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시

(제20회 박인환문학상)-알고리듬 (외)/김건영

시치 2019. 12. 15. 02:57

(제20회 박인환문학상)

 

알고리듬 ()/김건영

 

 

  

  이 죄는 나도 알아요 눈을 감으면 끝난다는 것을 설사 끝나지 않는 것이 있더라도 여러 번 감으면 끝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앓고 있고 몸속에 시간이 쌓이는 것으로 먼별에서 순교자와 배교자의 자식들을 불태우며 항성보다 빛나는 별이 있음을 이해한 후 단지, 약속했던 손가락을 자를 뿐인데 웃자란 가지가 뿌리로부터 멀어지려 제 머리를 찢고 온몸에 눈을 틔울 때 한밤중은 몸을 뒤집으며 떨기 위한 구실임을 잊지 마라 이르니 제 손바닥으로 허공을 문지르고 잎은 자라 시간을 흐리면서 흐르지 않고 주름만 깊어질지니 화형된 자들이 쌓인 행성은 백색의 외골격으로 추위를 형용하고서 마냥 떠올라만 있어 그 빛을 받아 붉어진 이마를 눌러 주며 이 별에 있는 모든 돌아오는 것들의 이름을 되뇌어 주던 사람이 있더라 했었는데 토마토 기러기 일요일 같은 것들은 돌아오고도 그는 돌아오지 않고 이 별의 사육사는 지구의 적극적 기울기에 대해 침묵하고 우주에 늘어진 검은 현을 연주하던 꿈속에서 껌을 씹거나 꿈속에서 꿈꾸지 않는 꿈을 꾸며 긴 잠이 들었었다 이르니 문을 활짝 열어 두고 보는데 바람이 그것을 닫아 버린 것을 듣고서 놀라 꿈에서 깨어나 누구든 나타나서 내 창문 너머로 적의라도 보여 주기를 바라고는 다시 문을 열고 몸을 식히려 꿈속의 육신으로 기어들어 갔으니

 


기이

  

                                                          가지의 갈라짐은 입을 부른다 잎은 가을을 바라고

                                               눈의 예감이 잎의 색을 물들일 것이다 하여 나무의 시간을

                                              아는 자들이 인간의 백 세를 期頤(기이)라고 번역하기도 하였다

 

 

물이든 북 같았습니다

터지지 않는

채를 견디는 먹먹한 소리

, , 숲에서, 타고, 있습니까

너의 의자는 숯을 태우고 있습니까

 

한 잔의 차를 마시고

이것을 진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가당한 나무에서는 겨울에도 잎은 내기

먼저 지는 사람이 눈[] 내리기

재와 눈을 섞기

 

바다를 건너갈 것처럼 망연히

스푼을 저으면

설탕은 단호하게 가라앉고

비명을 지르는 그믐은 검은 물에 녹아 버리고

의문문이 열립니다

흰 것과 검은 것을 섞었을 때

하얘지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너의 외국어는 탁자처럼

단단합니까

 

한 문장도 밑줄을 치지 않은 책을

덮는 것처럼 이제 가십니까

남아 있던 각설탕의 모서리는 날카로워지고

의문문은 누가 닫습니까 돌아는 오십니까

손목시계 속에서 침엽수들이 잎을 떨구고 있습니까

나머지 수명에 기대

나의 의자는 높이 자라고 마는 것입니까

 

탁자 위의 손이 겁에 질린 새처럼 도망칠 때

숲에 불이 옮겨 붙었습니까

바다로 피신하려 합니까

 

술래잡기처럼

뒤에 나올 사람이 저 문의 열기

, 숲은, 타고, 있습니까

왜 이 페이지만 젖어 있습니까

 

 

 

 파롤의 크리스마스

  ―蛇傳 8

 

  

  놓을 때가 된 노을이 있다 여기는 신이 버린 주말농장 우리는 가난을 서로에게 떠넘기며 놀았다 목마른 자가 음울을 판다 우리 매달리지는 않기로 했잖아요 너무 익어 무른 도원 바닥에 붉은 감이 떨어졌다 마침표가 발밑에 번져 밤이 왔다 언어의 정원 초과였다 말에 너무 많은 것이 타고 있었다 말 위에서 세상이 불타고 있었다 우리는 유리를 접고 밖으로 나가 구름을 만들며 그것을 구경했다 유리한 위치다 우리는 진실만을 말하면서 헤어진다 거짓말을 하면서 사랑했고 본드를 부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유대뿐인데 그것만을 주지 않았다

  다다른 말들

 

  인도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소똥의 부재가 두려웠다 길에 소가 없다니 침묵에도 청자가 필요하다니 이상합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은 모두 같은 말입니다 같은 말을 했는데 우리는 왜 다른 곳을 보고 있습니까 그저 발화만 보고 있지 지금 이 상황에 웃음이 나와요 말은 노래가 아닌데 노래는 말이 되고 마는 것입니까 음울한 개구리는 바닥에서 노래를 부른다 무거운 어둠에 눈을 뜰 수 없는 것을 子正作用이라고 부릅니까 이것은 Sorry 없는 아우성 절반이 사라지는 시간을 半死作用이라고 이릅니까 말이 씨가 될 때까지 개구리가 올챙이가 될 때까지 말이 시가 될 때까지 더듬어야 한다

  다 다른 말들

 

메멘토 모리[] 숲을 기억해 등 푸른 선생은 무덤이지 우리는 모두 수포로 돌아갈 거야 닫힌 유리창에 찔리기도 할 것야 금 간 이 단단하게 흩뿌려져 있다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왜 다 끝나고 나서만 미안하다고 말하는 건가요 그 말에 의미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가지처럼 오직 빈손으로만 얼굴을 만질 수 있다 이리 오너라 업보 놀자 습속에도 바람이 있습니까 의 끝에 어른거리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한 말을 하는 귀신들에게만 들려주었던 산책과 죽은 책들의 갈피를 생각하면서 아침에 도착해야 한다 마지막 장은 雨期기로 했습니다 발자국이 언어가 될 수 있습니까 책은 숯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다 닳은 말들

 


 

* 수상작으로 선정된 10편의 제목. 1) 알고리듬  2)덜 떨어진 눈물  3) 기이  4) 부르튼 숲  5) 내생의 폭력  6) R  7) 주사위 전문점 팔아다이스  8) 나의 크샤트리아  9) 파롤의 크리스마스  10) 미미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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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영 / 1982년 전남 광주 출생. 서울예술대학 미디어창작학부 졸업. 2016년 하반기 현대시신인상 당선으로 등단. ‘다시다동인. 시집 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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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폐허 플레이, 알리바이의 시쓰기

 

 


   기 수상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그동안 박인환문학상은, 서정성보다는 실험성이 강한 시들에, 그리고 때로는 아주 과격하고 파격적이며 개성이 강한 시들에 주목하면서 다른 문학상과 차별을 유지해 왔다. 그런 박인환문학상이 올해로 20회째를 맞이한다. 어떤 문학상이든 10년을 지속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20년을 지속해왔다는 것은 그 상의 권위나 위상을 떠나 적지 않은 찬사와 감사가 덧붙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박인환문학상은 지난해부터 응모제로 바뀌면서, 응모 시인들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작품만으로 본심을 진행하였다. 특히 올해는 기한 내에 응모한 시인이 많지 않아 예심 위원들이 지난 1년간에 출간된 시집을 중심으로 최종 후보작을 선정했다고 한다. 응모기간이 지나서 응모한 시인들의 작품이 제법 있었지만 그 작품들은 예심에서 제외했다는 후문이 있었다.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 중에서 심사위원들은 마지막까지 알고리듬9편과 이브9편을 가지고 논쟁을 벌였다. 논의의 과정에서, 대상이 되었던 시인이 김건영양안다였음을 알게 되었고, 수차례 논의 끝에 2차 투표를 통해 김건영 시인의 알고리듬9편을 제20회 박인환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하였다. 사실 누구를 선정하더라도 박인환문학상의 취지나 의의에 부합하는 작품들이었기에 심사위원들의 고민은 그만큼 더 깊었다. 양안다 시인은 이미 2권의 시집을 통해 문단에서 자신만의 미학적 성채를 구축하고 있는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고, 김건영은 2016년에 등단하여 올 6월에 첫 시집 ?파이?를 출간하면서 새롭게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는 시인이다. 둘 다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개성이 강한 젊은 시인들이다. 심사위원들은 문단의 평가새로운 스타일사이에서 무게 추를 어디에 둘 것이냐 고민을 하였다. 논의 끝에, 언어에 대한 방법론적 자각과 시적 규범에 대한 부정성 면에서 김건영 시인이 좀 더 돋보인다고 판단하여 그를 수장자로 선정하였다.

   데리다에 의하면, 문학의 역사는 폐허의 역사이다. 모든 문학적 글쓰기가 폐허의 놀이이겠지만, 김건영 시인의 시는 세계 구성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폐허의 상상력이 바탕이 된다. 폐허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이 없다.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자면, ‘(die Leere)’이다. 그런 점에서 폐허는 없는 것이 있는세계이며, 부재의 세계이다. 그러니까 폐허는 없으면서도 있는 이상한 세계이다. 폐허처럼 인과성이 탈락된 황폐한 현실에서, 김건영 시인은 지금 여기를 바라보기 위해 다른 곳을 본다. ‘다른 곳’, 즉 김건영은 알리바이를 꿈꾼다. 흔히 재판과정에서 부재 증명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알리바이’(alibi)는 라틴어 알리우비(aliubi)’에서 왔다. ‘ali(다른)’‘ubi(장소)’를 합쳐 만든 말이다. 그러니까 알리바이는 어원상 다른 곳을 의미한다. ‘지금 여기를 강조할 때 알리바이는 공간적으로만 여기와 다르다는 특성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알리바이는 지금이라는 시간이 강조된다. 다른 곳에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이곳의 삶을 정당화하는 알리바이는 이곳/다른 곳의 차이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부재’, ‘긍정/부정’, ‘자아/타자’, ‘진리/허위등의 관점들을 파기한다. 김건영 시인이 알리바이를 꿈꾼다는 것은 왜곡되고 뒤틀린 언어와 문장들이 지금 여기의 참담한 현실을 오히려 적확하게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김건영 시인의 시 곳곳에 드러나는 언어유희패러디’, ‘시니피앙의 놀이등 언어를 다루는 그의 솜씨는, 단순히 언어적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 현실의 허구와 허위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우리들을 탄복시킨다. 폐허의 상상력이 빚어내는 해학과 포기적 반어성은 없는 현실을 반영하고, 왜곡하고, 부정하고 파괴하고, 노는 일과 통한다. 김건영의 시쓰기는 여기저기 존재하는 폐허를 보면서 다른 곳으로 보면서 미적 형식 역시 또 하나의 허위라는 인식을 심어준다. 중요한 것은 그의 시에서는 없는 현실’, ‘다른 현실을 다루지만, 다른 곳을 바라보면서 지금 여기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시를 쓴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김건영의 시가 보여주는 시적 모험은 한물간 문학에 대한 비판적 시 쓰기이다. 그의 시적 모험이 더욱 즐거운 혹은 아픈 놀이가 되기를 기원하며,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심사위원 : 유성호(문학평론가), 장석원(시인), 강동우(문학평론가)