必死 筆寫

구현우] 드라이플라워 / 선유도 / 오로지 혼자 어두운

시치 2020. 7. 17. 01:22

드라이플라워/구현우

 

 

백야 속에서 네가 반쯤 웃고 있었다 매혹적인 이미지 외설적인 향기 몽환적인 목소리 너의 모든 것을 훔치고 싶은 한순간이 있었다


아주 잠깐 너를 꽉 안아주었다


그것은 치사량의 사랑이었다 나는 네가 아름다운 채 살아있길 바란 적은 없었으나 아름다웠던 채 죽기를 바란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선유도/구현우

 


창밖의 비를 좋아하지만 비에 젖는 건 조금도 좋아하지 않는 너에게


해주려고 한 얘기가 있어


선유도에서 만나자 선유도에는
오만 색으로 어지러운 화원이 있으니까


녹음된 빗소리를 들으며 비로소 안정을 찾는 너에게


어울린다 믿는 풍경이 있어


혀끝이 둔감해지면 입안 가득 맥주를 머금고
어디에선가


이 통화가 계속되지 않는다고


네가 여길 때면 무음이 침묵과 다르다면 난치의 감정이라면


그건 바라지 않아도 젖어드는 일


너는 가을옷이 필요하구나 나는 봄옷을 생각하면서
양화대교를 건너고 있어


선유도에서는 볼 수 있을 거야 차마 겉으로는 구분되지 않는 계절


나의 9월은 너의 3월


선유도에서 만나자 선유도에는
직접 본 다음에야 알게 되는 게 있으니까


어쩌면 나는


네가 자주 입는 꽃무늬 원피스에 수놓인 노랑과 파랑
하나는 무난하지만
하나는 네가 그토록 역겨워하는 향기를 품은 꽃이라는 걸


말해줄 수도 있을 거야


그리고 나는


그 후의 복잡한 마음을 전할 수 있을 것 같아 들뜬 채로 한강을 지나가다가
아주
서서히


선유도로 가는 길에 모두 잃어버리고 마는 거야

 

 

 

 

오로지 혼자 어두운/구현우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지만 나의 방은 한 명 이상의 외로움이 있다


앨범과 책은 저 혼자 쓰러지기도 한다 금이 간 지독한 꽃병의 무늬는 그렇게 완연하다


극적인


사건과 별개로 이불은 다른 형태로 구겨질 뿐 올바르게 펴지는 법이 없다 누군가의 침실이었던 나의 방에서 사랑을 나누는 일은 위험하다


위로부터 잠깐 찾아온 소음이 평생 머문다


나의 방


한가운데


제각각 그림자가 한데 모여 일렁인다 무섭게 따뜻한 기분 그건 어디엔가 있을 사람의 모양이다 만난 적도 없이 나의 방에서 나란히 함께 어두운

 

 


ㅡ시집『나의 9월은 너의 3월』(문학동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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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현우 : 1989년 서울 출생. 안양예고와 명지대 문예창작과를 졸업. 2014년 《문학동네》 신인상으로 시 등단. 시집 『나의 9월은 너의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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