다. 김준오는 이미지의 기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의 이미지는 시에서 여러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이미지의 정의에 이미 암시되어 있듯이 이미지는 무엇보다도 해석에 도움되는 중요한 장치다. 시인은 전달하고 싶은 관념이나 실제 경험 또는 상상적 체험들을 미학적으로 그리고 호소력 있는 형태로 형상화시킬 수단을 찾는다. 이 수단이 이미지다. 다시 말하면 이미지는 의미를 전달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그러므로 독자든 시인이든 시를 잘 읽거나 잘 쓰기 위해서는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기억을 얼마나 풍부하게 저장하고 있는가를 늘 점검해야 한다. 이는 평소에 주변의 사물과 상황에 대해 세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과 같다. 또한 사물과 상황이 특정한 느낌을 지닌 하나의 이미지로 받아들여진다면 시를 읽거나 창작할 때 많은 도움이 되겠다. 절실한 고민과 구체적인 느낌은 이미지라는 훌륭한 도구를 통해 효과적으로 다가오거나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진부한 감성의 시들을 구별하게 해주고 학습된 느낌과 상투적인 이미지가 마치 내 것인 양 남발하는 시 쓰기의 오류로부터 우리를 구제해 줄 것이다.

 

  

  3. 

  이제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현대시로 올수록 ‘감각적 드러냄’, 즉 ‘이미지’의 위상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규보가 「백운 소설」에서 ’무릇 시에서는 뜻이 주가 된다. 뜻을 세우는 일이 가장 어렵고 표현하는 일은 다음이다‘(夫詩以意爲主 設意最難 綴辭次之)라고 말한 것에 비하면 현대시에서 ’감각적 드러냄‘이 차지하는 비중은 가히 ‘뜻을 세우는 일’을 능가한다고 하겠다. 물론, 현대시에서도 감각적인 특질과 사유적인 특질은 시에 따라 달리 나타나기도 한다. 이제는 과거의 시작법처럼 보이기도 하는,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 아예 愛隣에 물들지 않고 / 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 億年 非情의 緘黙에 /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유치환, 「바위」)와 같이 감각을 대동하지 않는 도저한 관념의 표출이 있는 반면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이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羊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 김종삼 「북치는 소년」, 전문

  

과 같이 오직 감각적인 이미지만 남아있는 시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에서 감각과 사유는 가장 효과적인 균형을 이루려고 노력한다. 문제는 현대시가 사유의 무거움보다 개성적이고 다채로운 감각적 이미지의 추구로 기울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시에서 리듬감이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는 현상에서도 그 사실은 입증된다. 현대시는 집단이 공유하는 노래로서가 아니라 내밀하고 사사로운 느낌을 구현하는 장으로서 그 장르적 속성이 변해가고 있다. 이제 시의 언어는 감각적 느낌을 제공하는 단서로서 그것에서 파생되는 시적 환기력에 의해 그 성패가 가늠된다.

 

  현대시가 리듬감보다는 조형적인 이미지에 의한 구성이 더욱 많아지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현대사회가 더욱 복잡해지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집단 무의식의 발로로서 시가 지녔던 주술성, 혹은 그것에 대한 믿음이 현대시의 언어에서 사라진 지는 오래 되었다. 근대적인 시의 개념은 리듬과 비유와 상징으로 대표되는데 동시대로 오면 올수록 리듬감은 현저히 퇴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갈수록 다양하고 개별화되는 현대인들의 삶을 드러내고 그것을 문학적으로 향유하기에는 집단적 성격의 음악적 자질보다는 미세하게 분화된 감각적 이미지가 더욱 적합해진 것이다. 개성적인 비유, 혹은 새로운 이미지로의 경도는 어쩌면 현대적 삶의 양상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날이 흐리고 가랑비 내리자 북쪽으로 가려던 새들이 날기를 멈추고 서 있다 오리나무숲 새로 저녁은 죽음보다 조금 길게 내리고 산 밑으로는 사람들이 두엇 두런두런 얘기하며 가고 있다 어떤 충격이 없이도 사람의 모습은 아름답다 바람도 그들의 머리칼을 날리며 그들 식으로 말을 건넨다 바람의 친화력은 놀랍다 나는 바람의 말을 들으려고 귀를 모으지만 소리들은 예까지 오지 않고 중도에서 사라져버린다 나는 그것으로 됐다 나는 너무 멀리 있다 나는 유리창 너머로 마른 나무들이 일어서고 반향하며 골짜기를 이루어 흘러가는 것을 보고 있다 나는 모두를 알 수 없다 나는 너무 멀리 있다 새들이 다시 날기를 멈추고 시간들이 어로인지 달려가고 그림자들이 길 위에서 사라지는 것을 나는 보고 있다 이제 유리창 밖에는 새도 나무도 보이지 않는다 유리창 밖에는 유령처럼 내가 떠오르고 있다.

  

- 최하림 「나는 너무 멀리 있다」, 전문

 

  

  일상적인 풍경으로 드러나는 이 시는 사실 대단히 무거운, 관념적인 주제를 안고 있다. 시인은 삶과 죽음의 대비를 통해 생의 소중함을 말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는 말하지 않고 드러내는 방식을 택한다. 이런 주제는 대체로 고통스러운 포즈의 진술에 의해 표현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나는 너무 멀리 있다>는 표현 외에는 어디에도 무거운 진술은 없다. 특별히 두드러지는 비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서도 나무와 새와 바람의 모습을 동원하여 일정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 이미지들은 모두 죽음을 향해 흘러가는 시간의 의미, 혹은 화자로부터 멀어져 가는 생의 의미를 가시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가벼운 일상의 풍경 속에 생의 가장 비극적인 무거움이 깃들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주제적 사유도 사유지만 사물에 대한 애정과 관찰이 없이는 불가능하며 그것은 곧 감각적 이미지로 환원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시에서 주제의 무거움이 가벼운 이미지의 놀라운 운용에 의해 어떻게 환기되는지를 즐긴다. 이와 같이, 형상화가 주제에 대한 고려보다 더 우세한 자리를 점하고 있는 현상은 요즘의 시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시에는 당연히 주제적인 전략과 형상화 전략이 공존한다. 이규보의 시대에 비해 본다면, 주제적 전략과 형상화 전략은 훨씬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아직까지 기존의 대다수 시들은 세상을 통찰하는 생각의 힘을 궁극적으로 우위에 둔다. 그러나 새롭게 부각하는 시의 창작경향, 그리고 앞으로 전개될 시창작의 유형은 더욱 다른 모습을 띄게 될 것이다. 사물을 통해 세상의 의미를 해석해내려는 기존의 시작법보다 제시의 기능이 강한, 즉 형상화의 측면을 즐기는 시작법이 우세해질 것이다. 더구나 시에 있어서 비유와 묘사에 국한되던 기존의 이미지의 개념에는 점차 ‘관념의 조성’이라는 세련된 기능이 추가되고 있다. 과거에는 상승․하강, 폐쇄․개방, 어둠․밝음 등과 같은 관념적 이미지들이 주제를 형성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였다면 이제는 특정 관념을 육화해내는 이미지의 공정, 그 자체를 즐기기 위해 이미지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시가 곧 이미지다라는 고전적 정의의 패러다임은 질적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아니 변하고 있고 변했다.

 

   4. 

  80년대 서정의 대표적 얼굴이었던 이성복의 시들은 이미지의 운용에서 80년대적이었다. 이미지 활용의 기존 관습을 극복한 그의 시들은 이미지가 전체성보다 파편성에 지배받도록 한다. 그의 시 쓰기는 비유적 이미지의 작법이 치환의 시대에서 병치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비유의 방법으로서 치환이 동일성에 대한 단순한 욕구에 근거한다면 병치는 이질성으로 인해 유발되는 자유로움에 더 큰 무게를 둔다. 물론 치환방식과 병치방식은 근본적으로 자아의 동일성을 지향하기는 하지만 맥락을 약화시키고 이질적인 것들의 중첩을 통한 직관의 강화라는 측면에서 병치는 좀더 현대적이다. 이성복의 시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은 이미지군과 군 사이의 고리가 대체로 느슨하다. 그러므로 이미지들은 자족적인 성격을 지닌 채 다른 이미지들과 소원하다. 이전의 시들이 시의 구성 요소들을 유기적으로 조직하였던 것에 비해 이성복의 시는 다소 무책임한 태도를 보인다고 하겠다. 이 무책임함은 최근 시 쓰기에 이르러 하나의 강력한 목표가 된 듯한데 이점에서 이성복은 선구자였다.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봄은 오지 않았다 복숭아 나무는 

채 꽃이 피기 전에 아주 작은 열매를 맺고 

불임의 살구나무는 시들어 갔다 

소년들의 성기에는 까닭없이 고름이 흐르고 

의사들은 아프리카까지 이민을 떠났다 우리는 

유학가는 친구들에게 술 한 잔 얻어먹거나 

이차대전 때 남양으로 징용간 삼촌에게서 

뜻밖의 편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놀라움도 우리를 무기력과 불감증으로부터 

불러내지 못했고 다만, 그 전해에 비해

약간 더 화려하게 절망적인 우리의 습관을 

수식했을 뿐 아무것도 추억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살아 있고 여동생은 발랄하지만 

그들의 기쁨은 소리 없이 내 구둣발에 짓이겨 

지거나 이미 파리채 밑에 으깨어져 있었고 

춘화를 볼 때마다 부패한 채 떠올라왔다 

그해 겨울이 지니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우리는 봄이 아닌 윤리와 사이비 학설과 

싸우고 있었다 오지 않는 봄이어야 했기에 

우리는 보이지 않는 감옥으로 자진해 갔다

 

- 이성복 「1959」, 전문

  

   「1959 년」은 <무기력과 불감증>으로 변명되는 절망을 매우 감각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시이다. 시인은 절망의 현장이 지니는 불모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몇 개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아주 작은 열매만을 맺는 복숭아나무’, ‘시들어가는 불임의 살구나무’, ‘까닭없이 고름이 흐르는 소년들의 성기’ 등이 그런 것들이다. 예시한 존재들은 생산성이 떨어지거나 생산이 불가능한 것들의 구체적인 이미지들이다. 하지만 이들 소재들은 의미의 어떠한 맥락도 없이, 즉 인과관계 없이 전후로 연결되어 있다. 연계성이 없으므로 연결되어 있다기보다 놓여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병치되어 있는 이미지들은 모두가 유사한 느낌을 환기한다. 이질적이고 파편적인 소재들이지만 일정한 이미지를 공유함으로써 ‘따로 또같이’의 효과를 발휘한다.

  게다가 ‘아프리카로 이민을 떠난 의사’, ‘유학을 가는 친구들’에서 파생된 이미지는 치유 능력의 부재를 적극적으로 환기하는데 그것의 중첩은 더욱 깊은 절망을 조성하는 데 기여한다. <어떠한 놀라움>도 그 절망의 현장에 방치된 존재들을 구원할 수 없다는 우울한 선언은 이미지들의 힘을 바탕으로 높은 가청도를 확보한다. 그런데 시의 앞 부분에서 제시된 불모의 이미지들과 마찬가지로 ‘의사’와 ‘친구’ 사이에는 어떠한 논리적 연계가 없다는 점에서 이미지들은 자유롭고 무책임하다. 기존의 독법에 의존하면 이미지 사이의 맥락은 상식적이지 않다. 독자는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무기력과 불감증>, <절망>의 주위에 모여드는 새로우면서도 강렬한 느낌을 전달받는다. 아닌 것 같으면서도 결국은 동일한 느낌의 이미지들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다면성과 동일성이 동시에 구현된다. ‘오지 않는 봄’의 세상과 ‘보이지 않는 감옥’의 현실을 이성복 식으로 형상화하는 방식으로서 이미지의 활달한 활용은 80년대 시의 실험이자 성과였다.

  이러한 이미지 활용은 다음 세대인 기형도의 시에 고스란히 이어진다. 다만 이성복의 시적 상상력이 여전히 정치적인 국면에 토대를 두고 있었던 것에 비해 기형도의 것은 정치적 국면에서 벗어나고 있거나 이미 벗어나 있다. 그런 면에서 기형도 시의 이미지는 90년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인 상처를 기점으로 전개되는 우울하고 어두운 그림들은 그의 시 세계를 특징짓는 아이콘이 되었다. 가령 그가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정거장에서의 충고」, 부분)라고 노래했을 때, 이 시에 사용된 어둠과 황량함과 처량함은 더 이상 사회 공동체의 그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하지만 나열된 이미지들,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는 마른 나무’, ‘천천히 노트를 덮는 나’, ‘검은 구름이 멎어있는 저녁의 정거장’, ‘군데군데 쓰러져 처량한 눈을 껌벅이는 개’ 등은 이성복 시의 방식처럼 인과관계보다 독립성에 의존한다. 이미지들 사이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약화시키는 태도는 더욱 발전한다. 이미지들은 일정한 의미를 지향하기보다는 독자들의 정서 안에서 자유롭게 진동한다. 하 지만 지배문화에 대한 저항으로서 일탈의 의미는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질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일군의 시인들에 의해 시도되는, 때로는 발랄하고 때로는 엽기적인 상상력들이 대동하는 이미지들은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곤혹스럽다. 이러한 현상은 조짐이 아니라 이제 하나의 흐름이 된 듯하다.

    

객관적인 아침 

나와 무관하게 당신이 깨어나고 

나와 무관하게 당신은 거리의 어떤 침묵을 떠올리고 

침묵과 무관하게 한일병원 창에 기댄 한 사내의 손에서 

이제 막 종이 비행기 떠나가고 종이 비행기, 

비행기와 무관하게 도덕적으로 완벽한 하늘은 

난감한 표정으로 몇 편의 구름, 띄운다. 

지금 내 시선 끝의 허공에 걸려 

구름을 통과하는 종이 비행기와 

종이 비행기를 고요히 통과하는 구름. 

이곳에서 모든 것은 

단 하나의 소실점으로 완강하게 사라진다. 

지금 그대와 나의 시선 바깥, 멸종 위기의 식물이 끝내 

허공에 띄운 포자 하나의 무게와 

그 무게를 바라보는 태양과의 거리에 대해서라면, 

객관적인 아침. 전봇대 꼭대기에 

겨우 제 집을 완성한 까치의 눈빛으로 보면 

나와 당신은 비행기와 구름 사이에 피고 지는 

희미한 풍경 같아서.

 

- 이장욱 「객관적인 아침」, 전문

 

 

  이장욱의 시에서 선행 이미지는 의미상으로 전혀 <무관한> 뒤이은 이미지로 징검다리 건너듯 건너간다. 끝말 잇기 놀이의 방식을 시에 차용하는데 어휘 대신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끝말 잇기에서 앞 말과 뒷말이 소리 이외의 어떤 연관도 없는 것처럼 이미지들도 기억이나 시선에 의해 매개되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나와 당신’, ‘당신과 어떤 거리의 침묵’, ‘침묵과 한일병원의 어떤 사내’, ‘사내와 종이비행기’, ‘종이비행기와 하늘’, ‘하늘과 구름’ 등 이미지들의 연쇄는 오히려 무관한 것들의 무의미한 연쇄에 불과하다. <무관함> 그것은 이 시의 가장 큰 형식적 전략이다. 그 전략에 의하면 <나와 당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들은 고립된 객체들이자 지극히 우연하게 한 공간에 놓여진 <희미한 풍경>일 뿐이다. 그것은 무관하게 연계된 이미지들의 관계를 통해 더욱 감각적으로 입증된다. 결국 이 시에 등장하는 많은 이미지들은 전체성이나 동일성을 파괴하기 위해 의도된 아귀 맞지 않는 퍼즐조각들이다. 지구의 종말이 올지라도 객관적인 존재들일 수밖에 없다는 일단의 사유는 무관한 이미지의 배치를 통해 완성된다. 이 시를 이끌어가는 대표적인 힘은 사유가 아니라 이미지들의 관계방식에 있다.

  이처럼 단 하나의 결정적인 의미가 되기를 원하는 않는 기표들, 의미가 아니라 오로지 이미지로만 남기를 원하는 시들을 만나게 되는 일은 전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되었다. 이제 현대시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무의식에 근거한 듯한 자동기술들은 급진적으로 교란된 이미지들을 양산한다.

 

  

호주머니를 잃어서 오늘 밤은 모두 슬프다 

광장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모두 서른두 개 

나는 나의 아름다운 두 귀를 어디에 두었나 

유리병 속에 갇힌 말벌의 리듬으로 입 맞추던 시간들을. 

오른손이 왼쪽 겨드랑이를 긁는다 애정도 없이 

계단 속에 갇힌 시체는 모두 서른두 구 

나는 나의 뾰족한 두 눈을 어디에 두었나 

호수를 들어올리던 뿔의 날들이여. 

새엄마가 죽어서 오늘 밤은 모두 슬프다 

밤의 늙은 여왕은 부드러움을 잃고 

호위하던 별들의 목이 떨어진다 

검은 바지의 밤이다 

폭언이 광장의 나무들을 흔들고 

퉤퉤퉤 분수가 검붉은 피를 뱉어내는데 

나는 나의 질긴 자궁을 어디에 두었나 

광장의 시체들을 깨우며 

새엄마를 낳던 시끄러운 밤이여. 

꼭 맞는 호주머니를 잃어서 

오늘 밤은 모두 슬프다

 

- 황병승 「검은 바지의 밤」, 전문

  

  주어와 술어, 그리고 목적어가 제 위치에 있다고만 해서 통사구문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위의 시는 너무나 리얼하게 보여준다. ‘아버지는 바쁘고 어머니는 예쁘다’라는 문장은 통사구조상 정상적인 것 같지만 의미의 불균형으로 말미암아 누가 보더라도 이상한 문장이 된다. 사람들은 문장의 반을 듣고 상식적인 수준에서 다음에 무엇이, 최소한 어떤 맥락의 표현이 등장할 것인지를 안다. 그러한 상식은 그러나 황병승의 시에서는 무참하게 파괴당한다.(이 시는 그의 시집에서 다소 온순한 편에 속한다) 필연성이나 합리성을 의도적으로 조롱하듯 수식어와 피수식어의 관계, 구문과 구문의 조합, 문장과 문장의 연결은 예측할 수 없는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아니 질서와 규범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 같다.

  「검은 바지의 밤」에서 대표적으로 드러내는 의미의 코드는 부재, 분열, 해체이다. 이 시의 슬픔은 <호주머니를 잃어서>이기 때문이다. <새엄마>는 죽었고 <늙은 여왕은 부드러움을 잃고>, <별>들도 목을 잃었다. 생명을 잃기는 <시체>들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두 귀>와 <두 눈>, <자궁> 역시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호명하는 것들은 모두 없는 것들이다.

  한편, ‘부재하는 것들의 세상’에서 중심을 이루는 또 하나의 이미지는 분열된 신체에 관한 것이다. 의문과 회한의 어조를 동시에 겨냥한 <어디에 두었나>라는 표현은 적절한 위치에서 후렴구처럼 등장한다. 그것은 듣고 보고 생산하는 신체의 기관들이 분열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하나의 주체가 파편으로 분열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부재와 균열, 분열과 단절, 그 이상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어쩌면 그것을 알려고 하는 욕망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 바람직할지 모른다. 해체의 노력은 읽는 이에 따라 다양한 경험으로 수납될 것이다.

  정상적인 이해의 파괴를 대동한 이 난해한 이미지들은 처음부터 해석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각각의 이미지들은 전혀 연계되지가 않고 열심히 배타적이다. 이성복과 기형도 시의 자족적인 이미지들도 궁극적으로 일정한 정서를 지향하였던 것에 비해 보면 환상과 모호함으로 무장한 일군의 시들은 궁극적인 지향, 즉 동일성이나 전체성 자체를 거부한다. 그것은 곧 의미와 형식의 해체이고 질서와 규범의 파괴이다. 이미지들은 해체와 파괴, 이탈과 모호함을 위해 창조된다. 지배질서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저항정신과 실험의지는 급속하게 진화하고 있다. 전통은 늘 닫혀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급진적인 저항은 완전하게 열려 있는 텍스트를 끊임없이 추구하기 때문이다.

  다만 우려되는 것은 이러한 형상화 전략들이 전략을 위한 전략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시의 근간은 정직이다. 정직은 절실함으로 이어지고 오래 절실하다보면 단 하나밖에 없는 바로 그 언어와 형식을 얻게 될 것인데 전략에 치우치다 보면 스스로를 기만하게 될지 모른다. 그러면 진짜인 척 하기가 훨씬 수월하다. 그 함정을 어떻게 피해갈 것인가? 사실 그것은 모든 시의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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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강릉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국문과와 같은 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7년 작가세계 등단, 현: 대진대학교 문창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