必死 筆寫

폭설 카페 (외 2편)/전영관

시치 2020. 7. 17. 22:18

폭설 카페 (2)/전영관

 

 

북방으로 떠나기 맞춤인 날이다

 

눈송이를 헤아리는 당신에게

탁자에 흥건한 커피 향을 준비하라고 눈짓한다

 

솔개처럼 날아갈 생각을 했다

 

활공이란 허공을 미끄러지는 새들의 기법

눈 내리는 날의 생각들은 위험해도 푹신하다

 

나의 북방은 안온할 것

 

발정에 겨운 수컷 순록들이

뿔 부딪는 소리에 하르르

자작나무 가지의 설화(雪花)가 쏟아지는 곳

 

우리의 북방은 분주할 것

 

어둠 속으로 살금거리는 들짐승들 사이

어미 여우가 꼬리로 가만가만

젖먹이들 칭얼거림을 덮어 재우는 곳

 

당신은 아내여서 북방의 끼니를 예감하는지

눈빛 자욱하다

 

눈구경 하느라 창가에 서 있다가

순록에게 배운 듯 우쭐거리며 자리로 돌아온다

 

토끼나 쫓다가 도끼마저 잃어버린 나무꾼처럼

자발없이 웃어본다

 

 

장마

 

 

비 오는데 물 구경 가요

 

창밖은 폭우와 우산들로 소란스러운데

뒷자리 사내의 통화가 들린다

당신과 장화 신고 웅덩이 마다 잘박거리며

물 구경 가던 때 있었다

왜 상류를 보게 되느냐고 내게 물었지

다리 위에서 상류를 보면 꿈이 많은 사람

멀어져가는 하류를 보면 잃어버린 것들이 많은 사람

쿵쾅거리는 물발에 열중하면 얼핏, 현기증이 난다고

당신은 나란히 잡은 손에 힘을 주었지

물보다 빠르게 걸으면 넘어진다고

상류를 아는 어른 말투로

당신 젖은 어깨를 토닥거렸지

등뒤로 넘어온 생면부지 여자 음성이

부추전 지지는 기름내만큼 고소해

내 사람이라면, 하려다 웃는다

 

커피 식는 줄도 모르고 우산을 들며

신인 배우마냥 대사를 중얼거렸다

 

비 그쳤는데 물 구경 갈까

 

 

늦깎이

 

 

어디에 앉혀놔도 등신이었지만

시라는 거울 앞에 서면

척추가 휘어진다

 

초대장도 없이 잔치 구경 간 실업자같이

기웃거리는 습성을 대인 관계라 착각했다

 

사람을 넓혀야 한다고 욕심부리다가

기념사진의 병풍 노릇까지 해봤다

 

감기 걸렸다고 이불이나 탓하는 얼뜨기여서

타인의 재능을 노력으로 메우려 헛발질했다

 

비굴은 치욕을 성형한 생필품

 

재촉하는 이 없는데 결승선 같은 것 없는데

지각한다는 느낌에 시달렸다

 

알았던 노래의 2절처럼

모임마다 가벼운 낯설음으로 채워졌다

 

웃더라도 타인들이 내 행복을 시기하지 못하도록

최초의 미소를 만들고 싶다

아무도 모르는 웃음소리를 내보고 싶다

 

등신이라며 자책했다

또다른 등신들을 보는 눈이 생겨서 안도했다

타인의 불행을 과장해서 내 불행을 지우는

비법도 알게 되었다

 

거듭하다 보면 슬픔도 태도가 된다

 

 

시집 슬픔도 태도가 된다(2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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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관 / 충남 청양 출생. 2011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바람의 전입신고』 『부르면 제일 먼저 돌아보는슬픔도 태도가 된다, 산문집 좋은 말』 『슬퍼할 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