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거(深居)/ 이기인
연필의 웃음을 한 자루 모아놓았다
흩어지는 잿빛을 이토록 조용한 생활에서 꺼내는 일은
일기장에도 검은 불을 붙이는 일
오늘은 반나절을 사랑하고 너무 좋아서 반나절을 후회했다
책상에 엎드려 우는 밤의 표정을 지우개로 지웠다
절벽을 기웃거리던 살구나무 꽃잎은 하얗게 흩어지고
모닥불을 꺼뜨린 시가 저쯤 있을까
번개가 뱉어놓은 길을 한 걸음씩 돌아본다
사무치지 않으면 못 살아 발버둥치는 칡넝쿨과 어지러운 꽃
너무 좋아서 게으른 풍경이 주저앉은
살랑거리는 잎사귀 뒤에서도 자라는 숨
잠자리 부서진 날개를 끌어안고 들어가는 거기
⸺계간 《애지》 2019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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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인 / 1967년 인천 출생. 200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 『어깨 위로 떨어지는 편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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